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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 요지에 자리한 선릉의 정현왕후릉. 동원이강릉으로 성종릉의 왼쪽 언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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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왕후릉 뒤의 입수용맥. 간좌곤향의 좌향을 밀어주는 내룡맥이 압권이다.
| 성종이 어렸을 때 일이다.
세조는 아버지(추존 덕종)를 일찍 여읜 손자 혈( ·성종의 아명)이 불쌍해 자을산군으로 봉하고 세 살 위의 형 정( ·월산대군)과 함께 궁궐 안에서 양육하도록 며느리(인수대비)에게 배려했다. 세자로 책봉된 왕자 외에 다른 왕자가 장성해 가례를 올리면 사가를 마련해 나가 살도록 하는 것이 궁중의 법도였다.
날씨가 화창한 어느 봄날, 자을산군은 월산대군을 따라 여러 환관(宦官)들과 더불어 궁내 연못가를 산책하고 있었다. 멀쩡하던 하늘에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폭우가 쏟아졌다. 동시에 천지가 진동하는 뇌성벽력과 함께 벼락이 떨어져 옆에 있던 환관 하나가 즉사했다. 모두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어린 자율산군(성종), 뇌우에도 의연
혼비백산한 환관과 시녀들은 달아났고 월산대군도 넋을 잃었다. 그러나 자을산군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의연하게 서서 적란운(積亂雲)이 걷히고 소나기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세조와 인수대비는 크게 기뻐하면서도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자신이 지은 죄를 자식이 대신 받는 업보라는 것이 과연 인간 세상에 있는 것인가 하고….
이때 영의정 한명회(1415~1487)는 이토록 범상치 않게 성장해 가는 자을산군을 눈여겨 뒀다. 이미 셋째 딸을 해양대군(후일 예종)에게 시집보내 왕실과 혈연의 끈을 옭아매 놓았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지모와 책략에 뛰어난 그였다. 이미 월산대군은 소양공 박중선의 딸(순헌 박씨)과 가례를 올린 뒤여서 11세의 자을산군에게 넷째 딸(12세)을 시집보내니 후일 성종의 원비인 공혜왕후다.
여기서 잠시, 성종 당시 ‘여인의 난’을 열거하면서 월산대군의 처가 얘기를 지나칠 수가 없다. 후일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반정에 큰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는 박원종의 누이가 월산대군의 후실이었는데 절세미인이었다. 월산대군이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20대의 열혈 청년으로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보이는 게 없었다. 미색이 반반하면 여염집 규수를 가릴 것 없이 억지로 끌어들여 정절을 짓밟았고 당숙 제안대군(예종 아들) 집 여종 장녹수와 놀아나며 국고를 탕진해 나라 살림을 위태롭게 했다. 급기야는 큰어머니 되는 박씨를 궁으로 불러들여 겁간(劫姦)하자 박씨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자결하고 말았다. 궁중은 분노했고 백성은 절망했다. 누구보다도 치를 떨며 분기탱천한 박원종이 선봉장이 돼 연산군을 폐위시키니 바로 조선왕조의 첫 반정 사건이다.
13세에 등극한 성종은 참으로 행복했다. 20세가 될 때까지 할머니(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한 덕에 정무에 관한 책임은 자신에게 없었다. 근심이라면 공혜왕후로 책봉한 한씨와의 사이에 소생이 없었다. 몸이 약한 왕비가 시름시름 앓다가 19세로 세상을 뜨니 국모 자리가 비었다. 슬픔에 잠긴 성종을 할머니가 위로하며 숙의(淑儀)였던 후궁 윤씨를 계비로 승격하니 이 여인이 바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다.
궁중의 내명부(內命婦)는 임금의 비빈과 후궁을 포함해 일컫는 명칭으로 빈, 귀인, 소의, 숙의, 소용, 숙용, 소원, 숙원 등의 서열 구분이 엄격했다. 왕비 자리는 마땅히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딸을 간택해 앉혔다. 귀인 이하 후궁들 역시 명문가 출신 규수들로 조정의 높은 벼슬이나 배경 없이는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자리였다.
이들에게는 오직 임금의 ‘잠자리 은총’만이 일생일대의 대원이었고 어쩌다 왕자라도 생산하는 날에는 친정가문의 벼락출세와 부귀는 곧바로 보장됐다.
○ 16남 12녀 탄출, 계비 윤씨 질투심 불타
이 가운데는 일개 말단 궁녀로 입궐했다가 출중한 미색이 임금 눈에 띄어 후궁 자리에 앉는가 하면 비빈의 국모 자리에 있다가도 폐서인이 돼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구중궁궐 내명부 안에서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특히 국모 자리는 아무나 감당 못하는 힘겨운 위치였다. 남편인 임금과 동침한 후궁들을 통솔하며 배다른 자식들을 친자식과 차별해선 안 되는 도인의 자세여야 했다.
성종은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됐고 20세도 안 돼 상처했다. 숙의 윤씨를 계비로 책봉했지만, 대궐 안의 여자는 모두 왕의 여자였다. 젊은 임금이 정치를 잘해 조정은 태평했고 옥사도 별로 없었다. 백성도 왕을 찬탄하며 생업에 충실했다. 그러나 세상이 좀 편안해지고 느긋해지자 기강이 해이해지고 문란해졌다.
성종은 공혜왕후와 계비 윤씨 외에도 열 명의 후궁을 더 두어 16남 12녀를 탄출했다. 증조부인 세종대왕 이후 최대의 왕실 번창으로 조정에서는 잔치가 끊이지 않았다. 후기에는 몰래 궁을 빠져 나와 기방까지 출입하며 스스로 유흥에 빠져들었다. 이럴 때마다 속이 뒤집힌 건 계비 윤씨였다. 독수공방으로 지내는 날이 허다했고 후궁들 몸에선 군(君)과 옹주들이 자꾸 태어났다. 어쩌다 성종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앙칼지게 대들고 호되게 닦달하기까지 했다. 성종은 이런 윤씨가 싫었다.
어느 날 성종이 모후 인수대비 전에 불려 갔다. “주상, 그 용안에 나 있는 손톱자국에 대해 소상히 말씀하시오.” 추상같은 분부였다. 일찍이 청상과부가 돼 자신을 임금 자리에 앉힌 하늘 같은 어머니가 아니던가. 성종이 얼굴을 붉히면서 “어마마마, 별것 아니옵니다. 그저 소자의 불찰로….”
“내 이미 자초지종을 다 알고 묻는 것이오. 주상은 바른대로 답하시오.”
성종은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윤씨가 손톱으로 긁어 낸 상처임을 이실직고했다. 평소 윤씨의 시기 질투를 못마땅해하던 인수대비가 진노했다. 이는 곧 계비 윤씨의 폐비로 이어졌고 폐서인이 돼 퇴출당한 후 사약을 받아 죽고 만다. 옛말에 첩(妾)이 첩 꼴을 못 보고 서방의 계집질엔 돌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했다. 판봉상시사 윤기전의 딸로 숙의에서 계비 자리까지 오른 윤씨는 자신이 후궁(첩) 출신이면서도 첩(후궁) 꼴을 못 봐 자멸의 길을 자초하고 만 여인이다.
○ 정현왕후(중종 생모)릉 용맥·물길 압권
윤씨의 폐비와 함께 인수대비는 숙의로 있던 또 다른 윤씨(우의정 윤호의 딸)를 계비로 삼으니 정현(貞顯)왕후다. 정현왕후는 진성대군(후일 중종)의 생모로 어미 없는 연산군을 친자식처럼 키워 내명부와 조정의 존경을 받았다. 여인의 투기심과 시샘의 종말을 폐비 윤씨를 통해 터득했던 것이다. 정현왕후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성종릉(선릉) 왼쪽 언덕에 예장됐다. 성종릉과 함께 동원이강릉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용맥과 물길이 전혀 다르다.
사람이 남의 불행에 함부로 끼어들 일이 아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내명부의 참극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이 자행됐다. 폐비 윤씨의 복위를 논의할 때 인수대비와 정현왕후는 물론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도 반대하며 거들었다. 이를 뒤늦게 안 연산군이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죽게 하고, 귀인 정씨와 엄씨는 궁중 뜰에서 직접 목을 베어 버렸다. 이복동생인 정씨의 두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도 귀양 보낸 뒤 사약을 내려 목숨을 끊었다. 이것이 단초가 돼 연산군은 재위 11년 9개월 동안 정사는 돌보지 않고 희대의 폭군으로 돌변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