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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5>성군 세종대왕과 영릉

惟石정순삼 2010. 7. 30. 08:08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 <5>성군 세종대왕과 영릉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청송 심씨를 안장한 조선 최초의 합장릉으로 자좌오향의

천하명당 대길지다. 세종은 하늘이 내린 성군으로 지치시대를 열었다.

                                                                                                

국조오례의에 따라 영릉에는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있다.

합장릉이지만 혼유석은 두 개를 따로 조성했다.


 사람과 사람이 의사를 소통함에는 말과 글이 있다. 글씨를 쓸 줄 모르는 문맹자도 말은 잘할 수 있어 얼마든지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그러나 군 부대에서 온 아들의 편지나 재미있는 이야기 책 등은 읽을 수가 없다.

 우리 역사에 세종대왕이 등극 안 했으면 아직까지도 이두(吏) 문자를 쓰고 있을 것이다. 삼국시대에 발달하기 시작해 통일신라시대에 표기법이 완성된 이두는 중국 한자의 음(音·소리)과 훈(訓·뜻)을 빌려 그 당시 우리말의 문장 구성법에 따라 토를 붙인 불완전 문자다. 이두가 얼마나 어렵고 난해한지는 다음의 예문으로 알 수 있다.

 ‘너 나 없이 다짐하며’를 이두로 표기하면 ‘여오무역고음위며(汝吾無亦 音爲 )’다. 너 여(汝) 나 오(吾) 없을 무(無) 또 역(亦·중국어 발음 ‘이’) 다짐둘 고( ) 소리 음(音·여기서는 소리 값이 없음) 하 위(爲) 하며 며( ) 자의 소리와 뜻 가운데 ‘너 나 없이 다짐하며’만 편의대로 취한 것이다. 온갖 시달림과 부역으로 생존조차 위협받던 무지한 백성들이 이 문자를 어찌 알겠는가. 팔자 좋게 태어난 왕손이나 귀족 중에서도 한자를 통달하다시피 공부해야 사용할 수 있는 극히 제한된 기록수단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 국가의 국운 융창은 그 당시 최고 지도자의 영도력에 의해 좌우된다. 군 통수권자로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전제 군주 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늘은 반만년 역사의 우리나라에 시대 시대마다 위대한 인물들을 탄생케 해 이 강토를 지켜내고 유장(悠長)한 민족사를 이어가도록 배려했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별같이 빛나는 역사적 인물 중 단연 최고의 영웅이 세종대왕이라는 데에는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

○ 어려서부터 성군의 기질

 태조 6년(1397) 4월 10일, 한양 잠저(潛邸)에서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왕자로 태어난 세종의 어휘(御諱·임금의 이름)는 도다. 왕조 개국 후 태어난 정통 왕자였으며 충녕대군 시절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성격은 침잠·과묵하여 말수가 적었다고 기록돼 있다. 모습은 씩씩하고 아름다워 위의(威儀)가 천금 같았고 풍채는 좋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종은 상왕으로 있는 4년 동안에도 병권(兵權)만은 놓지 않고 절대 왕권에 걸림돌이 되는 대신이나 친·인척들은 모조리 제거했다. 세종에게서 성군(聖君)의 기미를 찾은 태종은 왕조의 앞날을 낙관하며 이렇게 자주 말했다.

 “명주(明主·밝고 현명한 임금)를 얻어 국정을 맡기고 보니 걱정 없음이 천하에 나 같은 이가 없을 것이다. 어찌 오직 천하뿐이리오. 고금을 통해서도 또한 나와 같이 걱정 없는 이가 없으리라.”

 세종은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년 54세로 붕어(崩御)할 때까지 32년 동안 보위에 있었다. 그의 재위 시절은 수구세력인 개국공신들이 거의 세상을 떠난 뒤여서 과거를 통해 발굴된 신진 두뇌들이 마음껏 국정에 참여한 시기다. 집현전을 통해서는 평생 학문에만 전념토록 뒷받침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인 훈민정음 창제라는 역사적 대업을 이뤄 놓는다.

 세종이 치세하는 동안 이미 나라 안팎에서는 동방의 요순(堯舜·중국에서 가장 훌륭한 황제) 시대가 도래했다며 모두가 기뻐했다. 관리는 그 직분에 충실했고 백성은 그 본업에 편안했으며 조정은 부조리가 없이 맑고 깨끗하게 잘 다스려졌다. 정치·경제·국방·사회·과학·문화·농업·의학·음악 등 세종의 통치가 골고루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정치 탄압이나 징계도 거의 사라져 공직자는 국가를 위해 헌신했고 양민들은 생업에 충실했다. 바야흐로 태평성대였다.

 세종의 업적은 필설로 형언할 수가 없다. 국가의 오례(吉·嘉·賓·軍·凶禮)와 서민의 사례(冠·婚·喪·祭禮)를 새로 정립해 간소화했고, 농사직설·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의방유취 등과 법률·역사·유교·문학·어학·천문·지리·의학·농업기술에 관한 수많은 서적을 발간했다.

 또 성곽 수축과 전함 수리로 국방을 튼튼히 했고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 4군과 6진을 설치해 오늘날의 국경으로 확정짓는 한편, 일본 대마도도 정벌해 항복받았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와 혼천의 해시계·물시계 등을 제작하고 박연으로 하여금 아악을 정리케 하는 한편 세금을 공평하게 했으며 노비들에 대한 사형도 금하도록 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논리적 체계를 갖춘 훈민정음을 손수 창제해 반포(1446년)할 때는 상국인 명(明)이 반역으로 다스리려 했지만 세종은 굴하지 않았다. 최만리 등 신하들의 반대와 상소가 빗발쳤으나 전혀 동요됨이 없었다. 문자의 독립은 곧 중국으로부터의 문화적 자주 독립이었고 종묘(나라)와 사직(백성)이 천년만년을 누리는 탄탄대로였기 때문이다.

 세종은 중년 들어 소갈증(당뇨)으로 고생했다. 소헌왕후 청송 심씨와의 사이에서 8대군 2공주를 비롯해 후궁과 궁인들에게서 12군 2옹주를 뒀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례없는 왕실의 번창이었다. 말년 들어 건강이 악화되자 세종 27년(1445) 세자 문종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치 일선에서 거의 물러났다. 1450년 2월 17일, 아끼던 막내왕자 영응대군 사저에서 세종이 승하하자 만조백관 신하와 백성들은 물론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세종은 4년 앞서 승하한 소헌왕후를 부왕(태종)이 잠든 헌릉(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쪽에 안장하고 훗날 자신도 묻히려 했다. 승하 후 국풍(國風·왕릉 터를 잡는 풍수)들이 물이 나는 흉지라고 만류했으나 세종의 유명(遺命)이어서 하는 수 없이 합장으로 장사 지냈다.

○ 국조오례의 따른 조선 첫 왕릉

 세월이 흘러 정변과 참극이 수습된 예종 1년(1469) 마침내 영릉은 현재의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번지로 천장된다. 국조오례의에 따른 조선 최초의 왕릉으로 병풍석을 없애고 난간석만 세웠으며 석물들도 단출하다. 합장릉으로 혼유석은 왕과 왕비를 따로 배치했다.

 영릉에 와서는 풍수를 운위함이 외람된 천하제일 명당이다. 원래 이곳은 세조 때 대제학을 지낸 광주 이씨 이계전과 영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문중 묘지였다.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맏아들 이극배를 예종이 불러 자리 양보를 청하니 가족들과 상의해 응해 줬다. 당시 이인손의 묘를 파묘하니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높이 오르거든 연줄을 끊고 그 떨어지는 자리에 묘를 모셔라”는 글귀가 나왔다. 그대로 따르니 연은 서쪽 십리 밖에 떨어졌고 이장한 후에도 광주 이씨 문중은 번창했다.

 북성산을 용틀임하며 엎치락뒤치락 기복(起伏)한 내룡맥이 우렁차고 북현무·남주작·좌청룡·우백호·안산·조산 모두의 자리매김이 인위적으로 배치한다 해도 불가능한 천혜의 명당에 자좌오향의 정남향이다. 자(子·북)좌 오(午·남)향은 3대를 적선해도 차지하기 힘들다는 대길(大吉) 터다.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 해 세종대왕을 이곳에 모신 이후 조선왕조 운세가 100여 년이나 연장됐다고 한다.

 <글·사진=이규원 시인·세계종교신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