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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2>예종원비 장순왕후 공릉

惟石정순삼 2010. 7. 30. 08:22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12>예종원비 장순왕후 공릉

세자빈 신분으로 승하해 능역 조영물이 초라한 장순왕후의 공릉.

단릉으로 한명회의 셋째 딸이며 예종비가 되기 전인 17세에 요절했다.

 

공릉 정자각 앞의 홍살문.

속세와 능역을 가르는 상징문으로 잡귀의 범접을 막는 역할을 하며
홍전문이라고도 한다.


 세상은 남자가 움직이는데 세상을 움직이는 그 남자는 여자가 움직인다고 했다. 특히 남성 전횡의 시대였던 조선왕조에는 이 말이 더욱 적중했다. 낮은 벼슬아치가 고위직 관료를 직접 만날 수 없을 때 ‘안방마님’이나 ‘그의 여인’을 통해 뜻한 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곤 했던 것이다. 이럴 때마다 ‘베갯잇 송사’라 해 의기 투합하거나 뇌물만 적절히 공여하면 일이 잘 되는 건 맡아 놓은 당상이었다.

 조선왕조 27대왕 519년 역사를 통해 초기에 속하는 단종→ 세조→ 덕종(추존)→ 예종→ 성종→ 연산군 시대의 왕실 여인들만큼 치열하고 처절한 삶도 없었다. 불과 40여 년의 통치 기간에 조선 전사(全史)가 투영될 만큼 온갖 권모와 결탁이 포개져 있기 때문이다. 여섯 명의 임금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왕위에 오르기 전 남편이 죽고 설상가상으로 반정까지 일어나 ‘왕의 여자’들의 한숨과 굴곡진 삶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 4대 독비 인과관계 난마같이 얽혀

 이 모두가 재위 기간이 짧거나 임금이 단명하는 데서 비롯된다. 성종시대 이후는 그때 가서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정순왕후(단종), 정희왕후(세조), 인수대비(덕종), 안순왕후(예종 계비)의 인생 역정을 약술하고자 한다. 왕실의 ‘4대 독비(獨妃)’ 얘기로 모두가 동시대를 살면서 난마같이 얽힌 인과관계가 한맺힌 이슬로 응어리져 있다.

 왕실의 4대 독거왕비가 태어나게 된 배경은 이렇다. 어린 장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숙부 세조는 왕위를 빼앗고 죽여 버려 정순왕후(여산 송씨·1440~1521)를 어린 생과부로 만들었다. 세조는 장남 의경세자(덕종)를 왕위에 앉히려 했으나 20세로 요절하니 인수대비(청주 한씨·1437~1504)가 홀로 됐다.

 세조는 둘째 아들(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당시 최고 권력가였던 한명회의 셋째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는데 그가 바로 추존된 장순왕후(청주 한씨·1445~1461)다. 장순(章順)왕후는 아들 인성대군을 낳았는데 산후병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인 17세 되던 해 모자가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다시 간택한 왕비가 안순왕후(청주 한씨·1445~1498)인데 이번에는 예종이 일찍 죽어 역시 혼자가 됐다.

 부모로서 차마 겪지 못할 참혹한 꼴을 당한 세조마저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재위 13년 3개월 만에 승하하니 정희왕후(1418~1483)도 독거 신세가 됐다. 이 모두가 18년 만에 생긴 왕실 내명부(內命婦)의 변고였다. 이때 왕실의 최고 어른은 당연히 정희왕후였다. 왕실에 과부가 넷이다 보니 네 여인의 감정은 미묘하게 흘렀다.

 이때 정순왕후(단종왕비)는 동대문 성 밖 정업원에서 홀로 연명하며 한많은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인연을 잘못 만나 임금이던 남편을 잃고 친정 가문마저 멸문지화를 당한 판에 무슨 희망이 있었고 낙을 바랐겠는가. 매일 새벽 뒷산 동망봉에 올라 먼저 간 단종을 그리며 통곡하는 게 일과였다. 다만 이 모든 원인을 제공한 시숙부(세조)의 집안 돼 가는 꼴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무섭고도 섬뜩한 일이었다. 생몰연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정순왕후는 82세라는 기록적인 장수를 했다. 조정에서도 후환이 염려스럽긴 했으나 대를 이을 자식도 없고 대항 세력권에서도 벗어나 천수를 누리도록 내버려 뒀다.

 누구보다도 속이 뒤집어진 건 인수대비였다. 친정아버지 한확이 세조 등극에 공이 커 조정에서는 그녀를 무시 못했으나 현실적으로는 남편이 일찍 죽어 사가(私家)에 나가 살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들 둘(월산대군·자을산군)이 있었지만 왕위는 이미 시동생(예종)에게 넘어가 젊은 나이에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한 뒤였다.

 다행스러운 건 조정의 실세 한명회의 넷째 딸(후일 성종원비 공혜왕후·1456~1474)이 둘째 며느리여서 큰 위안이었다. 당대의 최고 권세가 한명회도 셋째 딸이 예종 원비였다가 일찍 죽은 게 한이어서 인수대비와 사위되는 자을산군에 대한 예우와 보살핌이 극진했다. 여기에는 또 다른 태산을 움직이려는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큰 뜻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 인순왕후 위상·영향력 급격히 추락

 반면 안순왕후 처지는 딱했다. 아버지 한백륜이 우의정으로 명문가 청주 한씨 출신이었으나 한명회의 세력을 덮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남편 예종이 장수만 했어도 어린 남매(제안대군·현숙공주)가 있어 앞날이 보장됐으나 즉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뜨니 왕실 내에서의 위상과 영향력은 급격히 추락했다.

 여자로서 더더욱 참기 어려운 건 손위 동서 인수대비의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사가에 있을 때는 자신더러 중전마마라 했는데 자을산군이 왕이 되면서 갑자기 대비마마가 돼 버린 것이다. 자신은 뒷전이고 시어머니 정희왕후와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상전 위(位)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었다. 남편(세조) 덕에 출세한 조정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돈수백배했고 어린 왕의 수렴청정을 하면서도 그녀의 말 한마디는 곧 어명이었다.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한명회의 두 딸을 이미 며느리와 손자 며느리로 맞아들여 권력의 누수는 염려 안 해도 됐다. 외손자가 왕이 될 판인데 딴 맘 먹을 자 그 누구이겠는가.

○ 13세 자을산군 등극 성종시대 열어
 병약했던 예종이 승하하자 정희왕후는 한명회를 불러 상의했다. 종묘사직의 후사를 결정짓는 중대사였다. 이때 인수대비의 장남 월산대군은 16세였으나 소양공 박중선의 딸(순헌 박씨)한테 장가를 가 처가 덕은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여기서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술수가 결탁으로 맞아떨어졌다. 두 사람은 흔들림 없는 왕권 유지를 위해 13세의 자을산군을 그날로 등극시키니 바로 성종이다. 조선왕조를 통해 왕이 승하한 날 차기 왕으로 등극한 건 성종이 처음이다. 인수대비 입장에선 누가 왕이 되더라도 자신의 소생임은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시름을 마다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이가 장순왕후다. 비록 대통을 이어야 한다는 친정아버지 꿈을 못 이뤘지만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4-1에 세자빈의 예로 장사 지냈다. 능호는 공릉(恭陵)으로 홀로 모셔진 단릉(單陵)이며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다수의 석물이 생략됐다.

 후일 친동생이면서 조카 며느리 촌수가 되는 공혜왕후(성종원비)의 순릉과 제21대 영조의 장남 진종(추존)과 효순왕후의 영릉이 조성되면서 공순영릉 또는 파주삼릉으로 불리고 있다. 사적 제205호로 벽제화장터에서 문산 방향으로 가는 도중 오른쪽의 이정표를 유심히 살펴야 바로 찾아갈 수 있다.

 홍살문 앞의 금천교(禁川橋·왕릉과 속계를 가르는 풍수상의 물길)를 지나 능상에 오르니 술좌(戌坐)진향(辰向)의 동남향으로 당대의 국풍(國風)이 잡은 자리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공릉은 장순왕후의 짧은 생애와 함께 별다른 행적이 없어 조선왕릉 40기 중 가장 단순한 능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녀의 요절이 가져다 준 왕실대통의 지각변동은 한 인간으로서의 몫도 무시하지 못 한다는 측면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바가 크다.

<이규원 시인 ‘대한민국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