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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77호로 지정된 종로 사직단.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 제사 올리는
제단으로 종묘와 함께 국가의 상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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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임금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가 73년 만의 폭설로 눈에 덮였다.
국보 제227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 국방일보가 ‘능에서 만난 조선임금’을 연재합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지정한 조선왕릉 40기는 조선시대 유교사상과 사후세계 및 조형예술은 물론 자연경관을 활용한 풍수사상까지 결집한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집필을 맡은 이규원 씨는 세계일보 문화부장 재직 당시 제27회 한국기자상과 제34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으며 풍수에도 조예가 깊어 최근 저서 ‘대한민국 명당’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애독을 부탁합니다. 편집자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조선왕릉 40기를 돌아보며 깜짝 놀랐다. 어떻게 500년이 넘은 왕조의 무덤이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모두 남아있단 말인가. 그들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제출한 조선왕릉에 대한 평가결과 보고서를 면밀히 검토했다.
2009년 6월 26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이 신청한 ‘조선왕릉군(群)’을 만장일치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유네스코는 1972년 총회에서 채택한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에 관한 협약’에 따라 매년 6월 정기총회를 열어 세계문화유산을 지정하고 있다. 결정에 앞서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자연보호연맹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전문가를 파견해 현지조사를 시행한다.
태조 이성계가 왕조를 창업(1392)한 이래 조선은 순종 4년(1910) 경술국치로 멸망할 때까지 27대왕 519년 동안 이 땅을 다스려 왔다. 한 성씨가 단일왕조로 대를 이어 500년 넘게 나라를 통치한 예는 세계 역사상 조선왕조가 유일하다. 천 년 사직의 신라는 박ㆍ석ㆍ김씨가 번갈아 왕위를 이어 왔고 고려는 34대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망하지 않는 왕조가 없었고 죽지 않는 사람 또한 없다.
조형적 예술가치 내포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영혼, 즉 정신이 빠져나간 체백을 수습하는 장묘문화는 세계 각국의 민족과 지역의 기후적 특성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이와 같은 전통과 풍습은 예나 지금이나 그 민족, 혹은 사회에 있어서 문화의 척도로 간주하곤 했다. 그중에서도 왕릉은 장묘문화의 꽃이며 뛰어난 조형적 예술가치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과 사후 세계관까지 내포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선뜻 내키지 않으면서도, 또 들으면 들을수록 무궁무진하고 흥미진진한 게 무덤에 관한 얘기다. 거기에다 땅의 이치인 풍수지리까지 가미되면 바야흐로 점입가경에 이르고 만다. 산 능선을 뒤덮은 도처의 공원묘지마다 기막힌 곡절과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 하물며 한 시대를 통치했던 임금의 능묘야말로 일러 무엇 하겠는가.
이제부터 국방일보 독자 여러분은 필자와 함께 600여 년 전의 과거로 역사기행을 떠난다. 총 42기의 조선왕릉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齊陵ㆍ태조의 원비 신의고황후 능)과 후릉(厚陵ㆍ제2대 정종대왕과 정안왕후의 능)을 뺀 26명의 왕과 왕비 및 사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 40기를 만나는 것이다.
옛날의 왕들은 명령만 내리면 누구나 조아리고 들어 주어 편하고 좋았을 것 같았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견딜 수 없는 모함과 죽음의 위기 순간을 수없이 넘어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등극했으나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야 했고 심지어는 폐위당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지에서 분사(憤死)하기도 했다.
왕과 왕비들은 죽어서도 편치가 않았다. 권력 다툼에서 패한 어린 왕(단종)의 시신은 영월 동강 물 위에 둥둥 떠다녀야 했고, 왕위찬탈을 꿈에서 나무란 왕비(현덕왕후)의 무덤은 파헤쳐져 살아서보다 더 큰 능욕을 당하기도 했다.
재위시절 광란과 폭정으로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 주(主)로 강등돼 능이 아닌 묘가 돼 역사적 통한을 품는 왕(연산군ㆍ광해군)들도 있다. 이래서 ‘능에서 만난 조선임금’은 아직도 못다 한 말들이 남아 있다.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처신이 있기 마련이다. 사회를 이끄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물일수록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타의 본이 되거나 표적이 되기도 한다. 하물며 나라를 영위하는 군왕의 자리에서야 말할 나위가 없다. 거기에는 반드시 당사자 삶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후일의 역사적 평가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한 국가를 운용함에는 언제나 임금과 신하의 동행이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신념과 절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때로는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자진해 그 길을 택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일신 영달과 자리 보전을 위해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간신 모리배도 있어 왔다. 이 같은 역사적 후환은 모조리 후손들 몫으로 넘겨져 ‘역사연좌’의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역사적 화두 성찰
그러나 역사는 따뜻한 눈으로 살펴야 한다는 시각이다. 이제 와서 “삼국통일을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했더라면…”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고 요동정벌을 밀고 나갔더라면…”식의 비탄조나 안타까움은 역사의 성숙을 지연시킬 따름이다. 역사를 통찰함에 지나친 가정이나 좌절은 미래에 대한 오판이나 오류로도 이어질 수 있음을 염려해서다.
연재에 임하면서는 조선왕조실록과 완산실록 바탕 위에 정사를 중심으로 집필할 생각이다. 조선조 각 시대상을 심도 깊게 구성한 대하소설들도 인용해 쉽게 풀어내는 왕들의 역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왕이 곧 국가였던 전제군주 시대에 그들이 판단한 정치적 행위가 오늘날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찾아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역사적 화두는 무엇인가도 짚어 보겠다.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으로 축약되는 왕정시대의 묘제가 풍수와 결코 무관치 않았음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임금의 왕릉이라고 해서 무조건 천하제일 명당일 거라는 선입견은 큰 오산이다. 패주(敗主)의 무덤을 명당에 썼을 리 없을 테고, 간악한 일제가 망국의 황제를 후손이 번성하는 명당자리에 내줬을 리 만무하다. 이 같은 풍수원리를 왕의 일생과 더불어 생생히 되살려 낼 것이다. 저명한 명풍수와 동행하면서 풍수적 물형을 명쾌하게 풀어내고 생생한 현장사진으로 독자들과 만날 것이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은 인류 전체의 자연유산으로 국제사회의 감시와 보호를 받는다.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 인류 공통의 문화가 인증되는 것이므로 국가적 브랜드 가치도 높아지게 된다. 현재 세계 145개국 878건이 지정돼 있으며 이 중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은 8건이다. 오는 6월의 제34차 총회서 또 다른 세계유산의 지정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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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원 시인·세계종교신문 주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