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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내내 역모와 외침에 시달려 온 인조대왕.
원비 인렬왕후와 파주 장릉에 합폄으로 예장돼 있으며 소현세자 독살로 가족사까지 불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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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청)에 강제로 ‘형제의 의’를 맺은 강화 연미정. 외교정책의 실패로 당한 치욕이다. |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릉 40기 중에는 동명의 능호를 사용하나 한자가 다른 왕릉이 여럿 있다. 이 중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141-1번지에 있는 장릉(章陵·사적 제202호)과 경기도 파주시 갈현리 산25-1번지에 있는 장릉(長陵·사적 제203호)은 부자 간의 왕릉이어서 유별나다.
김포 장릉은 추존 원종(元宗)대왕과 인헌왕후 쌍분 능으로 인조(仁祖)대왕 생부와 생모의 능침이며 일반에 널리 공개돼 역사탐방객들의 발길이 잦다. 파주 장릉은 원종의 아들인 인조와 원비 인렬왕후의 합폄 능인데 비공개 능이어서 언론취재나 학술연구 목적 외에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 때론 범부들보다도 못했던 임금의 삶
임금도 한 인간의 궤적을 비껴갈 수 없음이야 남루한 비색 촌로도 다 알 수 있을 법한 일. 절대 권력의 용상 자리가 만민들한테야 부러웠겠지만 때로는 범부들만도 못한 때가 얼마든지 있었다. 조선의 역대 군왕 중 인조(1595~1649)만큼 극적이고 고단한 삶을 살다간 임금이 또 있을까.
왕으로서 인조의 생애는 기구하기 짝이 없다. 서(庶)삼촌이자 금상인 광해군의 패도만행이 능양군(인조) 집에까지 미쳐 동생(능창군)은 유배 가서 자결하고 아버지(정원군·추존 원종)마저 화병으로 원통하게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광해군을 등에 업은 대북파의 국정농단이 극에 달하자 백성들은 등을 돌렸고 차라리 천지변고라도 생기기를 학수고대했다.
절박한 민심에 하늘이 움직였다. 전국 각지의 민심동요가 반정 조짐으로 이어지더니 마침내 능양군을 앞세운 친명파(서인) 세력이 대궐을 점령하면서 창덕궁에 불을 질러 버렸다. 인조 1년(1623) 3월 13일로 광해군이 보위에 있은 지 15년 1개월 만이었다.
능양군이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를 찾아가 잠긴 빗장을 열고 어보를 거둬 전하면서 재배와 함께 통곡했다. 대비 김씨는 10년 만에 비로소 청천 하늘을 우러러 봤다. 대위(大位)는 마땅히 능양군 것이었다. 다 죽어가는 목숨을 구해준 서(庶)손자가 아닌가.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복위한 인목대비 김씨의 명으로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곧바로 즉위하니 제16대 임금 인조대왕이다. 29세였다. 혁명이나 반정이 성공하면 전조(前朝)의 정책은 뒤집히고 혁신 세력이 등장하여 새 질서를 수립함은 권력 이동의 수순이다. 선조 이래 50여 년간 권력을 빼앗겼던 서인 세력은 집권하자마자 대북파 핵심 세력들과 잔당들을 참수하고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인군이나 수령 방백을 잘 만남이 백성들의 홍복이라 했거늘 지지리도 복 없는 당시 조선의 민초들이었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은 전조의 명나라와 청나라 간 중립외교 노선을 포기하고 친명배청 정책을 확고히 했다. 인조가 재위한 26년 55일간은 고통의 나날이었다. 선조의 서자 아들로 태어난 데다 무력으로 왕위를 탈취하다 보니 정통성이 보장 안 됐다. 늘 불안해 잠 못 이루기 일쑤였다. 또 다른 세력이 트집을 잡아 출중한 왕자를 보위에 올려놓으면 자신에게 당한 광해군 신세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우려는 곧 현실로 닥쳐왔다.
○ 反淸정책 정묘호란으로 이어져
인조 2년(1624) 1월 등극 10개월 만에 일어난 이괄의 난이다. 반정 공신의 논공행상에서 2등으로 밀려난 이괄의 불만이었지만 한때 서울이 점령되고 인조가 공주로 남천(南遷)하는 위급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괄은 선조의 아들 흥안군(온빈 한씨의 장남)을 왕으로 추대하고 각 도민들로 하여금 생업에 충실토록 방까지 써 붙였다. 백성들은 또 임금이 바뀌는 줄 알고 나라꼴을 한탄했다. 지방 관군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이 점령당하는 우리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난이야 평정됐지만 이괄과 함께 반란 주모자로 처형된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청)으로 도망치며 더 큰 국난으로 이어졌다. 인조의 반청정책과 불안한 국내 정세를 샅샅이 전하며 조선 침략을 종용해 3년 뒤 정묘호란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3년 후인 인조 5년(1627), 이번에는 후금(청)이 3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 명과는 ‘군신 관계’니 자기네와는 ‘형제의 의’를 맺자는 것이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천도하고 끝까지 버티려 했지만 준비 없이 당한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다. 고육지책으로 강화 연미정(燕尾亭)에서 형제의 의를 맺고 서울로 환도했다.
그렇다고 국내 조정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국정을 주도하는 서인 세력이 사분오열돼 주상조차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서인이 공서(功西)와 청서(淸西)로 갈리더니 다시 공서는 낙당(黨)과 원당(元黨)으로, 청서는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으로 분열됐다. 이 상황에서도 낙당의 김자점(반정공신)은 효명옹주(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 딸)를 손자 며느리로 맞아들여 척신으로 집권한 뒤 온갖 횡포를 자행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 대륙을 거의 석권해 가던 후금 세력은 형제의 의를 군신 관계로 다시 바꾸자면서 감당 못할 협박을 가해 왔다. 조정 내 친명파들의 결사반대로 청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10만 대군을 앞세우고 침공해 왔다. 인조 14년(1636) 12월 정묘호란이 발발한 지 9년 후에 또 일어난 국가재앙으로 병자호란이다.
○ 정묘호란 9년만에 병자호란 비극
왕자들을 강화도로 피난시킨 뒤 인조도 뒤따르려 했으나 엄동설한의 폭설이 길을 막아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1만3000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성 안에서 버틸 식량은 50일뿐이었다. 청군은 12만으로 병력을 증강해 탄천 변에 진을 치고 산성을 포위한 채 무작정 기다렸다. 수난은 가련한 백성들 몫이었다. 죽지 못해 연명하는 식량을 군량미로 약탈당하고 부녀자들은 욕정에 굶주린 되놈들의 능욕 대상이었다. 선조 때 임진왜란 참화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비극이었다.
어느 인군도 공과(功過)는 병존하기 마련이다. 성 안에서 45일을 항전하다 삼전도 치욕을 겪게 되는 민족의 수모와 함께 소현세자 독살로 대표되는 인조 가족사의 불행과 치적들은 다음호로 이어진다. 이후로도 인조는 좌의정 심기원이 난(인조 22년·1644)을 일으켜 반역 음모로 처단되는 등 그칠 줄 모르는 왕권 도전에 신음했다.
인조는 원비 인렬왕후(1594~1635·서평부원군 한준겸 딸) 한씨와 후궁 조씨 사이에서 소현세자, 봉림대군(효종), 인평대군, 용평대군 등 모두 7남 1녀를 탄출했다. 계비 장렬왕후는 소생을 두지 못했다. 인조는 17년 동안을 한습(寒濕) 증세의 고질병에 시달렸는데 죽어서도 편치 못했다.
인조는 먼저 승하한 인렬왕후를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 북쪽에 예장하고 자신도 그 옆에 묻혔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능참봉이 능침을 순찰하다 기겁하고 놀랐다. 뱀·전갈 등과 벌레들이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서식하는 게 아닌가. 영조가 황급히 서둘러 자좌오향(정남향)의 파주 땅을 다시 택지해 합폄으로 천봉(영조 7년·1731)하니 오늘날의 장릉이다.
장릉(長陵) 능상에서 대왕께 아뢰어 봤다. “전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신다면 또 정변을 일으켜 왕으로 옹립되시겠나이까.” 먼 하늘에 뜬 저 구름이 ‘때로는 구중궁궐의 곤룡포가 삼간모옥의 베적삼만 못하다’고 울림으로 전해 주는 듯싶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