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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 구역 내 있으면서 내룡맥이 다르게 조성된 동원이강릉.
왼쪽이 문종대왕이고 오른쪽이 현덕왕후 능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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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대왕 현릉에서 바라본 왕비 현덕왕후 권씨 능.
왕비릉은 현덕왕후가 꿈에서 세조를 저주하고서 파헤쳐지는 등 치욕적인 수난을 당했다 | 문종대왕이 영면해 있는 현릉은 동구릉 안의 태조고황제 건원릉 동쪽에 있다. 두 능침이 가까운 위치에 있으나 능이 조성된 언덕이 다른 것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고 하는데 문종대왕과 현덕왕후의 왕릉이 대표적이다. 능이 두 개이나 별도의 능호를 사용하지 않고 현릉(顯陵)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무섭고도 섬뜩한 역사적 사실이 동행한다.
문종은 태종 14년(1414) 10월 3일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청송 심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 때 세자로 책봉되고 성균관에 입학해 장래의 군왕 수업을 철저히 받으며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성장했다.
세자는 부왕 세종을 닮아 예의범절이나 법도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고 독서가 지나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온종일 한가한 시간이라곤 조금도 없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효성이 지극하여 세종의 탕약과 수라상을 직접 챙기고 밤늦도록 병시중 들다가 ‘물러가라’는 명이 있기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세종은 오히려 이런 세자가 늘 걱정이었다. 할아버지 태조가 어떻게 창업하고, 아버지 태종이 어떻게 지켜낸 왕조인데 저래 가지고 어떻게 종묘 사직을 지켜낼 것인가. 더구나 범같이 혈기왕성하고 야심 찬 둘째 왕자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의 틈바구니에서 과연 제대로 왕업은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
○ 권씨 세자빈 진봉 단종 폐위 단초
가례(嘉禮·왕실의 혼인)를 일찍 올려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으나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첫 번째 세자빈으로 책봉된 김씨가 궁녀들과의 ‘적절치 못한 행실’로 쫓겨나고 두 번째 세자빈 봉씨 역시 ‘온당치 못한 행실’로 폐출되고 만다. 이럴 때마다 세종은 언행이 너무 신중하고 과단성이 없는 데다 남녀 간 음양이치를 소홀히 하는 세자 향(珦)을 크게 염려 했다.
봉씨가 폐위되자 당시 양원에 있던 권씨(증 의정부 좌의정 권전의 딸)가 세자빈으로 진봉(進封)되는데 후일 이것이 단종 폐위의 단초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권씨는 문종과의 사이에 경혜공주를 낳고 25세가 되던 해 단종을 출산하고 산고를 못 이겨 3일 만에 승하했다.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면서 세조는 단종이 정빈 출신의 적손(嫡孫)이 아님을 트집으로 내세웠다.
문종의 세자 시절은 29년 동안이나 지속됐다. 그는 측우기와 해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 제작에 참여할 정도로 천문 율력(律曆) 성운(聲韻)에 정통 박식했고 초서와 예서에도 능했다. 다섯째 왕자인 광평대군이 조졸하자 그의 외아들 영순군을 궁중에 데려다 친자식처럼 보살피는 등 효행우애가 백성들로 하여금 본이 됐다.
○ 몸 상하는 줄 알고도 과중한 업무
즉위 초부터 온갖 질환에 시달려 온 세종은 마침내 즉위 24년 신하들의 빗발치는 반대를 물리치고 모든 정무를 세자에게 맡긴 채 일선에서 물러났다. 세자는 몸이 상하는 줄 알면서도 과중한 업무와 싸워 나갔다. 이런 시국상황을 수양대군(후일 세조)과 한명회·권남 등은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초기 조선 역사에 무서운 피바람이 몰아쳐 올 소름 끼치는 조짐이었다.
1450년 보위에 오른 지 32년 만에 세종이 승하하자 곧바로 세자가 승계하니 제5대 임금 문종이다. 문종은 당시 등창을 앓고 있으면서도 3일 동안 음식을 입에 안 대고 슬퍼함이 너무 지나쳤다고 행장(行狀)에 기록돼 있다. 초하루와 보름 상식 때 애통해하며 3년 상을 마친 것이 초상 때와 같았다 하니 몸이 남아났겠는가. 후일의 사가들은 이것이 죽음을 앞당기고 왕실의 비극으로 이어짐을 왜 몰랐을까 하고 안타까워한다. 염려는 현실로 닥쳐왔다.
문종은 재위 2년 3개월 만에 경복궁 정침에서 승하했다. 뛰어난 치적은 없었으나 선왕의 유업을 계승하며 옛 신하들을 바꾸지 않고 관례대로 따랐다. 군신 간 언론을 넓히고 문을 숭상하되 무를 중히 여기며 궁중의 쓸데없는 비용을 절감하도록 독려했다. 몸을 돌보지 않은 채 국사에 전념하다 돌연히 떠난 정국은 급속히 얼어붙었다. 이때 대통을 이어받은 단종의 나이는 12세였다.
부왕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던 문종이 승하하자 생전의 유언대로 영릉(원래 세종의 영릉은 현재의 헌인릉 오른쪽에 있었음) 오른쪽으로 장지를 정했으나 물이 나고 바위가 있어 취소했다. 서둘러 건원릉 동쪽을 능지로 새로 정해 안장하니 오늘날의 현릉이다. 이에 앞서 권씨는 문종이 등극하기 전 원손(단종)을 출산한 뒤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 경기도 안산에 예장된 후 능호를 소릉(昭陵)이라 했다.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조선 천지에 경천동지할 변고가 생겼다. 숙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무시무시한 공포 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끝내는 어린 임금도 사사당하고 과거 급제를 통해 기용된 유능한 인재들이 무더기로 몰살당했다.
○ 현덕왕후, 꿈에서 세조 괴롭혀
일부함원 오월비상(一婦含怨 五月飛霜)이라고, 한 여인이 한을 품으면 삼복더위의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했다. 세조의 꿈에 형수인 현덕왕후가 나타나 “나도 네 아들을 데려 가야겠다”고 독설을 뿜고서 멀쩡하던 세자(추존 덕종)가 세상을 떠났다. 저주를 퍼부으며 침을 뱉은 얼굴과 온몸은 불치의 피부병이 돼 재위 기간 내내 세조를 괴롭혔다. 현릉의 수난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다 기름을 부은 게 현덕왕후 친정의 단종 복위 운동이다. 역모가 발각되자 세조는 족친을 멸해 버렸고 합장으로 된 현릉을 파헤쳐 형수 유골만 물가에다 매장했다. 현덕왕후의 휘호를 추폐(追廢)하고 종묘에서도 신주를 철거해 버렸다. 그 후 중종 8년(1513) 문종의 신주만 홀로 제사받는 것이 민망하다 하여 다시 복위되고 현릉 동쪽에 천장돼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600년 세월이 흘렀다 해서 그 한이 과연 사그라졌을까 싶다.
현릉은 계좌정향(서쪽으로 15도 기운 남향)으로 태조 건원릉과 같은 좌향이다. 능 뒤 입수 지점에서 병목을 이루는 결인처와 득수·파수가 고루 갖춰졌다. 그러나 현덕왕후 능에 오면 풍수적 판단이 달라진다. 인좌신향(서남향)으로 역마살이 드리우며 좌청룡이 푹 꺼져 기복해 능 앞을 비켜 간다. 바로 저 용맥 끝에 조성된 수릉(추존 문조)에는 기(氣)가 실리나 왕후 능에는 도움이 안 되는 국세다. 문종 왕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있으나 현덕왕후 권씨 능엔 난간석만 있다.
이후 조선왕조의 왕실 계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불행하게도 정비 소생의 적장자(嫡長子)가 대통을 잇지 못한다. 삼봉 정도전이 경복궁 터를 북악산 밑에 잡을 때 무학대사는 이미 태조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낙산으로 이어지는 좌청룡이 약해 장자입국(長子立國)은 어렵다고 봤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동쪽(아들 벼슬을 상징)에 흥인문을 세우면서 산 모양의 갈 지(之)자를 더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게 된 것이다. 인(仁)은 동쪽을 의미하며, 의(義)를 상징하는 돈의문은 서쪽에, 화기를 내포한 예(禮)는 남쪽에 숭례문으로, 지혜를 뜻하는 지(智)의 홍지문은 북에 세웠다. 믿음(信)을 뜻하는 보신각은 사대문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글·사진=이규원 시인·세계종교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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