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살아가는 중년 삶의 이야기

특별기사이야기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0>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희릉

惟石정순삼 2010. 7. 30. 08:3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0>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희릉

25세로 요절한 장경왕후 파평 윤씨의 희릉.

대윤 윤임의 동생으로 권력 다툼의 와중에서 사후 수난이 끊이지 않았다.

 

희릉 능침 앞의 무인석. 왕권의 상징으로 오직 왕릉에만 세울 수 있다.

세상에서 사람이 겪는 고통 중 견줄 데 없는 모진 고통은 아이를 낳는 일이라 했다. 오죽하면 산고(産苦)라 했을까. 그래서 만삭의 임산부가 출산을 하러 산실에 들어갈 때 자기가 신었던 신발을 눈여겨본다고 한다. “내가 과연 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하고.

 제11대 중종대왕 제1계비 장경(章敬)왕후는 참으로 박복한 여인이다. 대통을 이을 왕자를 출산하고도 영화를 누려보기는커녕 젖꼭지조차 물려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국본(國本·세자)과 목숨을 바꾼 것이다. 핏덩이 자식을 두고 죽는 한은 골수에 맺힌다 하여 눈마저 감지 못한다고 했는데 장경왕후가 그랬다.

○ 핏덩이 아들 두고 과다출혈로 숨져
 중종 10년(1515) 2월 25일. 장경왕후가 효혜 공주를 낳은 지 5년 만에 산기가 있자 대궐 안은 잔치준비로 분주했다. 중종은 물론 궐 안팎의 대소신료들도 떡두꺼비 같은 왕자가 탄생하기를 학수고대했다. 마침내 우렁찬 고고성과 함께 원자가 태어나니 제12대 인종이다. 나라의 경사였다. 중종은 곧바로 가벼운 죄인들을 방면하고 하급직의 승급을 명하는 성은을 베풀었다.

 그런데 난산이었다. 출산과정에서 몇 번을 기절했다가 깨어난 왕후는 몸을 푼 뒤 한참 만에야 겨우 눈을 떴다. 이미 기력이 쇠진한 데다 과다출혈이었다. 급히 전의를 불렀으나 소생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갈을 받은 중종이 내전에 들러 마주했지만 몸조차 가누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었다. 모든 것을 직감한 임금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은총을 입은 바가 지극히 크온데 다시 더 번거롭힐 말씀이 없사옵니다.”

 이튿날 왕비의 산후(産後)는 더욱 위중해졌다. 시녀들의 부축을 받고 겨우 일어나 지필묵을 찍어 금상(今上)께 서찰을 올렸다.

 “어제는 심사가 혼망하여 잘 깨닫지 못하고 아뢰지를 못 했습니다. 지난해 여름 바야흐로 몸(인종)을 가지고 있을 때이옵니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이 아이를 낳거든 억명(億命)이라 함이 좋겠다’ 하므로 이를 써서 벽에다 감춰두고 남에게 발설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중종이 벽을 찾아보니 사실이었다. 한없이 측은하고 억장이 무너졌지만 서산낙일 지는 해를 막을 자 그 누구도 없었다. 왕비는 인종을 낳은 지 일주일 만인 3월 2일 경복궁 별전에서 승하했다. 하늘도 무심하여라. 유난히도 심성이 곱고 어질었던 왕후가 죽자 온 산하는 큰 슬픔에 잠겼고 천지신명을 원망하며 앙천통곡했다.

○ 죽음이 불러온 소용돌이 `일파만파'
 자고로 갑남을녀(甲男乙女)나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역사의 축(軸)을 돌려 놓을 순 없다. 역사는 권력의 칼자루와 재물의 곳간에서 예기치 않던 궤도로 급선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5세로 요절한 장경왕후(1491~1515)의 족적이 찬란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이 여인의 죽음이 불러온 역사의 일파만파는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는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번지에 있는 조선왕실 능역에는 효릉(제12대 인종) 예릉(제25대 철종)과 함께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 있어 서삼릉으로 회자된다. 6만5970평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된 이곳에는 대군·군·공주·옹주 등 왕손들의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 54기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묘도 함께 있다. 전국 각지의 풍수명당에 산재해 있던 태실들을 왕실 정기를 끊기 위해 일제가 강제 집결시킨 것이다.

 간좌(동에서 북으로 45도)곤향(서에서 남으로 45도)의 서남향인 희릉의 잉상(孕上·능침 뒤의 산정기가 응결된 곳)에 다다르면 애절한 물음부터 앞선다. “그토록 귀한 왕세자를 낳으시고 품에 한번 안아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뜨셨으니 얼마나 원통하십니까. 아울러 왕비마마께서는 당신의 사후에 일어난 끔찍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알고 계시온지….”

 장경왕후 파평 윤씨는 성장과정이 불우했다.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이며 고조부 윤번이 세조의 장인이며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다. 8세 때 어머니(순천 박씨)가 죽자 얼마나 울었던지 사훼(나무 가지처럼 야위고 마름) 지경에 이르렀다고 왕실 내명부 문서에 전하고 있다. 이 참상을 전해 들은 월산대군 부인이 손수 데려다 양육하게 된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친형으로 중종에겐 큰아버지다. 그 월산대군의 부인(승평부인·昇平夫人·정일품)이 파평 윤씨로 장경왕후의 친정 고모였던 것이다. 월산대군은 순천 박씨를 후실로 두었는데 박원종의 누이였다. 연산군이 절세미인이었던 박씨를 겁탈하자 박씨는 자결하고 말았다. 악에 받친 박원종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용상에 앉혔다.

○ 제2계비된 문정왕후 역사 뒤흔들어
 중종이 등극하자 박원종 등 반정세력은 연산군의 처조카딸 되는 중종 원비 단경왕후 신(愼)씨를 일주일 만에 강제로 폐비시켜 궁궐에서 내쫓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매형 집에서 성장해 숙의로 있던 파평 윤씨를 제1계비로 앉히니 바로 장경왕후다. 왕실의 혈연과 혼인관계는 이렇게 얽히고설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장악해 왔다.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자 오빠 윤임(1487~1545)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며 정국은 또다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된다. 이즈음에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훙서한 것이다. 조정은 윤임의 9촌 조카딸이 되는 문정왕후를 제2계비로 맞았다. 여기서 또다시 역사는 뒷걸음질치고 국정은 농단되고 만다.

 장경왕후는 죽어서도 수난을 겪었다. 붕어 후 처음에는 헌릉(현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오른편 산록에 능침을 조성하고 능호를 희릉이라 했다. 그러나 사후의 안식도 오래가지 못했다. 좌의정 김안로가 장경왕후 묏자리가 풍수적으로 흉지라며 이장을 내세워 정쟁을 일으킨 것이다. 문정왕후와 원수지간이었던 김안로가 계모(문정왕후) 슬하에서 자라는 인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김안로는 장경왕후가 낳은 효혜 공주를 며느리로 맞아 중종의 부원군 신분이었다.

 결국 장경왕후는 진명(盡命)한 지 23년 만인 중종 32년(1537) 현재의 서삼릉으로 천장됐다. 7년 후 중종이 승하하자 유명에 따라 희릉 옆에 동원이강릉으로 조영하고 정자각을 왕과 왕비 능 사이로 옮겨 세웠다. 김안로의 권력 전횡으로 장경왕후와 그의 소생 인종과도 원수가 되어버린 문정왕후가 이 상황을 그냥 넘길 리 만무했다.

 왕위에 오른 인종을 닦달하고 볶아 8개월 만에 죽게 한 뒤 아들이 명종으로 즉위하자 세상은 온통 문정왕후 것이었다. 친정 9촌 아저씨 윤임을 사사시키고 동생 윤원형을 권력 핵심으로 내세워 국정을 뒤흔드니 민심은 이반되고 나라 재정은 바닥나고 말았다.

 기어이 문정왕후는 9촌 고모 되는 장경왕후와 남편 중종 사이를 갈라놓았다. 명종 17년(1562) 중종을 현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정릉으로 이장하고 자신도 옆에 묻히려 했으나 뒤늦게 흉지임을 알고 서울 노원구 태릉에 안장됐다. 장경왕후 희릉의 수난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농협 산하 젖소개량사업소가 들어서면서 입수(入首) 용맥이 회복 불가능하게 훼손되었다.

 장경왕후의 이런 속내를 알고 서삼릉 내의 희릉을 참배하노라면 속절없는 인간 수명이 야속하기만 하다. 더불어 장경왕후의 요절은 명문거족이었던 파평 윤씨 문중을 대윤과 소윤이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으로 갈라놓아 그 앙금이 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가시지 않고 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