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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대왕과 인성왕후의 동원쌍봉릉 효릉.
농협 소유지로 둘러싸인 채 출입제한으로 묶여 있어 왕의 기구한 일생처럼 외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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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침 사초지 아래의 예감. 산릉 기신제를 올린 후 축문을 태워 묻는 곳이다. |
좋은 사람을 호인(好人)이라 한다. 매사에 우호적이고 협조적이어서 인생길을 동반하기가 편하다. 그러나 사람 좋다고 함부로 대하다간 일격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무골호인으로 한없이 좋은 사람이 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 호구(糊口)로 불린다. 인격을 능멸하거나 무시당해도 ‘허허’대며 웃고 만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호인으로는 살되 호구는 되지 말아야 한다.
제12대 인종(仁宗)대왕은 수신(修身)은 경지에 달했으나 제가(齊家)와 치국평천하는 이루지 못했다. 개인의 앞날이나 국가의 장래를 함부로 예단할 수는 없지만 인종이 건강해 과단성 있게 통치했다면 조선 중기는 보기 드문 성군 시대가 도래했을 것이라고 사가들은 애석해한다. 용상에 앉아 잘못된 권력구조를 바로 잡고 뒤엉킨 왕실 궤도를 수정할 수 있었음에도 지나친 효도에 집착한 나머지 국사를 그르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다.
인종(1515~1545)의 성품은 가히 성인 경지에 가까웠다고 각종 기록은 전하고 있다. 3세 때부터 독서를 시작한 뒤 늘 조용히 앉아 이치를 탐구하고 밤을 새워 몰두하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 평소 농지거리의 말을 하지 않았고 얼굴을 찡그리거나 웃는 모습도 나타내지 않아 세자를 시강하는 스승조차 어려워했을 정도다. 자신을 칭찬하는 기미가 엿보이면 문득 기쁘지 않은 안색을 지어 경계하곤 했다.
○ 재위 8개월 반 만인 31세에 훙서
인종의 이런 성격 형성은 그의 성장 배경에서 기인된다. 생모인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은 지 일주일 만에 승하했고, 세살 때 계모로 들어온 문정왕후는 전처의 아들이라고 해서 원수 대하듯 했다. 문정왕후는 자신의 소생(명종)이 등극하는 데 걸림돌인 인종을 죽이려고 섬뜩한 음모를 끊임없이 획책했다. 역사의 행간을 면밀히 살펴 보면 그나마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게 천운이라 할 수 있을 지경이다. 모두가 어미 잃은 슬픔이었다.
일곱 살에 세자로 책봉된 후 25년 동안 세자 신분으로 있다가 재위 8개월 반 만에 31세로 훙서하는 인종의 일생은 가엾기만 하다. 계모의 학대와 이전투구 양상의 외척들 간 혈투로 마음 약한 인종은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이럴 때마다 세자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살아 있어서 그렇다”고 자학했다. 더구나 그는 신진 사림세력 조광조 일파의 도학사상에 깊이 몰입돼 모든 탓을 자신에게서 찾고 있었다.
동궁 시절 있었던 일이다. 대궐 동쪽에 있는 동궁(東宮)은 세자가 거처하는 궁궐로 해 뜨는 정기를 받는 곳이며 세자의 별칭이기도 하다. 한밤중 세자빈(인성왕후) 박씨와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시뻘건 화염에 휩싸였다. 누군가가 여러 마리의 쥐꼬리에 화선을 달아 외길 통로를 낸 뒤 동궁으로 쫓아 보낸 것이다. 꼬리에 불이 붙어 뜨거움을 참지 못한 쥐가 갈 곳은 동궁 안뿐이었다.
세자는 모든 것을 직감했다. 미우나 고우나 자신을 키워 준 계모 문정왕후에게 효도하는 길은 죽어 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이글거리는 불길에 놀라 급히 빠져나갈 것을 재촉하는 세자빈에게 결연히 분부했다.
“나는 여기 있을 테니 어서 빈궁이나 피하도록 하시오.”
촌각이 생사를 가르는 일촉즉발의 위기 순간이었다. 잠시를 지체하다간 화형으로 이어지는 찰나였다. 이때 밖에서 애타게 세자를 찾는 중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자는 어서 나오지 않고 무얼 하는가. 속히 빠져 나오도록 하라.”
세자는 다시 생각했다. 자신이 불에 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겐 효도일지 모르겠으나 부왕에겐 불효에 불충까지 더해진다는 것을…. 그 후 불을 지른 범인이 누구인 줄 백성들까지 훤히 알았지만 어느 누구도 어쩌지 못했다.
○중종 승하하자 6일동안 물 한 모금 안대
중종 22년(1527) 2월 26일에는 작서(灼鼠)의 변이 일어났다.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과 눈·귀를 불로 지져 동궁의 해방(亥方·서북향) 은행나무에 걸고 세자를 저주하는 방서(榜書)를 걸쳐 놓은 사건이다. 해(亥)는 돼지에 속하고 쥐와 돼지는 비슷한 형상으로 본다. 세자가 2월 25일생으로 돼지띠였다. 소름 끼치는 끔찍한 일이었다. 10년 후 김안로의 아들 김희(세자 매형)가 저지른 사건으로 밝혀졌지만 엉뚱하게 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씨(반정공신 박원종 양녀)와 아들 복성군이 누명을 쓰고 사사당했다.
인종은 비길 데 없는 극진한 효자였다. 어린 세자 때부터 해 뜨기 전 일어나 하루도 빠짐없이 중종 침전에 문안드리고 수라상도 직접 챙겼다. 중종이 승하하자 세자는 머리카락을 흩뜨린 채 맨발로 땅에 엎드려 6일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남칠여구(男七女九)라 해 남자는 7일, 여자는 9일 굶으면 죽는다고 했다. 국상으로 지나치게 훼상한 나머지 뼈만 앙상하게 남아 지팡이를 짚어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국가를 통치하는 지도자의 건강은 국운과 직결되는 법이거늘 이래 가지고서야 어찌 천하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인종은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계모 문정왕후에게 문안을 빼놓지 않았다. 이때마다 문정왕후는 12세 아들 경원대군을 앉혀 놓고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 것이냐”고 표독스럽게 몰아쳤다. 인종에겐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와 임금 자리도 귀찮을 따름이었다.
○문정왕후 준 음식 먹고 병세 더욱 악화
그러던 어느 날 문안차 들른 내전에서 평소와 달리 문정왕후가 친절히 맞으며 떡과 음식을 권했다. 인종이 맛을 보니 이상했으나 뿌리칠 수 없어 그냥 먹었다. 극도로 쇠약해진 인종의 병세가 그 후 더욱 악화됐다. 죽음을 직감한 인종이 영의정 윤인경을 불러 유명을 내렸다.
“내가 몹쓸 병에 걸려 회복하기 어려울 것 같소. 경원대군에게 전위코자 하니 경들은 그를 책려하고 보익해 내 뜻에 부응토록 하시오. 장지는 반드시 부모의 능소 곁에 묻어 내 소망을 들어주도록 하고 장례는 소박하게 치러 민폐를 줄이도록 하오.”
이튿날(7월 1일) 경복궁 정전에서 훙서하니 보령 31세로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보름 만이었다. 조선 임금 가운데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이었다. 인종의 치적이라곤 파방(破傍)된 현량과의 복구와 기묘사화로 죽음을 당한 명현들을 신원복구한 것뿐이었다. 경원대군으로 대통을 잇기 위해 일부러 후사를 안 두고 검약하게 산 인종을 생각하며 백성들은 성군을 잃었다고 슬퍼했다.
이런 임금이 예장된 곳이 서삼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 내의 효릉이다. 능호조차 효릉(孝陵)으로 지어 올렸다. 사적 제200호로 농협 소유의 젖소개량사업소가 있어 일반인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간좌곤향(서남향)의 인종 능침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으나 32년을 더 살다가 선조 10년(1577) 64세로 승하한 인성(仁聖)왕후 박씨(우의정 박용 딸) 능은 난간석만 있는 동원쌍봉릉이다. 인종은 후궁으로 귀인 정씨를 뒀는데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의 큰누이다.
능침 앞 혼유석(망자의 혼이 나와 노니는 상석)에서 아뢰어 봤다. “전하, 천신만고 끝에 즉위하셨으면 옥체 보존하셨어야지 지나친 효행으로 졸지에 훙서하신 뒤 나라꼴이 어찌 됐는지 아시나이까.”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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