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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38>경종 원비 단의왕후 혜릉

惟石정순삼 2010. 8. 1. 03:00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38>경종 원비 단의왕후 혜릉

장희빈 며느리로 불우한 일생을 산 단의왕후의 혜릉.

원(園)에서 능으로 격상된 왕릉이어서 능침 앞 석물들이 단출하다.

혜릉 정자각. 한동안 피폐됐다가 1990년 초 중건됐다.

 

능이나 무덤에도 신분이 있다. 특히 왕족들 무덤은 묻히는 사람의 직위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임금이나 왕비는 능(陵)이며 왕세자와 왕세자비 또는 왕의 사친(私親·왕을 낳을 당시 왕과 왕비 신분이 아니었을 경우)은 원(園)으로 부르며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과 같이 묘(墓)라 호칭한다. 사후에라도 지위가 격상(추존)되거나 격하(폐위)되면 무덤에 대한 신분도 과거와 현재가 달라졌다.

 동구릉(사적 제193호·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에 가면 남편 지위에 따라 사후 신분이 달라진 능이 있다. 조선 제20대 경종대왕 원비 단의(端懿)왕후 청송 심씨의 혜릉(惠陵)이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다른 왕이나 왕비처럼 능침 규모가 웅장하거나 남편과 쌍릉으로 예장된 것도 아니다. 동구릉 한편 고적한 구석에 외롭고 쓸쓸한 단릉으로 동쪽(유좌묘향)을 바라보고 있다. 공교롭게도 단의왕후가 두상(頭上)을 둔 서쪽은 경종이 계비 선의왕후(함종 어씨)와 함께 예장된 의릉(懿陵·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쪽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랄까.

○ 11살에 가례 고된 며느리 역할만 할 뿐

 단의왕후(1686~1718)는 온 백성이 우러르며 부러워하는 세자 배필 자리에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불행한 여인이었다. 11세 때 두 살 아래 경종을 만나 가례를 올려 부부가 됐지만 시집인 대궐 안에서는 지엄한 궁중법도 교육과 고된 며느리 역할뿐이었다. 표독하고 극성스러운 시어머니(장희빈)는 아들(경종)을 빼앗겼다는 서운함에 얼음장처럼 차게 대하고 남편마저 심약해 기댈 곳이 없었다.

 조정은 더욱 가관이었다. 친(親)시모(장희빈)와 서(庶)시모(인현왕후)를 사이에 둔 노론과 소론의 권력투쟁이 끝 간 데를 몰라 대신들이 죽고 유배 길을 떠났다. 마침내 이 싸움에 친시모 측 세력(소론)이 패해 시아버지(숙종) 사약을 받고 시어머니는 죽고 말았다. 악에 바친 시어머니가 남편을 불구로 만들어 놓으니 이때 심씨 나이 16세였다.

 그 후 남편(세자)은 숙맥불변(菽麥不辨)이 됐다. 내명부에서는 근인을 뻔히 알면서도 원손을 기다렸다. 이럴 때마다 심씨의 오장육부는 새까맣게 타 들어갔고 장희빈에 대한 원망이 분노로 증폭됐다. 침전 밖 청천하늘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냥이나 죽었으면 당신의 손자를 낳아 왕통을 이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세자의 대를 잇지 못하는 내 신세가 장차 어찌될 것인지…. 여자로 태어난 처지가 가여울 뿐이로구나.”

 불현듯 심씨는 세자빈이 돼 대궐로 떠나던 날 어머니(고령 박씨)가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 흘리며 당부하던 말씀이 떠올랐다. 세 번째 관문을 통과한 천신만고의 간택이었지만 아버지(증 영의정 심호) 역시 반기는 자리가 아니었다.

 “인생막작여인신(人生莫作女人身·무릇 인생은 여인으로 태어날 것이 아니로다) 평생운수의타인(平生運數依他人·평생 운수를 남에게 의지해야 하느니라). 이 말을 한시도 잊지 말도록 하여라.”

 유수 같은 세월이 흘러 세자빈 나이 어느덧 30을 넘겼건만 몸에 태기는커녕 운신조차 하기 힘든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고 뽕 밭엘 가야 님을 만나련만 세자는 빈궁 침소에 들지도 않고 군왕 수업에만 열중이었다. 추야장 긴긴밤을 홀로 지새울 적마다 심씨의 장탄식은 한으로 멍울졌고 심신은 야위어만 갔다.

○태기는커녕 중병 33세에 한많은 일생 마쳐

 숙종 44년(1718) 심씨가 33세로 하세했다. 시아버지 숙종은 누구보다도 한많은 일생을 살다간 며느리가 애잔해 동구릉 안 서쪽 능선에 장사지내고 그 회한을 글로 적어 내렸다.

 “세자빈의 덕스런 성품과 순수한 언행은 하늘로부터 나서 얻은 것이다. 사람이 교정하고 바로 잡아 억지로 시켜 그렇게 된 바가 아니로다. 진실로 왕실의 큰 상실일지어다.”

 심씨의 무덤은 세자빈 신분이어서 원(園)으로 예우됐다. 봉분도 작았고 원 앞 석물들도 간소했다. 더욱 야속한 건 왕실의 법도였다. 이 해에 숙종은 14세의 함종 어씨를 세자빈으로 다시 맞이했다. 세자가 타고난 약골에 생산 능력조차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빈궁 자리는 비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병조참지 어유귀(魚有) 부부는 금지옥엽으로 소중히 키워온 어린 딸을 재워 놓고 눈이 붓도록 밤새 울었다.

 “내 항상 명문갑족 벼슬 높은 사위도 바란 적 없고 네 몸 하나 위해 주는 서방 만나 잘 살기를 원했건만 이 무슨 운명의 훼방이란 말이냐. 이를 어찌해야 하는고.”

 2년 뒤(1720) 숙종이 승하하며 경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세자 때보다도 더 무력했다. 천성이라도 야무져 왕권이라도 행사했으면 속 시원하련만 어림없었다. 성정마저 심약해 대쪽 같은 신료들의 기개를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먼저 세상 떠난 세자빈 청송 심씨를 단의왕후로 추존한 뒤 원을 능으로 승격시켜 혜릉이란 능호를 내린 것과, 함종 어씨를 왕비로 진봉한 것도 궁중법도에 따른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심씨에게는 사후에 팔자 고치는 계기였다. 낮았던 봉분이 높아지고 능침 앞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문·무인석이 세워졌다. 그리고는 종묘(국보 제227호·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영녕전(永寧殿) 동협(東夾) 제13실에 경종대왕과 배향됐다. 세자빈이나 후궁 신분으로는 언감생심 넘보지 못할 지존의 자리다.

○인간의 존재 새삼 덧없어지는 마음뿐

 단의왕후가 예장된 혜릉 앞에서 탐방객들은 잠시 상념에 잠긴다. 죽은 뒤 명예를 위해 간난(艱難) 끝에 모은 돈을 세상과 나눠 쓸 것인가, 아니면 사후야 어찌됐건 호의호식하며 내 식솔들하고만 누리다 갈 것인가. 살아생전 일신영달과 죽어서의 사후평가가 혜릉을 지나치는 노부부 낯빛에 명암으로 투영된다. 생과 사가 교차하는 세월의 길목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인간의 존재가 새삼 덧없어지는 현장이기도 하다.

 경종에겐 연잉군(영조)과 연령군(명빈 박씨 소생)의 두 이복동생이 있었다. 연잉군은 자신과 차기 왕위를 놓고 용호상박하는 두려운 존재였으나 연령군(延齡君·1699~1719)은 군신 예의로 경종을 따랐다. 이런 연령군을 부왕 숙종도 지극히 아꼈다. 단의왕후가 승하한 이듬해 연령군이 하세하자 경종은 극진한 슬픔을 담은 제문을 손수 지어 내렸다.

 “불러도 대답 없고 막막하여 들리지 않는도다. 이미 세상을 떠나갔거니 네 모습을 헛되이 그려 보노라.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고 산에 묻힘에는 기한이 있음이 애절하도다. 옷자락에 석양이 남았나 싶더니 어느덧 월색이 천추를 비추는구나.”

 병석에서 애통해하던 숙종이 이 제문을 읽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혼절에 이르도록 앙천통곡했다는 절구(絶句)다. 조선 왕조사에는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져 가는 임금과 왕비들이 여럿 있는데 경종과 원비 단의왕후도 이에 속한다. 재위 기간이 짧거나 당쟁에 휘말려 괄목할 만한 치적이 없는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는 남편이 아내를 죽인 숙종 조(朝)와 아비가 아들을 죽인 영조 묘(廟)를 간과하지 않는다. 그 살얼음판 시대를 살았던 경종과 단의·선의왕후를 청사(靑史)는 잊지 않는다.

  <이규원 시인 ‘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