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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10>추존 덕종대왕과 경릉

惟石정순삼 2010. 7. 30. 08:2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10>추존 덕종대왕과 경릉

남좌여우의 매장 위치가 뒤바뀐 조선 최초의 왕릉 경릉. 

서오릉 내에 있으며 보이는 오른쪽이 추존 덕종이고 왼쪽이 인수대비다.

 

승하 당시 세자 신분이어서 난간석조차 없이 초라한 덕종릉.

인수대비는 왕비여서 모든 석물이 조영돼 있다.


세조의 맏아들 장(暲·1438∼1457)은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착했다. 할아버지(세종대왕)한테 현동(賢同)이라는 아명을 하사받고 일곱 살 때는 정의대부(正義大夫·조정에서 종친에게 내리는 종2품 벼슬)에 제수되면서 도원군(桃源君)으로 책봉됐다. 신중한 성격으로 학문에 몰두해 왕실 어른들은 물론 성균관 스승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들었다. 특히 해서체에 뛰어나 주위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한 가지 걱정이라면 타고난 체질이 허약해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 잔병치레까지 잦은 것이었다.

 도원군 성장기의 나라 안도 태평이었다. 할아버지가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은 편안했고, 큰아버지(문종)는 차기 임금으로 군왕 수업에 열중이었다. 세 살 아래의 사촌동생 홍위(弘暐·단종·1441∼1457)와도 친한 사이였다. 일찌감치 차차기 임금인 세손(世孫)으로 정해져 부럽기는 했지만, 가끔 궁궐에 들어가면 안부도 물으면서 세상 얘기를 나누곤 했다. 다만 큰어머니(현덕왕후)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불쌍하게 생각됐다.

○ 세조 왕위찬탈하며 세자로 책봉

 도원군 나이 13세 때 나라에 큰 변고가 생겼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아버지가 임금이 됐다. 원래 몸이 약했던 큰아버지마저 2년 4개월 만에 돌아가시더니 사촌동생 홍위가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도원군 집에는 한명회·권남·홍윤성·양정 등 많은 사람이 몰려와 밤늦게까지 심각한 논의를 하다가 돌아갔다. 어머니 윤씨(정희왕후)의 입단속과 표정으로 보아 급박한 정국 상황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16세 되던 해에는 나라에 더 큰 변고가 생겼다. 아버지(세조)가 김종서·황보인 등 조정 대신들을 죽이고(계유정난) 병조판서(현 국방부장관)를 겸한 영의정이 된 것이다. 모든 권력은 아버지 휘하로 장악됐다. 2년 뒤인 18세(1455) 때에는 사촌동생(단종)이 임금 자리를 내놓아 마침내 아버지가 왕위에 올랐다. 그해 7월에는 의경(懿敬)세자로 책봉되면서 차기 임금으로 대통을 잇게 됐다.

 그런데 가슴 벅차고 행복해야 할 의경세자의 나날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궁중의 보살핌 속에 엄격히 행해지는 세자 수업이 고역이었다. 잠시 눈만 감으면 노산군으로 강봉돼 영월 청령포로 귀양 간 사촌동생 홍위가 어른거렸다. 때로는 인간으로 차마 상상도 못할 고문 끝에 죽어 간 조정 대신들이 내지르는 고함이 귓전을 맴돌기도 했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건 큰어머니(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자꾸 어딘가를 함께 가자고 앞장서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엔 인자한 모습으로 구름 위를 함께 나는가 하면, 난데없는 낮 꿈엔 소름 끼치는 흉한 몰골로 나타나 “세자 자리를 내놓으라”고도 했다. 이럴 때마다 의경세자는 헛소리를 하며 소스라치게 놀라 깼고 의관은 식은땀에 젖어 쥐어짤 정도였다.

 참다 못한 세자가 부왕 세조에게 상의하니 아버지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어머니 정희왕후도 힘들어했다. 동생 해양대군(예종)도 그러했다. 여동생 의숙공주도 편할 리가 없었다. 온 가족이 혼령에 시달림을 보다 못한 세조가 동구릉에 형님(현릉)과 합장돼 있는 형수 유골만을 파내 냇가에 묻어 버렸다. 그렇다고 세조의 가족이 현덕왕후의 영적인 괴롭힘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 한여름 감기 도져  20세 요절 

마침내 세자는 병이 들었다. 20세 되던 해 7월 한여름에 우연히 걸린 감기가 도져 병세가 심각해졌다. 8월 동궁(東宮·세자가 거처하는 궁궐 내의 집)에서 나와 세조의 옛 집으로 옮기고 어의의 진맥과 탕제로 정양을 받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세조는 영산재(靈山齋·산 사람의 명을 비는 불교의식)에 능한 21명의 승려를 경회루로 불러 지성공양을 드리게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세자는 다음달인 9월 2일 죽고 말았다. 이 같은 의경세자의 짧은 20년 생애는 사실(史實)에 기록된 바다.

 세조와 정희왕후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화사 최경과 안귀생을 불러 죽기 전에 그려 놓은 의경세자 초상화를 보며 하늘을 원망했다. 정무와 저자(시장)를 5일이나 파하고 수라상을 거르면서 30일을 소복으로 지냈다. 그러나 민심은 이와 달랐다. 모두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무고한 신하들을 죽인 업보라고 여겼다.

 왕위에 오르지 못해 임금이 안 된 의경세자가 덕종대왕이 된 까닭은 무엇인가. 왕조시대에는 비록 자신은 즉위를 못하고 죽었으나 아들이 임금이 되면 사후에 추존해 묘호(廟號)를 올리고 종묘에 배향했다. 조선 왕조에는 추존대왕이 모두 넷이 있는데 덕종(제9대 성종의 생부)과 함께 원종(제16대 인조의 생부), 진종(제22대 정조의 계부), 장조(사도세자·제22대 정조의 생부)이다.

 의경세자의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산30-1 서오릉(사적 제198호)에 대군묘 제도인 원(園)으로 조성됐다. 이후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세자빈 소혜왕후와 함께 덕종으로 추존돼 원이 경릉(敬陵)으로 승격(1471)됐다.

 덕종은 소혜왕후 청주 한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뒀다. 이 소혜왕후가 바로 예종→성종→연산군 3대 왕에 걸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인수대비다. 인수(仁粹)는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어머니에게 지어 올린 휘호다. 덕종보다 한 살(1437) 위였으며 경문에 조예가 깊어 범어·한문·국문의 3자 체로 불경을 짓기도 했다.

○ 한 영역에 두 능선 택한 동원이강릉

 인수대비의 친정아버지 좌의정 한확(1403∼1456)은 더욱 범상찮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그의 누이(인수대비 고모)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여비(麗妃)로 간택돼 조선 조정의 ‘명나라 통’으로 양국 간 외교마찰이 있을 때마다 무난히 해결했다. 세조는 이런 한확과 사돈을 맺었던 것이다. 세조가 등극하자 주청사(중국에 보냈던 사신)로 명나라에 가 왕위 찬탈이 아닌 양위임을 명분으로 내세워 윤허를 받고 귀국했다.

 경릉도 한 영역에 두 능선을 택해 각각 안장한 동원이강릉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능 앞의 홍살문을 들어선 참배객들 간 논란이 분분하다. 덕종릉이 오른쪽에 있고 인수대비릉이 왼쪽에 있어서다. 이른바 좌상(左上·남자가 위)우하(右下·여자가 아래)의 배치 위치다. 남좌(男左)여우(女右)라고도 하는 이 문제는 풍수들의 간산 길에서도 논쟁의 불씨가 된다.

 묘지의 방향 설정은 망자(亡者)의 위치에서 판정하는 것이 예법이다. 남자의 왼쪽에 여자가 있는 것이 남좌여우다. 그러나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반대다. 예를 들어 조부모의 산소 앞에 섰을 경우 왼쪽이 할아버지이고 오른쪽이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반대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망자와 산운이 어긋나거나 풍수 물형의 혈(穴)이 겹칠 때는 부우( 右) 또는 부좌( 左 )라고 비석에 표기돼 있어 유심히 살펴야 한다.

 간좌곤향(서남향)의 덕종릉에는 병풍석은 물론 난간석도 없는 세자릉 그대로이나 계좌정향(남에서 서로 15도 기운 남향)의 인수대비릉은 왕릉 규모를 빠짐없이 갖췄다. 인수대비는 왕비의 신분으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덕종릉은 왕으로 추존(追尊)되면서도 왕릉 석물에는 손을 못 댔다.

 인수대비가 내린 사약을 받고 폐비 윤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며 생모 윤씨 묘를 왕릉으로 꾸몄다. 그러나 연산군의 패역으로 폐위되면서 다시 묘로 전락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을 잘 둬야 부모가 대접받는 세상이다. 역사는 이토록 준엄한 것이다.

 <글·사진=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