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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8> 추존 원종대왕과 장릉

惟石정순삼 2010. 7. 30. 08:41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28> 추존 원종대왕과 장릉

천신만고 끝에 왕으로 추존된 원종대왕의 김포 장릉(章陵).

장남 능양군이 인조반정으로 등극하면서 원(園)이 능으로 추봉됐다.

 

능 앞 사초지에 있는 옥새석. 능침 뒤의 어병산과 함께 명당길지임을 암시하고 있다.

 


 절대 왕권시대 왕자나 왕실의 지친(至親) 신분으로 살아가기란 참으로 험난한 일이었다. 왕보다 똑똑하고 잘났다는 이유로 사약이 내려지는가 하면 집터나 묏터가 풍수적으로 좋기만 해도 대역죄로 몰려 세상을 떠나야 했다. 조선 중기 이후 더욱 노골화된 지친 간의 골육상잔은 신권에 의해 왕권이 흔들릴 때마다 극에 달했다.

 때로는 대신들 간 권력 장악 수단으로도 악용돼 걸출한 왕손들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선 풍전등화와도 같았다. 왕권에 위협이 되고 도전이라도 한다 싶으면 가차없이 처단했다. 이 싸움에는 형제 간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부·부자·모자 지간에도 용서가 되지 않았다.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는 것이어서 절대 권력을 둘러 싼 목숨 건 암투는 동서고금이 다를 바 없었다.

 선조의 서자로 차남 자리에서 등극한 광해군은 늘 열등감에 지쳐 있었다. 당시의 엄격한 신분사회가 측실(첩)이 낳은 서얼 출신들은 벼슬길은커녕 사람 취급조차 안 했기 때문이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출중한 문중에서 태어나 과거급제로 장상 자리에 오른 대신들마저 임금인 광해군을 내려다봤다.

○  대북파에 조정 맡기고 수수방관

 이런 사면초가의 외로운 군왕에게 힘을 실어 주며 수족이 돼 주는 세력(대북파)이 있었으니 얼마나 감지덕지했겠는가. 광해군은 폐위돼 쫓겨날 때까지 대북파에 조정을 내맡긴 채 온갖 국정 농단을 수수방관했다. 이들은 나라 위해 큰일을 하겠다고 출사한 대소 신료들을 노선이 다르다는 명분으로 어명을 빙자해 단박에 참수하거나 사약을 내렸다.

 끝날 줄 모르는 대북파의 인면수심은 왕실에까지 미쳐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을 유배시켜 죽이고 선조의 적실왕자 영창대군마저 방안에 가둬놓고 불을 때 증살시켰다. 이때 영창대군 나이 겨우 아홉 살이었다. 백성들은 슬피 울었고 천인이 공노했다. 후학들은 이와 같은 패륜무도와 강상(綱常) 훼손이 광해군의 치적을 덮고도 남는다고 개탄한다.

 이때 서울 장안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정원군(定遠君·1580∼1619)이 살고 있는 새문동 집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것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고 이 같은 입소문은 전국 풍수대가들을 통해 삽시간에 퍼졌다. 광해군은 오금이 저렸고 대북파는 사지가 오그라들었다. 이미 광해군은 둘째 왕자를 세자로 책봉해 놓았지만 정원군의 세력이 확대되면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시국상황이었다.

 광해군보다 다섯 살 아래였던 정원군은 선조의 열세 명 서자 중에서도 각별한 왕자였다. 생모 인빈 김씨가 선조의 총애를 받아 의안군·신성군·정원군·의창군 네 왕자를 낳았는데 이 중 셋째였다. 처음부터 선조는 신성군을 아껴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임진왜란 때 병사하고 말았다. 당시 정원군은 좌찬성 구사맹(능성 구씨) 딸과 혼인해 능양군·능원군·능창군 세 아들을 뒀는데 선조는 능창군을 신성군한테 입양시켜 대를 잇도록 했다.

○ 능창군 17세 나이에 목매 자살

 이것이 재앙이었다. 소싯적부터 신성군을 의식해 왔던 광해군이 그의 양자로 간 능창군을 곱게 봐 줄 리가 없었다. 거기에다 능창군은 어릴 적부터 기상이 늠름하고 무예까지 뛰어난 호쾌남아로 성장해 주변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더구나 그가 태어난 집에 왕기(王氣)까지 서렸다는 것 아닌가.

 이번에는 대북파 중 소명국이 들고 나섰다. 신경희를 시켜 옥사를 일으킨 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한 것이다. 능창군은 즉시 체포돼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됐고 시시각각으로 죽음이 압박해 오자 목을 매 자결해 버렸다. 장가도 못 간 17세 나이였다. 광해군은 능창군 집을 빼앗아 경덕궁을 짓고 아버지 정원군마저 쫓아냈다.

 사람이 흉중의 화를 다스리지 못하면 죽을 병이 찾아든다고 했다. 천지신명을 원망하며 앙천통곡하고 끼니조차 거르던 정원군이 마침내 중병에 들었다. 생때같은 자식을 가슴에 묻었으니 그 한이 오죽했으랴. 그 후 정원군의 병세는 날로 악화돼 4년 동안 바깥 출입을 못하고 부인 구씨(1578∼1626)가 대소변을 받아냈다. 광해군 11년(1619) 천추의 한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뜨니 그의 나이 40세였다.

 광해군은 정원군의 부고가 전해지자 사람을 보내 장사 일정을 재촉하고 조문객들을 감시했다. 생모 인빈 김씨가 예장된 풍양의 묏자리 옆이 명당이어서 묻히려 했으나 광해군과 대북파의 결사반대로 무산됐다. 결국 양주군 군장리 동록 계운궁 남쪽에 서남향(간좌곤향)으로 장사 지낸 뒤 흥경원(興慶園)으로 이름 지었다.

 그러나 구중궁궐 처마 끝에 먹장구름이 낀 지는 이미 오래였다. 정원군의 큰아들 능양군이 두 눈을 부릅뜨고 동생과 아버지 죽음에 치를 떨고 있었다. 또한 당시 조정은 광해군의 명과 후금(후일 청나라) 간 등거리 외교정책에 두 편으로 양분돼 있었다. 임진왜란 파병 은공과 역대 군신 의리 명분을 내세운 친명파와 신흥세력 후금을 무시하면 국란을 또 당한다는 친청 세력의 대결구도였다.

 참다 못한 능양군이 친명파 김류·이귀·김자점 등을 진두지휘해 대궐로 쳐들어가 광해군을 무력화시키니 인조반정이다. 정난이나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다른 임금들 경우 대신들의 강권에 못이겨 등극하는 절차를 밟았으나 인조는 군사를 이끌고 직접 대궐로 입성해 군왕이 됐다. 후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삼전도에서 당하는 인조의 치욕이 등극 당시 친명반청 정책에서 비롯됐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 인조, 아버지 정원군 원종으로 추존

 인조는 등극하자마자 아버지의 한맺힌 매듭을 신원하려고 했다. 흥경원에 안장된 생부를 왕으로 추존한 뒤 살아 있는 생모 능성 구씨를 왕후로 존봉하려 했으나 대신들의 결사반대가 의외로 거셌다. 정원군이 서자 출신인데 다가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1530∼1559)도 군왕으로 추존이 안 됐다는 형평성 논리에서였다. 어쩔 수 없이 정원군은 정원대원군으로, 능성 구씨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종1품)은 부부인(府夫人·정1품)으로 가상(加上)하는 데 그쳐야 했고, 살던 집은 계운별궁으로 칭했다.

 인조 4년(1626) 연주부부인 구씨가 49세로 세상을 뜨자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장릉앞 길 121번지에 안장하고 원호를 육경원(毓慶園)이라 했다. 1년 뒤 양주 흥경원의 생부를 천장해 오른쪽에 예장하고 흥경원으로 개봉한 후에도 인조의 추존왕에 대한 열망은 집요했다. 마침내 인조의 꿈은 이뤄졌다. 보위에 오른 지 12년(1634) 만에 정원대원군은 원종(元宗)대왕으로, 연주부부인은 인헌(仁獻)왕후로 추존하고 능호는 장릉(章陵)으로 올렸다. 역시 반정공신 이귀 등의 소청이었다. 이귀는 임진왜란 때 원종대왕이 선조의 몽진을 도와 호종 2등 공신에 책록됐음을 내세웠다.

 아들 잘 둔 덕에 왕으로 추존된 원종은 앞서의 행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이렇다 할 궤적이 없다. 사적 제202호로 지정된 김포 장릉은 자좌오향(정남향)의 대길지 명당이다. 능침 뒤의 어병(御屛)산이 일품이고 능 앞 금천교를 감아 도는 물길도 법수와 맞아떨어진다. 장릉에 와서는 사초지(능 앞 언덕) 왼쪽에 있는 옥새석을 눈여겨봐야 한다. 폭력으로 왕권을 거머쥔 인조가 당대 신풍(神風)을 불러 천하 명당을 잡았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