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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8>단종왕비 정순왕후 사릉

惟石정순삼 2010. 7. 30. 08:14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8>단종왕비 정순왕후 사릉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이 배어있는 사릉.

난간석 하나 없는 장식이 쓸쓸하다. 앞의 석물은 능제를 지내고서 축문을 사르는 곳이다.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망봉.

단종이 승하하고서 정순왕후는 매일 아침 이곳에 올라 동쪽(영월)을 바라보며 소복을 입고 통곡했다.


 절대왕권 시절 왕실의 혼인은 가례(嘉禮)라 해 온 나라가 떠들썩한 행사였다. 특히 왕세자의 가례는 새로 정한 국조오례의에 따라 검소하면서도 엄격하게 치러졌다. 나라의 경사 덕분에 일부 죄인들은 방면돼 고향으로 돌아가고 유배지에서 고생하던 권신(權臣)들도 풀려나 정치 무대에 복귀했다.

 세자빈으로 간택된 명문가 규수는 만백성의 부러움 속에 차기 국모 수업을 철저히 받았다. 그러나 막상 부원군(임금의 사돈)으로 낙점받은 당사자는 기쁨보다 걱정이 태산 같다. “어린 딸이 구중궁궐에 들어가 왕실 법도를 잘 익혀내고 층층시하의 내명부(內命婦, 왕비·후궁·궁녀 등)에서 끝까지 버텨낼 것인가” “대통을 이을 왕자를 건강하게 출산해 왕비로 책봉될 수 있을 것인가.” 대갓집 혼사가 아니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딸 둔 부모의 마음이야 무엇이 다를까 싶다.

 32년 동안 지치(至治)에 가까운 세종대왕의 태평성대가 끝나고 문종→단종→세조로 이어지는 조선 초기의 왕권 교체는 급박하게 전개된다. 불과 3년여(1452∼1455) 만에 3대 왕이 바뀌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무시무시한 공포 무력 정권이 들어섰다. 왕이 된 조카 단종은 12세의 어린이였고 계유정난(1453)을 일으켜 권력을 거머쥔 숙부 수양대군은 42세의 중년이었다.

 ○ 15세에 왕비로 책봉…가족사 불행 예감
 수양은 형인 문종의 국상 중인데도 왕실의 대통을 이어야 한다며 단종의 혼인을 서둘렀다. 수양의 집권에 아무런 공로가 없는 송현수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니 바로 정순(定順)왕후다. 이때 단종은 14세였고 왕비는 15세였다. 이미 조정 대신들과 백성은 송현수 가족사의 불행을 예감하고 있었다.

 정순왕후의 봉왕비(封王妃) 교명(敎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수많은 성씨 가운데서 가리고, 두루 아름다운 덕행을 갖춘 사람을 구한 나머지 그대 송(宋)씨가 성품이 온유하며 그윽하고 아름다운 덕이 드러난다. 진실로 궁중의 정위(正位)에 거하여 마땅하고, 일국의 국모로 임할 만하므로 이제 효령대군을 사신으로 보내 왕비로 삼는 바이다.”

 14세의 신랑과 15세의 신부가 뭘 알았을까. 시집 장가를 가 좋은 것보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나날들이었다. 마침내 믿고 의지하던 황보인·김종서 등 높은 대신들이 대역죄를 범했다 해 죽고 조정은 숙부와 그의 지지자들로 완전히 교체됐다. 임금 자리를 내놓으라기에 얼른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단종은 상왕이 되고 왕비는 의덕(懿德)왕대비가 됐다. 바라지도 않던 높은 자리여서 거부했다.

 성삼문·박팽년 등 뜻 있는 신하들이 억지로 임금이 된 세조를 죽이고 어린 상왕을 다시 임금 자리에 앉히려다 발각돼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예상대로 화는 상왕과 왕대비에게 미쳤다. 모든 것이 살아있는 상왕 때문이라며 노산군과 부인(夫人)으로 강봉시키고 상왕은 머나먼 강원도 땅 영월 청령포로 귀양 보내 생이별을 시켰다. 이런 상황임에도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정순왕후의 비참한 일생은 이때부터 골이 더욱 깊어졌다. 정들자마자 억지로 헤어지게 된 남편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소식은 뒤늦게 귀동냥으로 들었다. 아버지(송현수)도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세상을 떠났다. 딸 낳아 곱게 길러 왕실에 시집 보낸 죄밖에 없는 착한 친정아버지였다. 이때는 정순왕후도 보령 18세가 돼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훤히 알고 있을 때였다.

○ 조정에서 내리는 곡물·옷감 거절
 사람이 생목숨을 끊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더욱 강인해지는 게 인간의 오기다. 더구나 한을 품은 여인의 일생은 섬뜩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후 정순왕후는 7대 왕(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에 걸쳐 64년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왕실과 권력의 부침(浮沈)을 똑똑히 지켜봤다. 해코지를 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마음 졸이는 무서운 일이었다.

 당시 인간 수명으로는 환갑만 넘겨도 장수한다고 할 때다. 정순왕후는 82세(1440∼1521)를 살면서 별의별 꼴을 다 봤다. 남편을 낳고 3일 만에 승하한 시어머니 현덕왕후(문종왕비)가 새로 임금이 된 시숙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한 뒤 왕실에는 큰 변고가 생겼다.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데려가겠다”고 독기를 내뿜고 나서 새로 책봉된 세자 장(暲)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단종과는 사촌지간으로 세 살 위였던 추존 덕종대왕이다.

 꿈에서 현덕왕후가 세조에게 침을 뱉은 자리는 피가 나도록 파고 긁어도 가려워 전의가 약을 지어도 낫지 않았다. 참다 못한 세조가 동구릉에 합장돼 있는 형수 유골만 파내 냇가에 매장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조정에서는 정순왕후를 달래 도성 안에서 살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동대문 밖에 나가 정업원(淨業院·현 동대문구 청룡암 자리)을 지어 평생 소복을 입고 소찬만 먹으며 목숨을 연명했다.

 이른 새벽이면 뒷산 동망봉에 올라 남편이 죽은 영월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면서 통곡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성 밖 백성도 따라 울었고 산천초목도 슬퍼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정순왕후가 오르던 그 자리는 현재 낙산공원으로 단장돼 동망정(東望亭)이란 팔각정자가 먼 하늘만 바라보고 서 있다.

○ 풀지 못한 恨 푸른 솔과 함께 살아있어
 그 후로도 정순왕후는 조정에서 내리는 곡물과 옷감을 거절하고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태 주는 양식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면서 세조가 승하하고 나서 새로 등극한 예종이 1년여 만에 훙서하는 왕실의 이변을 지켜봤다. 세조 등극에 큰 역할을 한 인수대비(덕종왕비)가 손자인 연산군의 머리에 받혀 절명하는 역사의 뒤안길에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이런 여인이 죽어서도 차마 눈 감지 못하고 누워 있는 곳이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65-1번지에 있는 사릉(思陵)이다. 중종 16년(1521) 백발 노파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대군부인의 예를 갖춰 장사를 지냈다. 이때까지 단종의 왕위가 복귀되지 않아 부인의 예우만 해 준 것도 고맙게 여겨야 할 처지였다.

 장지는 시누이 경혜공주(단종의 누나)의 남편인 해주 정씨 정종(鄭悰)의 문중 산 한쪽을 얻었다. “한 움큼의 흙 무덤으로 양주 땅에 계시어 거친 산줄기에 잡초가 무성하니 꼴 베는 촌부도 눈물을 떨어뜨리고 길 가던 행인도 슬퍼 심기를 상했다”고 한다. 숙종 24년(1698)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이란 시호를 받고 함께 복위되지만 풀지 못한 철천지 한은 능역의 푸른 솔과 함께 시퍼렇게 살아있다.

 사릉을 찾은 날엔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칼바람이 귓불을 아리게 했다. 계좌정향으로 정남향에 가까운데 그 당시 명당을 골라 쓰게 했을 리가 없다. 수년 전 사릉에 있는 소나무를 영월 장릉(단종릉)에 옮겨 심으며 한이라도 풀라 했지만 서로 위안이라도 됐을까 싶다. 현재 사릉에는 전통 수목 양묘장이 함께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돼 있다.

 연재가 계속될수록 사람의 나고 죽음은 무엇이고, 권력의 떴다 가라앉음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이규원 시인 `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