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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6>폐주 광해군 묘<上>

惟石정순삼 2010. 7. 30. 08:39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6>폐주 광해군 묘<上>

폐주 광해군(왼쪽)과 부인 문화 유씨의 묘.

실정과 치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유택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도로변에 서 있는 광해군 묘의 안내표지. 생모 공빈 김씨 묘 건너편에 있다.

 


○ 철조망 아래 초라한 비공개 묘

 역사는 정녕 승자만의 기록이어야 하는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 59번지에는 사적 제363호로 지정된 초라한 무덤이 있다. 조선 제15대 임금으로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폐주 광해군과 부인 유씨의 쌍분이다. 영락교회 공원묘지 내 비탈진 한 구석의 산기슭에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비공개 묘다.

 오가는 길손들이 “저게 광해군 묘다”라고 손가락질하며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들어가 봤자 1만7000여 평 묘역의 경계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자칫하면 봉분 앞 급한 낭떠러지에 나뒹굴기 십상이다. 석물조차 보잘것없다. 아무리 패자의 무덤이라지만 왕위에 15년이나 있으면서 일국을 통치했던 임금 유택으로 보기엔 너무 처참하다. 불현듯 살아서의 일신영달과 죽어서의 사후평가가 엇갈리며 역사의 명암이 교차한다.

 광해군(光海君·1575~1641)은 제10대 연산군과 함께 신하들의 쿠데타로 폐주(廢主)된 두 번째 조선 임금이다. 일찍이 왕조사를 통해 당대의 정치적 야심이나 모략으로 폐위된 왕과 왕비는 여럿 있다. 신덕고황후(태조 계비), 단종, 정순왕후(단종 왕비), 단경왕후(중종 원비) 등이다.

 그러나 비록 수백 년 뒤의 일이긴 하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대신들 간의 논란 끝에 복위되거나 추숭(追崇)돼 명예를 회복했다. 때로는 너그럽기도 한 역사의 지평이련만 유독 연산군과 광해군에게만은 관용을 허락지 않아 영원한 폐주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후일의 사가들이 자의로 재평가해 임금으로 추존시킬 일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사육신 중 한 명을 빼고 새로 교체해 사학계가 들끓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광해군은 조선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치열한 당쟁구도에 희생된 대표적 인물이다. 서자로 왕위에 오른 부왕(선조)은 서자로 출생한 광해군을 왕자 대우를 안 했고, 오직 원비한테 태어나는 적통(嫡統) 대군만을 기다렸다. 선조는 보령 40이 넘고 광해군 나이가 18세가 되도록 다음 왕위에 오를 세자도 책봉하지 않고 태평했다.

 한 살 위의 동복형 임해군(1574~1609)이 있었지만 성질이 포악한데다 주벽까지 심해 걸핏하면 상민을 구타하고 재물까지 약탈했다. 13명의 서자 중 가장 재기 있고 눈에 띄는 게 광해군이었다. 인명재천이라 해 인간의 생사 여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법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가 급서라도 하는 날이면 왕위 계승을 둘러싼 서자 간 골육상쟁으로 피바람이 불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 해(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준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조정은 보름 만에 서울을 함락당하고 선조는 평양으로 몽진(蒙塵)했다. 위급상황에서 선조는 대신들의 청을 뿌리칠 수가 없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은 선조가 맡긴 분조(分朝) 임무를 기대 이상으로 잘해내 조정은 물론 백성들로부터 큰 신망을 얻었다. 1597년의 정유재란까지 7년 전쟁은 끝이 났으나 전쟁의 후유증은 걷잡을 수 없었다. 전시에 다급한 나머지 군량미를 조달하거나 의병에 참여한 하층민까지 공명첩(空名帖)이나 실제 관직을 줘 양반 신분으로 격상시켰다.

○ 신하 쿠데타로 폐주된 조선의 두 번째 임금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반상계급의 신분 타파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갓끈 맬 줄도 모르는 급조 양반이 도처에 즐비했다. 조정은 국방대책에 골몰하기 시작했고 명나라 덕에 나라를 건진 선조의 사대(事大)공경은 목불인견이었다. 선조는 궁중에 진미가 있으면 “황제에게 드리려 하나 어찌할 수가 없다”고 탄식하며 조아렸다. 광해군은 이런 나라 현실을 낱낱이 목도하며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명에 대한 적개심과 지나친 명국의 간섭을 골수에 각인했다.

 선조는 대군 왕통에 대한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계비 인목왕후 김씨를 새로 맞아 드디어 영창대군을 낳았다. 조정은 또다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이이첨·허균)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소북파(유영경·남이공)로 갈려 목숨 건 싸움을 시작했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천년 묵은 고목도 잠시 자세를 낮춘다 했다. 광해군은 자신이 처한 입지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섣불리 나섰다간 세자는커녕 목이 달아날 판이다. 이 박빙의 정국에서 선조가 갑자기 승하한 것이다. 선조는 눈을 감으며 광해군에게 전위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영의정 유영경이 집에 감춰 버렸다. 유영경은 인목왕후를 통해 두 살된 영창대군을 등극시키려 했으나 인목왕후가 현실성이 없다고 해 언문교지로 광해군을 보위에 앉힌 것이다. 이것이 광해군을 폭군으로 내몰게 된 역사적 단초인 것이다.

 이후 왕실과 조정에 불어닥친 피바람은 사초(史草)에 기록된 것 이상이다. 여기에 간신 모리배들의 협잡과 권력욕까지 가세되면서 중기 조선은 인간 도륙장의 슬픔 속에 함몰되고 만다. 이른바 살제폐모(殺弟廢母)로 대표되는 당시의 인간사냥은 광해군 재위 15년 동안 대북파의 권력 독점으로 영일 없이 자행됐다. 악의 세력이라고 쉽게 망하지는 않지만 무고한 인명 살상에는 민심이 요동치는 법이다.

○ 재위 15년 인조반정으로 유배

 34세로 등극한 새 임금 광해군은 실정도 많지만 치적도 만만치 않다. 그는 임진왜란이란 사상 초유의 국란을 겪으면서 산전수전을 몸으로 익힌 능수능란한 중년 임금이었다. 18세 세자책봉 이후 34세로 보위에 오른 뒤 15년을 용상에 있다가 조카(인조)한테 쫓겨났다. 강화·태안·제주도로 유배지를 전전하면서 구차한 목숨 이어온 지 18년 만에 67세로 눈을 감았다. 실정과 치적의 대등한 평가 속에 사가들이 아쉬워하는 광해군의 행장은 다음호에서 다룰 예정이다.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연명하는 동안 모든 것을 잃었다. 15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오직 정비 문화 유씨(문양부원군 유자신 딸)에게서만 3남 1녀를 얻었다. 세자로 책봉된 둘째 아들이 강화 유배지에서 땅굴을 파고 도망치려다 잡혀 26세로 사사당했다. 충격받은 폐세자빈 박씨가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곧이어 폐비 문화 유씨도 자진했다.

 이런 절망적 극한상황 속에서도 광해군은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전해지는 복위운동 소식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제주 유배지에서 폐주를 감시하는 별장이 윗방을 차지하고 아랫방으로 내몰아도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는 ‘영감’이라 부르며 빤히 쳐다봐도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않았고 이럴 때마다 광해군은 속으로 절치부심했다.

 “네 이놈, 세월이 아무리 뒤집어졌기로서니 어찌 감히 인군에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복위되는 날엔 네 놈의 삼족을 멸해 버리고 말 것이로다.”

 그러나 광해군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공빈 김씨) 묘가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산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죽은 사람 소원을 못 들어 주겠는가. 조정에서는 그의 주검을 제주도에서 옮겨와 동남향(해좌사향)의 이곳에 매장했다. 용맥은커녕 경사가 급한 언덕배기다. 멀쩡한 가문도 이런 곳에 묘를 쓰면 손이 끊어지는 절손지지(絶孫之地)다. 혼령이라도 굽어 보고 있다면 얼마나 애통할까 싶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