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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대왕과 인순왕후 청송 심씨의 강릉.
태릉 근처에 조성돼 죽어서도 어머니 문정왕후 슬하를 못 벗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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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녹색의 참도(參道) 이끼.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강릉 정자각 앞에서만 자란다.
| 옛 사람들에게서 교훈을 얻고자 인명사전을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 인물들의 행적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뒷날의 사관(史官)이나 학자들의 평가로 훌륭한 업적과 잘못된 과실들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시대를 오판하고 역행하며 누려 온 자신만의 일신영달은 가문의 위신 추락과 함께 후예들에게는 천근만근의 가슴앓이로 남는다.
제13대 명종(明宗)대왕 재위 시절을 살다 간 인물치고 역사 앞에 당당하고 좋은 일만 한 사람은 드물다. 임금은 어머니(문정왕후) 치마폭을 헤어날 길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외척들의 발호까지 극에 달해 국정은 농단되고 백성들은 궁핍과 도탄에 빠졌다.
왕권이 허약해 신권을 장악 못하면 나라가 흔들리기 마련이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명종(1534∼1567)은 8년 동안 문정왕후 수렴청정을 받다가 20세가 돼서야 친정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상의 권좌에서 쉽게 물러날 모후가 아니었다. 국사를 처결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여지없이 명종을 내전으로 불러 호되게 질책했다.
그래도 성이 안 차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고 뺨에 손찌검까지 했다. 이럴 때마다 명종은 어른이 돼서까지 어머니에게 얻어맞는 자신이 수치스러워 대신들 앞에 제대로 서질 못했다. 등극하던 해는 외척들 간 이전투구로 외가 대부 항렬의 윤임(대윤)이 외숙 윤원형(소윤)한테 죽는 참사(을사사화)를 지켜봐야만 했다. 얼마 후에는 큰 외숙(윤원로)까지 사약을 내려 죽이는 것이 아닌가.
○ 외숙 윤원형 곳간은 뇌물 썩어 넘쳐
문정왕후가 영의정 자리에 앉힌 외숙 윤원형은 조정의 모든 실권을 쥐고 흔들며 닥치는 대로 재물을 긁어모았다. 삼남 각지의 부패 관리들이 상납한 뇌물로 곳간은 썩어 넘쳤고, 성 내에만 집이 열여섯 채나 됐다. 윤원형은 정실부인 김씨를 쫓아내고 기생첩 정난정을 정경부인으로 삼은 뒤 문정왕후와 내통케 해 내명부를 유린하며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다.
정난정은 봉은사 승려 보우(1509∼1565)를 문정왕후에게 천거했다. 문정왕후는 보우를 통해 도첩제를 실시케 하고 도승시(度僧試)를 부활해 한때 불교 융성기를 맞기도 했다. 숭유척불의 창업 이념이 추락하고 능멸당하자 사림 세력들이 참소했지만 왕후의 위세에 눌려 어느 누구도 어쩌지 못했다.
명종은 국정의 모든 난맥상을 지켜만 봐야 했다. 한번은 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들을 신원(伸寃)시켜 주려 했다가 어머니한테 호된 경만 치고 말았다.
○ 혹독한 가뭄 괴질까지 나돌며 민심 흉흉
무심했다. 삼천리 강토에는 혹독한 가뭄으로 기근이 처참했고 괴질까지 나돌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도처에서 도적 떼가 창궐했다. 경기도 양주 출신 도적 두목 임꺽정이 황해도 구월산을 무대 삼아 3년간을 종횡무진한 게 이때다. 임꺽정은 관군들을 목 베고 부패관리들의 곳간을 털어 백성들을 구휼했다. 민초들은 관군에 쫓기는 임꺽정을 숨겨 주고 의적으로 추앙했다.
이 틈을 타 전라도 지역을 노략질하던 왜인들이 큰 변란을 일으켜 전남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이 을묘대변이 임진왜란의 단초가 될 줄 누군들 짐작했겠는가. 그래도 조정에서는 사람을 죽이고 귀양 보내는 소모적 정쟁뿐이었고 국방의 허술함은 사방에서 드러났다. 나라꼴이 이 지경에 이르자 모든 대소신료들과 백성들은 문정왕후가 죽기만을 고대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남매의 몰락은 뜻밖에도 엉뚱한 데서 비롯됐다. 파주 서삼릉에 장경왕후(제1계비·친정 9촌 고모)와 잘 있는 남편 중종릉을 이장하면서부터 까닭 모를 흉사가 겹쳤다. 천장 후 1년 뒤에는 유일한 혈손 순회세자(1551∼1563)가 13세로 죽어 버렸다. 그제야 뒷일을 돌아보며 뼈저린 후회를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심화가 도져 울혈이 되더니 2년 후 자신도 세상을 뜨고 만다. 1565년 4월 7일 65세였다.
이제는 명종이 걱정이었다. 이복형 인종이 갑자기 승하(1545)한 뒤 대통을 이은 명종은 왕비와 함께 문정왕후 눈치를 보며 보신해 왔는데 세자도 죽고 어머니도 떠난 것이다. 인순(仁順)왕후 청송 심씨(1532∼1575)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명종보다 두 살 위였다. 부부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명종은 이복 서형(庶兄) 덕흥군의 세 아들을 기특히 여겼다. 어느 날 명종이 하원군·하릉군·하성군 세 조카를 불러 왕관을 벗어 주며 써 보라고 했다. 두 형은 어관을 쓰고 어루만지며 좋아했다. 막내 하성군의 차례가 되자 무릎을 꿇고 극구 사양하며 아뢰었다.
“군왕이 쓰시는 것을 감히 신하가 어찌 머리에 쓸 수 있겠사옵니까.”
명종이 감탄하며 “그러니 이 관은 아무래도 너에게 줘야 되겠구나” 하고 세자로 책봉해 왕통을 잇게 하니 바로 선조대왕이다.
문정왕후가 훙서하자 명종의 치세는 뒤늦게나마 탄력이 붙었다. 풍기 백운동서원에 최초의 사액간판을 내리고 개국 초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에 무고하여 기록된 “태조가 고려 역적 이인임 후손”이라는 내용을 수차례 주청해 바로 잡았다. 온 백성의 지탄을 받던 외숙 윤원형을 삭탈관직하고 귀양 보내 정난정과 자결하도록 내쳤다. 승려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 보내 그곳에서 장형(杖刑)으로 맞아 죽게 방치했다. 민심이 떠난 조정 국면을 만회하고자 이번에는 왕비 외숙인 이량(1519∼1563)을 기용했다.
○ 퇴계 이황 등 충신들은 벼슬 거절하늘도
그러나 명종은 인복이 없었다. 이조판서직까지 오른 이량은 윤원형 못지않은 탐욕가였다. 얼마나 축재를 일삼았는지 그의 집 문전은 곡물과 뇌물로 산더미를 이뤘고 매관매직하러 몰려든 모리배들이 저잣거리처럼 붐볐다. 험한 산중에서 늑대를 겨우 피하고 나니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이럴수록 명종은 높은 벼슬도 거절한 채 안동 도산서원에서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고 있는 퇴계 이황이 간절했다. 몰래 화공을 보내 퇴계 모습을 병풍으로 만든 뒤 밤낮으로 쳐다보며 흠모했다.
명종의 몸과 마음에는 이미 깊은 병이 들어 있었다. 군왕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던 명종은 삶을 포기했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조정은 탐관오리들로 가득 찼는데 퇴계 같은 만고충신은 등을 돌렸으니…. 사람이 만사를 포기하고 마음의 끈을 놓으면 절명으로 이어진다. 재위 22년 만에 34세로 승하하니 제대로 된 왕 노릇은 2년도 채 안 됐다.
문정왕후의 태릉과 함께 사적 제201호인 명종의 강릉(康陵)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 산223-19번지에 있다. 죽어서도 어머니 곁을 못 헤어나고 있다. 해좌사향(동남향)의 강릉은 한북정맥의 지맥에 수락산을 종산 삼아 불암산을 주산으로 앉힌 명당자리다. 선조 등극 후 잠시 수렴청정하다 44세로 훙서한 인순왕후와 동원쌍봉릉으로 조영돼 있다. 강릉은 일반 공개를 않고 있어 학술연구나 취재 목적 외에는 접근이 금지돼 있다.
명종의 후사가 끊겨 후궁 손인 하성군(선조)이 왕위를 이으며 조선왕조의 왕통 계승에는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적통(大君)이 아닌 후궁 손(君)들 간의 암투와 살상으로 왕실의 역사는 다시 피를 부른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