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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32>효종대왕과 영릉

惟石정순삼 2010. 7. 31. 15:3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32>효종대왕과 영릉

산릉제를 준비하는 영릉 재실. 원형대로 보존된 유일한 재실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영릉(寧陵).

조선 최초의 동원 상하연봉으로 효종대왕(위)과 인선왕후(아래)가 한 용맥에 예장돼 있다.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대왕은 한탄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마음을 같이하는 신하가 한 둘만 있어도 도움이 된다 했거늘 지금은 너나없이 눈앞의 이익만을 꾀하고 있구나. 나와 함께 일할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는가.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물고 유숙할 곳마저 없구나.”

 매몰찬 혁명군주 인조의 뒤를 이어 31세로 등극한 효종(1619~1659)은 집념이 강하면서도 정이 많은 제왕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극진히 다스리고 할 일을 삼가면서 대신들이 동행해 주길 원했건만 조정은 사분오열돼 왕명도 통하지 않았다. 효종의 행장이 담긴 영릉지(寧陵誌)의 이런 기록들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사소한 정쟁에 목숨 걸고 한 치 양보 없는 신하들의 이념 대결에 임금은 고뇌가 깊어지고 회한이 쌓여 갔다.

○  청나라 억류 8년 두 왕자 운명 갈라

 숭극(崇極·임금)의 자리에 오르려면 극적인 기사회생이야 다반사겠지만 효종처럼 형극의 연속이라면 누가 극위(極位·용상)에 오를까 싶다. 효종의 41년 생애는 숨가빴다. 8세 때 봉림(鳳林)대군으로 봉해진 뒤 12세에 인선(仁宣)왕후 덕수 장씨와 가례를 올렸다. 17세 때는 모대비 인렬왕후가 훙서하면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자칫 건강을 잃을 뻔했다.

 18세에 병자호란이 발발하며 강화로 피란 갔으나 청군에게 조정군이 패하고 말았다. 부왕 인조, 형 소현세자와 남한산성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군신예의 치욕을 당하고 형과 함께 볼모로 잡혀 가니 19세였다. 청나라 수도 심양에 억류된 8년 동안 두 형제의 운명이 갈렸다. 조선의 차기 국왕이 될 소현세자는 청국 생활에 잘 적응하며 당시 그곳에서 성행하던 서양문물을 두루 섭렵하고 수용했다.

 그러나 동생 봉림대군은 달랐다. 일국의 왕자 신분으로 적국 포로가 된 신세를 통탄하며 국방이 허술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자조(自嘲)했다. 청국군의 동향과 신흥왕조 내부사정을 비망록에 적어 인조한테 상소하고 명·청 간 국경 갈등도 수시로 보고했다. 청이 소현세자를 전지에 내보내려 하자 자신이 가겠다고 의연히 나서 이를 중지시킨 적도 있다.

 반면 청국에선 친명파 인조를 제거한 뒤 청에 호의적인 광해군을 유배에서 풀어 복위시키려고 음모를 획책했다. 소현세자를 조선 임금으로 예우하며 외교·내치 문제까지 협의해 부자간을 이간시켰다. 청에 절치부심하며 와신상담하고 있던 인조와 조선 조정에서 이를 모를 리 있겠는가. 어느덧 대신들 간에는 세자가 청국에서 임금 노릇한다는 괴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대저(大抵) 청천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고 권력의 속성은 부부지간은 물론 부모형제 사이에도 나눌 수 없는 법이다. 볼모에서 풀려 먼저 돌아온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의문의 급사를 했다. 세자가 죽었는데도 조정은 평온했고, 그 후 인조는 며느리를 사사시키고 손자들마저 귀양가 독살당하도록 방치했다.

 소현세자가 급서하자 청국에 있던 봉림대군이 곧바로 귀국해 세자로 책봉됐다. 봉림대군은 부왕에게 “부덕한 소자가 저위(儲位·세자)에 오를 수 없다”고 울면서 사양했지만 “봉림에게 성스러운 덕망이 있다”면서 동궁에 거처토록 했다. 왕실 법도대로라면 생존한 소현세자 삼남이 오를 자리지만 인조는 안중에도 없었다. 인조 27년(1649) 5월 8일, 고질병 한습(寒濕)으로 17년을 고통받던 부왕이 예척(禮陟·왕의 죽음)하자 세자 봉림대군이 대통을 이으니 제17대 효종대왕이다. 열혈 31세 청년이었다.

○  `청나라 섬멸' 위해 친명파 중용

 효종은 보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 원수를 갚고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 요지부동의 결심을 했다. 청나라를 치는 북벌(北伐) 계획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상국관계로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내면적으로는 명의 패망 세력과 제휴해 청을 섬멸한다는 야심찬 정책이었다. 볼모로 억류돼 있는 동안 청의 군대조직과 지휘체계를 파악한 정보도 효종에게는 남다른 자신감이었다.

 우선 친청파 척신으로 조정을 농단하던 김자점(인조반정 공신)을 파직하고 친명파 송시열·김상헌·송준길 등을 중용했다. 어영청(御營廳)에 북벌 선봉부대를 두고 주력군과 기마병은 조총과 화포로 무장시킨다는 구체적 비책까지 수립했다. 전쟁은 병력과 무기만으로 이기는 게 아니다. 반드시 돈이 있어야 승리하는 법이다. 네덜란드에서 표류해 온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고 군비확충과 군사훈련을 강화하다 보니 국고가 바닥났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부역과 조세 부담만 공룡처럼 불어나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여기에다 삼군 중 최정예군으로 선발된 어영청의 기강은 가관이었다. 양반집 자제가 고위직을 독점한 뒤 주색잡기에 허송세월하며 훈련이나 고된 부역은 종들이 대신토록 했다. 하는 일 없이 밥만 축(縮)내며 세월을 보내는 걸 어영부영(御營不營)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비롯된 말이다. 8년 동안의 3만 병력 양성계획이 겨우 5600여 명에 그치고, 청의 국세가 일취월장으로 막강해져 한 맺힌 북벌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암행어사 밀파 한 달 만에 돌연 훙서

 효종은 극약처방으로 암행어사를 밀파해 전국 양반 자제들 중 군역 기피자를 색출하려 했다. 그러나 효종은 보수·기득 권력층의 극력 반대를 무릅쓰고 이 어명을 내린 지 한 달 만에 돌연 훙서하고 말았다. 임금이 된 지 10년으로 보령 41세였다. 당시 백성들은 “당저(금상)까지 독살하는 금수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권세 대신들을 원망했지만 역사는 ‘독살음모설’로 얼버무리고 있다.

 효종은 김육 등의 소청을 받아들여 상평통보를 주조한 뒤 화폐로 유통시키고, 대동법을 통해서는 북벌정책의 군비증강으로 늘어난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경감했다. 태음력과 태양력 원리를 응용해 24절기를 활용하는 시헌력을 채택해 농사편의를 도모했다. 효종의 가장 큰 치적은 비록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비축된 군사력의 증강이다. 청의 군제가 도입되면서 조선군(軍)의 체계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렇듯 고난에 찬 효종의 일생은 죽어서도 순탄치 못하고 변고를 겪는다. 대신들 간 권력암투의 희생양으로 풍수논쟁에 휘말리는 것이다. 효종이 승하하자 조정에서는 당시 왕릉풍수의 대가였던 고산 윤선도에게 택지토록 했다. 고산이 경기도 화성지역(현 융·건릉)을 소점(所點)하자 서인세력과 그곳에 세가를 이뤄 살던 권문대신들이 들고 일어났다. 왕릉으로 택정되면 인근 사가와 일반 묘는 모두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암 송시열의 주장대로 건원릉 내 서쪽 용맥에 예장하고 영릉(寧陵)이라 능호를 정했다. 현재 영조대왕과 계비 정순왕후가 안장된 원릉 자리다. 효종이 예척한 지 15년 후 영릉의 병풍석에 틈이 생겼다. 남인들은 비가 오면 유수(幽隧·무덤 속)에 물이 스민다고 서인들을 몰아쳤다. 고산은 남인이었고 우암은 서인이었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로 영릉을 천장하며 서인의 50년 장기집권은 몰락했다. 일찍이 이곳에는 성군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이 있어 더없는 명당자리다. 영·녕릉으로도 불리며 사적 제195호다. 효종의 영릉은 인선왕후 장씨(1618~1674)와 함께 동원 상하연봉으로 자좌오향의 정남향이다. 혈장(穴場)이 아래위로 있을 때 쓰는 풍수의 장법이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