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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불교 양식으로 조성된 능 앞의 장명등. 태종과의 불화로 수차례 천장돼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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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계비 신덕고황후의 정릉 정(丁)자각.
능 기신제를 올리는 곳으로 매년 9월 왕실 전통예법으로 봉행된다. |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 인물들의 묘 앞에 설 때마다 별의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임금이 묻힌 왕릉에서부터 영의정 판서 등을 지낸 고관대작, 풍전등화 같은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장군, 간교한 세 치 혀를 잘못 놀려 무고한 인재들을 죽게 한 희대의 간신, 국권을 넘겨주고 당대의 일신 영달에 눈멀었던 매국노…. 심지어는 일생을 종 노릇하다 섬기던 상전 앞에 묻힌 노비와 살아생전 타고 다니던 말과 소 무덤도 있다.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산87-16번지. 북악터널을 지나 정릉삼거리에서 우회전하고 아리랑 고개로 진입하면 바로 ‘정릉입구’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좌우의 상점들과 아파트의 좁은 길을 가다 보면 막다른 길목에 이르는데 이곳이 세계문화유산 정릉(貞陵)이다. 29만9574㎡(90,621평)의 사을한(沙乙閑) 산록에 단릉(單陵)으로 조성된 이 능은 태조 이성계가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던 계비 강(康)씨가 영면해 있는 곳으로 사적 제208호로 지정돼 있다.
정릉을 다녀오면서 북한 개성시 상도면 풍하리에 있는 제릉(齊陵)을 지나칠 수가 없다. 태조의 원비 신의고 황후 안변 한씨 능으로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이다. 원비 한씨(1337~1391)는 함경도 영흥 출생으로 태조가 벼슬하기 전 시집와 방우ㆍ방과(정종)ㆍ방의ㆍ방간ㆍ방원(태종)ㆍ방연 여섯 왕자와 경신ㆍ경선 공주를 낳았다. 태조보다 두 살 아래로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1391년 9월 23일 55세로 승하했다.
계비 신덕고황후 신천(또는 곡산) 강씨는 황해도 출신으로 당시 권문세가였던 판삼사사 상산 부원군 강윤성의 딸이다.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태조의 등극 거사에 직접 참여했고 조선 개국 후에도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왕자 방번ㆍ방석(초봉세자)과 경순 공주를 뒀으나 원비의 다섯째 왕자 방원(정안대군)과의 정적관계로 후사마저 끊기게 된다. 개국 초 조선 천지를 뒤흔든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여기서 계비 강씨의 생몰연대에 대해 새롭게 밝혀 둘 것이 있다. 지금까지 다수의 역사기록에 그의 출생 연도가 미상으로 알려져 왔으나 그는 고려 공민왕 4년인 1356년(병신) 6월 14일생이었다. 태조보다 21세 연하로 1396년 8월 13일 41세를 일기로 갑자기 승하했다. 이 사실들은 전주이씨 왕실계보를 기록한 선원 보감 등에 밝혀져 있다.
○ 계비 돌연사 후 자식·측근 몰사
개국 초 조선왕실의 권력 구조는 난마같이 얽혔다. 원비 한씨의 장성한 여섯 왕자가 있었지만 계비는 자신의 소생으로 왕실 대통을 이으려 했다. 이에 동조한 것이 신권주의(臣權主義ㆍ지금의 내각책임제와 유사)를 부르짖던 개국공신 정도전 ·남은 등이었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건국하는 데 목숨을 걸었던 정안대군이 크게 반발했고 왕위 계승에 은근히 뜻을 뒀던 넷째 왕자 방간도 술렁였다. 끝내 태조가 11세의 어린 방석(의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안대군은 속이 뒤집혔다.
이런 판국에 계비가 돌연사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야 사후 뒷일을 알 바 아니겠지만 이후 자신의 소생은 물론 자신을 따르던 아까운 인재들도 몰살당했다. 뒤늦게 안 태조가 땅을 쳤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 계비를 경복궁에서 내다보이는 곳(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장사 지내고 정릉이라 능호를 내렸다. 오늘날 중구 정동의 유래가 여기서 비롯됐다.
자신도 죽으면 함께 묻히려 했으나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릉은 왕릉치고는 초라한 무덤이다. 능을 감싸는 병풍석과 난관석도 없고 석물들도 초라하다. 태종으로 등극한 정안대군이 정릉을 여러 차례 이장하면서 정자각을 헐어버렸다.
석물들은 실어다 광교 돌다리로 놓아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이즈음 아무렇게나 옮겨 쓴 자리가 현재의 정릉이니 오죽했겠는가. 풍수에 능한 태종이 미워하는 계비 묘를 명당에 잡을 지관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현종 8년(1669년) 우암 송시열의 상소로 종묘에 배향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정릉은 촌부의 무덤만도 못한 잊힌 폐묘였다.
왕실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호(號)를 내렸다. 묘호(廟號)는 임금이 승하하고 조정 대신들이 지어 바친 것으로 태조ㆍ세종ㆍ영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왕 자신들도 살아서는 몰랐던 것이다. 이와 함께 존호(尊號)는 임금의 덕을 기려 사후에 지어 올린 것으로 왕비는 휘호(徽號)라 했으며 종묘(宗廟)에 모셔진 신주에 새겨져 있다. 정릉ㆍ태릉ㆍ홍릉 등은 능호(號)라 부른다. 이와는 달리 시호(諡號)는 임금이 공을 세운 신하한테 내리는 칭호로 충무공ㆍ문정공 등이며 문중의 영광이었다.
○ 좌청룡 우백호·좌수우도 국세
능상에 올라 나경으로 좌향을 재 보니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경좌갑향(庚坐甲向)이다. 나경은 24방위로 나뉘어 있으며 1방위가 15도씩으로 360도 원을 이루는 풍수 전문가의 나침반이다. 정릉은 좌청룡이 우백호를 감싸안으며 좌측에서 물이 내려와 우측으로 흘러가는 좌수우도(左水右倒)의 국세다. 산 정기를 능으로 밀어 주는 입수(入首) 용맥이 갈라져 능 앞의 바람을 막아 주는 안산(案山)이 형성되지 못했다.
좌청룡이 내려와 작국(作局)한 금대국세(金帶局勢)다. 풍수에서 좌청룡은 남자와 벼슬을 의미하고 우백호는 여자와 재물을 상징한다.
태조가 강씨 부인을 만나던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호랑이 사냥을 나섰던 태조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물 길러 나온 처녀가 있어 물 한 바가지를 청했다. 버들잎을 띄워 건네 주는 물을 후후 불며 천천히 마신 뒤 연유를 물으니 “급히 물 마시다 탈이 나실까 염려돼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 처녀가 바로 계비 강씨다.
신덕황후라는 휘호를 되찾아 종묘에 배향되던 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내렸는데 이때의 비를 원을 씻어 주는 비라 해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고 한다. 신덕고황후는 후일 고종황제가 추존해 올린 호다. 정릉 기신제향(忌辰祭享)은 세종대왕의 다섯째 왕자인 광평대군파 후손들이 매년 9월 23일 올리고 있다.
<이규원 시인·세계종교신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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