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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5>성종원비 공혜왕후 순릉

惟石정순삼 2010. 7. 30. 08:25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5>성종원비 공혜왕후 순릉
한명회의 넷째 딸 공혜왕후 순릉. 영의정 한명회는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 보냈으나 모두 스무 살도 안 돼 요절했다.
순릉 앞의 배위(拜位). 능침에 오르기 전 임금과 신하들이 절하던 곳이다.

자식 앞에 장사 없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천하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거머쥔들 낳아 기른 자식의 죽음 앞에는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산해진미가 입에 당길 것이며 무슨 말의 위로가 귀에 들어오겠는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있는 영의정 한명회(1415~1487)도 그러했다.

 “왕비마마, 억지로라도 수라를 드시고 기운을 차리셔야 하옵니다. 이 나라 종묘사직의 앞날이 마마께 달렸사온데 어서 툭툭 털고 일어나셔야지요.”

 성종 8년(1474) 4월, 이때 한명회와 부인 민씨는 벌써 몇 달째 대궐 안 구현전(求賢殿)에서 넷째 딸이며 성종 원비인 공혜왕후를 병구완하고 있었다.

 “어머님, 단 물이 소태보다 더 써서 못 넘기겠습니다. 아무래도 일어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공혜왕후 한씨가 친정어머니 민씨를 힘없이 바라보며 겨우 대답했다. 그리고는 눈을 슬며시 내리감았다. 민씨 부인이 기겁하고 깜짝 놀라 남편 한명회를 찾았다. 뒤이어 시할머니 정희왕후(세조비)와 시어머니 인수대비(추존 덕종비), 시숙모 안순왕후(예종 계비) 삼전(三殿)이 황급히 달려왔다. 겨우 눈을 다시 뜬 공혜왕후가 말을 이었다.

○ 한명회 두 딸 왕후 스무 살도 안돼 요절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린 것이나 단지 한스러운 것은 삼전의 기대를 저버려 끝까지 효도를 못하고 부모님께 근심을 끼쳐 송구할 뿐이옵니다.” 마지막 유언이었다.

 한명회는 땅을 치며 앙천통곡했다. 이 무슨 인간이 감당 못할 끔찍한 재앙이란 말인가. 일찍이 예종 원비로 시집 보낸 셋째 딸 장순왕후도 17세로 죽었는데 이번에는 19세의 넷째 딸을 잃은 것이다. 14년 만에 두 딸을 앞세우는 참척(慘慽)이 두렵기도 했지만, 겉으로는 의연했다. 각혈할 것 같은 불행한 남의 가족사를 자칫 계유정난(세조의 왕위 찬탈) 당시 ‘살생부 주살사건’과 연결시킬까 봐서였다. 비록 자신의 외손으로 왕통을 잇는 대망이 무산되긴 했지만, 권력은 여전히 그의 손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후 역사의 전개는 한명회 편으로 기울지 않았다.

 세상 인심이란 참으로 냉혹하고 비정한 법이다. 살아생전엔 그 사람 없이 안 될 성싶다가도 죽고 나면 곧 잊히고 마는 게 인지상정이다. 의로운 한 사람의 죽음이 나라 발전의 동력 요인으로 작용하는가 하면, 지탄받는 자의 장수가 역사 발전의 저해 요인으로 부상되기도 한다. 권력의 정상에서야 천하가 내 것일 듯싶지만, 태양이 하루 종일 중천에 떠 있는 것은 아니다.

 왕조시대 국모는 내명부의 지존으로 한시도 비워둘 수 없는 자리다. 수렴청정 중이던 정희왕후는 숙의로 있던 후궁 파평 윤씨를 계비로 앉혔다. 성종은 후사 없이 떠난 공혜왕후를 잊고 미색이 출중한 윤씨에 빠져들어 세자를 낳으니 곧 연산군이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된 성종은 점차 장성하면서 후궁들을 끼고 살았다. 자신 이외에도 열 명의 후궁을 더 두게 되자 계비 윤씨의 눈에서는 생불이 났다.

 그러나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어머니 인수대비의 생각은 달랐다. 세조 이래 왕자가 귀하고 일찍 죽는 데에 근심이 태산 같았던 것이다. 조정 벼슬아치들의 양갓집 규수를 골라 후궁으로 들였다. 대신들은 혼기 찬 여식들을 두고 고심했지만 싫은 내색도 못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곱게 키운 딸을 임금 첩으로 보내는 게 안타까울뿐더러 자칫하면 가문이 몰락하는 멸문지화의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계비 윤씨는 세조가 왕위에 늦게 올라 후궁(근빈 박씨)이 하나밖에 없는 연유로 시할머니가 자기 마음을 모르고, 시어머니는 남편(추존 덕종)이 일찍 죽어 첩 꼴을 안 당해 봐 남의 일로 생각한다고 여겼다. 남편 시앗 꼴은 못 봐도 아들 시앗은 눈 감아 준다고 했다. 왕실 대권을 쥔 두 과부와 질투심에 불타는 윤씨와의 반목은 곧 내명부의 지각 변동으로 비화됐다. 윤씨는 성종을 보기만 하면 볶아댔고 마침내는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 깊은 상처를 내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계비 윤씨는 폐비가 돼 끝내는 사약을 받아 죽고 또 다른 숙의 윤씨(정현왕후)가 연산군을 키웠다. 성종은 연산군을 왕재로 안 봤으나 승하 당시 장성한 왕자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왕위를 이어받게 한다. 이로 인한 무수한 인명 살상과 학정의 피폐는 필설로 형언할 수가 없다.

○ 공혜왕후 죽음으로 왕실 내명부 물갈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권력을 한 손에 잡고 쥐락펴락했던 천하의 한명회도 죽은 뒤 견딜 수 없는 능욕을 당하고 만다. 윤씨의 폐비 사건에 가담했다 하여 연산군한테 부관참시(관을 파내고 시체를 들어내 다시 죽이는 형벌)라는 극형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중종 때 신원이 되긴 하지만 당시 후손들이 당했을 고통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두가 공혜왕후의 요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역사는 애달파지고 마는 것이다. 나라에 큰 일 하려는 지도자나 인재들에겐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측면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바 적지 않다.

 이런저런 시름을 마다한 채 공혜왕후는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 4-1 순릉(順陵)에 안장돼 있다. 사적 205호로 12세 위 친언니이자 시숙모가 되는 장순왕후(예종 원비)의 공릉과 추존 진종(영조의 장남)의 영릉이 있어 공순영릉, 또는 파주 삼릉으로도 불린다. 남편인 성종(선릉)과는 멀리 떨어져 외롭겠지만, 오른쪽 언덕에 언니가 가까이 있어 위안이 될 것이란 생각은 산 사람들의 정서일 것이다.

 왕릉 풍수에 조예를 쌓으려면 당시의 시대상과 권력 배경에 관통해야 한다. 비록 장순왕후와 공혜왕후가 20세도 안 된 어린 나이에 죽어 불쌍할 것 같지만 두 왕후의 친정 아버지는 나는 새도 단박에 떨어뜨린다는 권세가 한명회였다. 당대 일류 신풍(神風)들이 알아서 설설 기며 천하제일 명당 터를 골랐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래서 역사와 풍수는 동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도 신분이 있다. 공혜왕후는 성종이 등극한 후 왕비 신분으로 승하해 난간석과 문·무인석 등 조형물이 완벽히 갖춰져 있다. 묘좌유향의 정동향으로 능 뒤의 꿈틀대는 입수 용맥은 물론 능 앞을 감아 도는 물길 모두 누가 봐도 길지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언니는 세자빈 신분으로 죽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능이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세자빈으로 죽은 딸의 무덤을 왕릉으로 꾸미는 월권은 당시 한명회로서도 어쩔 수 없는 왕실과 사회의 규범이었던 것이다.

○ `한씨 왕비시대'서 `윤씨 왕비시대'로 교체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대의 역사를 후대의 판단으로 교정하거나 새로운 정의를 내리려 함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이를테면 연산군과 달리 광해군의 폐위가 부당하다 하여 지금에 와 복위시킨들 역사적 정당성과 가치를 누가 인정하겠느냐는 것이다.

 공혜왕후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왕실 내명부의 물갈이로 반전되면서 또 다른 골육상쟁을 불러와 요동치게 된다. 지금까지 청주 한씨가 독점해 오던 ‘한씨 왕비시대’가 끝나고 ‘파평 윤씨 왕비시대’로 교체되면서 조정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만다.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 정현왕후(중종 생모), 장경왕후(인종 생모), 문정왕후(명종 생모)가 내명부를 휘저으며 조선 중기의 역사는 도탄에 빠지고 만다. 이들 모두가 파평 윤씨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