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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8>중종대왕과 정릉

惟石정순삼 2010. 7. 30. 08:28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8>중종대왕과 정릉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중종대왕 정릉. 문정왕후의 억지 이장으로 임금 홀로 있는 쓸쓸한 단릉이다.

 

 

봄날 소나기에도 물이 차는 정릉 앞 정자각. 습지에서 잘 자라는 잡초들로 가득하다.


 

    능 이름을 놓고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경기도 화성에 있는 정조 능을 융건릉이라고 우겨대는 것이다. “그럼 그곳에 함께 있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 능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제야 꼬리를 내렸다. 사도세자(추존 장조) 능은 융릉(隆陵)이고 정조 능은 건릉(健陵)이어서 두 능을 합쳐 융·건릉이라고 부른다. 조선왕조의 42기 능 가운데 석 자 이름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뿐이다.

 능명이 같은 경우도 많다. 영릉(英陵·제4대 세종), 영릉(寧陵·제17대 효종), 영릉(永陵·추존 진종)과 장릉(莊陵·제6대 단종), 장릉(章陵·추존 원종), 장릉(長陵·제16대 인조)이 이름은 동일하나 한자가 다르다. 능 이름을 묘호(廟號)라 부르는데 임금이 훙서한 뒤 조정에서 지어 올리는 것이며 재위 당시 치적과 왕의 운명, 성격 등이 포함돼 있기도 하다. 어느 임금도 살아생전 자신의 묘호를 알고 죽은 군왕은 없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왕릉을 선릉이라고 부르는데 원래는 선·정릉이다. 제9대 성종과 제11대 중종(정릉·靖陵)의 부자 왕릉이 함께 있는 것이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정릉(貞陵·태조 계비 신덕왕후)은 또 다른 왕릉이다. 중종이 예장된 정릉에 가면 안됐다는 생각부터 든다. 3명의 왕비와 7명의 후궁에 9남 11녀를 뒀건만 어이해서 단릉(單陵)으로 쓸쓸히 혼자 있는지. 조선왕릉 중 태조 건원릉과 단종의 장릉도 단릉이긴 하지만 정릉과는 그 사연이 다르다. 중종은 장가를 잘못 가 죽어서도 이 신세가 된 것이다.

○ “임금 하지말고 편한 자리나 묻히지…” 한숨

 또 정릉에 가면 “차라리 임금 노릇 하지 말고 죽어 편한 자리나 묻히지…”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정릉은 한줄기 소나기만 지나가도 정자각 앞이 질퍽거리는 물 논이나 다름없다. 장마로 물이 불어났을 때는 홍살문 근처에 배까지 띄워 보기에도 민망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조선왕릉 가운데 능강(岡·능침 앞의 두툼한 인공 언덕) 아래까지 물이 차는 흉지 중의 흉지는 중종릉밖에 없다. 정릉은 건좌손향의 동남향인데 사룡맥(死龍脈)으로 침수를 피할 수 없는 물형이다. 좌향을 제대로 잡으면 냇가 바로 옆을 파도 물이 안 나고, 재혈(裁穴)을 잘못하면 산 중턱을 건드려도 물이 나는 게 풍수의 법수다. 이 또한 고약한 마누라(문정왕후)를 만난 탓이다.

 중종은 등극 과정도 극적이지만 재위 기간 동안 편할 날이 없었다. 연산군의 패악질이 절정에 달했던 1506년 9월 2일. 서울의 밤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반정 주도세력 박원종·성희안·유순정·홍경주 등은 두 패로 나눠 정현왕후를 급히 찾았다. 성종 계비로 진성대군의 생모인 정현왕후 앞에 엎드려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겠다고 아뢰었다.

 순간, 정현왕후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니 될 말이오. 우리 아이가 그 자리를 어찌 감당한단 말입니까.”

 정현왕후가 극구 사양했지만 반정세력도 물러서지 않았다.

 “군신(群臣)들이 협책하여 대계가 이미 정해졌으니 고칠 수 없습니다. 어서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 다른 반정세력 진성대군에 입궐 재촉

 같은 시각 진성대군의 사저. 또 다른 반정세력들이 영문도 모르는 진성대군을 연(輦·임금이 타는 가마)에 태우며 입궐하기를 재촉했다. 이복형인 연산군이 눈치라도 챈다면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어서 겁부터 덜컥 났다.

 “이게 무엇들 하는 짓이오! 나는 임금도 싫고 이대로 사는 것이 좋소이다.”

 이때 진성대군은 거창 신씨(연산군 처남으로 좌의정 신수근의 딸)와 가례를 올린 뒤 대궐 밖에 나가 평범한 왕손으로 숨죽여 살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 시대적 인물이 내리는 판단은 가문의 영고성쇠와 유장한 국운과도 직결될 때가 있다. 반정에 앞서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좌상대감은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른 낌새를 알아챈 신수근이 버럭 화를 내며 대답했다.

 “비록 임금이 포악하긴 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염려할 바가 못 되오.”

 그의 이 한마디는 번성하던 거창 신(愼)씨 문중을 몰락의 길로 전락시켰다. 자신과 동생(신수영)은 반정세력에게 참살당하고 누이는 폐비돼 기구한 목숨을 이어갔다. 딸 역시 왕비로 책봉된 지 일주일 만에 폐비돼 한 많은 70평생을 망연자실 살아가게 된다.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1488~1544)은 성종의 둘째 왕자로 어휘(御諱·임금의 이름)가 역(?)이다. 남의 덕에 왕이 되다 보니 임금 자리에 있는 동안 신세를 갚느라 힘겹기만 했고 원치도 않는 척신들의 등쌀에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처복마저 없었다.

○ 훈구파 견제 세력으로 사림파 카드 들어

중종은 등극한 뒤 연산군의 폐정을 바로잡고 부왕인 성종조의 태평성대를 이어가려고 진력했다. 그러나 조정은 반정 공신들인 훈구파 세력들의 성토장이어서 임금은 항상 밀렸다. 위기를 느낀 중종이 훈구파들의 견제 세력으로 들이민 게 신진 사림파의 조광조 카드였다. 왕의 절대적 신임을 배경으로 등장한 사림파는 급진적이고 과격한 정책으로 사사건건 훈구파들과 부딪쳤다. 사림파는 ‘욕심 많은 소인배들’이라며 훈구파를 무시했고 훈구파는 사림파를 ‘철없는 야생 귀족들’로 업신여기며 으르렁댔다. 이런 와중에도 중종은 비변사를 설치해 북방 야인과 왜구들을 토벌해 민생 안정을 도모했다. 이로 인한 국방체제 정비와 군비 절감 등은 후대 왕들에게도 본이 됐다. 향약(鄕約)을 통한 지방 자치와 주자도감 설치도 큰 치적으로 남아 있다.

 지나친 과욕은 언제나 화를 부르게 돼 있다. 사림파들이 주장한 반정 공신들의 위훈(僞勳)삭제 상소는 훈구파들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쉴 틈 없는 조광조의 강론으로 중종도 이들이 싫어졌다. 이 틈새를 이용해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한 게 기묘사화다. 훈구파들은 궁궐 정원 나뭇잎에 ‘走肖爲王’이라 쓰고 글자에만 감즙을 발랐다. 며칠 후 벌레가 갉아 먹자 희빈 홍씨(홍경주의 딸)를 시켜 임금께 전했다.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으로 중종은 모함인 줄 알면서도 이들에게 사약을 내렸다.

 1544년, 19세로 등극한 중종이 재위 38년 2개월 만에 승하하니 보령 57세였다. 처음엔 서삼릉에 있는 장경왕후 옆에 묻혀 희릉이라 했는데 계비 문정왕후는 이 꼴을 못 보았다. 결국 명종 17년(1562) 시아버지(성종)와 시어머니(정현왕후)가 있는 선릉 왼쪽에 억지로 이장하고 자신도 이곳에 묻히려 했으나 흉지임을 알고 마음을 접었다.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등극한 뒤 8년 동안 수렴청정하며 조정을 마음 내키는 대로 휘저었다. 이른바 훈신·척신의 대결이 문중싸움으로 비화되면서 조선 중기는 또다시 혼란의 와중으로 빠져든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이 끝난 뒤에도 명종이 말을 안 들으면 내전에 불러다 매질을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철이 든 임금도 이런 어머니가 원수였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