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살아가는 중년 삶의 이야기

특별기사이야기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40>영조대왕 원릉<中>

惟石정순삼 2010. 8. 1. 09:08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40>영조대왕 원릉<中>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는 영빈 이씨의 묘 수경원. 영조 후궁으로 사도세자의 생모다.
영조대왕이 예장된 원릉 앞의 비각. 영종(英宗)과 영조(英祖)의 묘호가 음각된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적서(嫡庶)의 신분차별이 숨을 멎게 했던 시대, 숙종의 서자로 태어난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인간적 비애와 신변 위협은 백척간두에 선 풍전등화와 다를 바 없었다. 영조는 철이 들면서 ‘왜 하필이면 생모 최씨가 궁녀들에게 세숫물이나 떠다 바치는 가장 미천한 종인 무수리 출신이었을까’라는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형왕 경종의 아들이 있었다거나 다른 왕자가 생존했더라면 영조에게 왕위는 감히 넘볼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영조는 조정 중신들에게 하시당했고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넘나들었다. 숙종 25년(1699) 6세로 연잉군(延 君)에 봉해진 뒤 경종 1년(1721) 왕세제로 책봉되기까지의 세월이 22년. 그간 내명부의 질시 암투와 노론-소론 간 당쟁 와중에 목숨 부지한 것만도 천우신조라 할 영조의 팔자였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계모 인원왕후(숙종 제2계비)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를 내놓을 테니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했겠는가. 이런 영조가 금상으로 즉위하자 영조에게 대들었던 신료들은 멸문지화를 각오했다. 예상대로 소론 측 수장들이 주살당하고 주축 세력들이 숙청당해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영조는 현명한 군주였다. 그는 성장과정을 통해 당쟁의 피폐상을 누구보다 절감했고 종식시켜야 할 국가적 과제로 우선시했다. 영조는 등극하면서 경종 재위 시 신임사화를 유발한 소론 측을 몰아내는 기유처분을 단행했다. 이후 노론 측이 대거 복귀되자 노론 측 강경 세력인 준론자(峻論者)들은 소론 측의 멸문을 획책했다. 영조는 오히려 준론자들을 축출하고 소론 측 일부 인재를 기용하는 영단을 내렸다. 이것이 영조 5년(1729)에 내려진 기유처분으로 탕평책의 효시다.

○ 노론·소론 두 세력 균형 맞춰 인사

 탄력이 붙은 영조의 정국해법은 절묘했다. 이른바 쌍거호대(雙擧互對) 인사 정책으로 영의정(노론 민치중)과 좌의정(소론 이태좌)의 두 앙숙 정승을 등용해 서로 맞대도록 했다.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의 육조 역시 두 세력 간 균형을 맞춰 소론이 판서를 맡으면 참판은 노론이 차지했다. 인사 관리를 맡았던 이조(吏曹)의 경우 판서(노론 김재호), 참판(소론 송인명), 참의(소론 서종옥), 전랑(노론 신만)을 고루 섞어 놓으니 결코 어느 한 부처에 힘이 쏠린다 해서 이기는 싸움이 아니었다.

 임금의 의도대로 정국이 수습되자 영조는 탕평책을 더욱 확대했다. 재능에 관계없이 노-소론 측 인사만 기용하던 벼슬길을 재야 세력인 남인·소북파 등에까지 길을 터 사색당파 시대로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능력 위주로 인재를 발굴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인사방편이 보편화되자 은둔했던 선비들이 대거 출사표를 던졌다. 이로 인해 영조는 조선 후기 문예 부흥기를 이끌 수 있었고 신(新)사조인 실학사상이 봇물을 이뤄 많은 학자들이 배출됐다.

○ 정치·경제·국방 등서 놀라운 업적

 탕평책으로 신료들의 힘이 분산되고 왕권이 강화되자 영조의 국정운영에는 힘이 실렸다. 정치·경제·국방·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이룩한 영조의 업적은 참으로 방대하다. 가장 야만적 형벌이었던 압슬형(바위로 무릎을 으깨는 고문)을 폐지해 인권을 존중하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해 백성들의 억울함을 직접 알리게 했다.

 당시 만연하던 사치·낭비 풍조를 엄금시키고 금주령을 내려 풍습을 바로잡는 한편 균역법을 합리화해 세금제도를 고르게 했다. 영조는 특히 군사정책에 국력을 집중했다. 당시 통용되던 주전(鑄錢)을 무기 제조체계로 전환한 뒤 수어청에 조총을 만들도록 했다. 화차를 제작해 군병에 보급하고 변방 요새 구축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영조는 서자들의 불만해소 방안으로 아버지가 양반인 서얼 출신 모두를 양인이 되게 하고 관리로도 채용했다. 신분에 따른 군역(軍役)을 명확히 시행해 백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자신의 출생신분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기도 했다.

 아울러 영조는 역대 임금들이 시행하지 못한 왕실 내부 문제들을 과감히 매듭지었다. 왕실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사당(경기전)을 전주에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하고 단경왕후(중종 원비)를 복위시켜 온릉이란 능호도 내렸다. 고조부 되는 인조의 장릉(長陵) 앞 석물에 뱀과 벌레가 서식한다는 상소가 있자 즉시 천장토록 왕릉 풍수를 동원했다.

 영조는 스스로 학문을 즐기고 독서삼매경에 빠졌으며 다수의 저술도 남겼다. 인쇄술을 개량해 수많은 서적을 간행, 반포해 백성들에게 널리 읽혔다. 언문으로 불린 훈민정음이 대량 보급되며 본격적인 서민 문자화된 것도 이 시기다. 악학궤범 서문과 어제 경세편을 직접 찬술하고 연행록(홍대용), 반계수록(유형원), 도로고(신경준) 등이 동시에 편찬됐다.

 무엇보다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농업을 장려하며 민생이 안정되도록 통치 이념을 확고히 했다. 영조 39년(1763)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져오자 구황(救荒)작물로 온 백성이 널리 심도록 적극 권장했다. 그 후 고구마는 한해나 기근이 극심할 때 아사자를 줄이는 데 획기적 역할을 했다.

○ 묘호 비 영종-영조 나란히 세워져

 백성들은 저런 어진 임금에게도 근심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천지신명은 비록 군왕이라 할지라도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내려주지 않았다.

 영조는 달성부원군 서종제 딸을 원비(정성왕후·1692~1757)로 맞았으나 소생을 얻지 못했다. 정비 소생의 대군 적자에 대한 갈망이 남달랐던 영조였다. 66세 되던 해 52세 어린 15세의 정순왕후 김씨(오흥부원군 김한구 딸)를 계비로 맞았으나 역시 적자 후사를 잇지 못했다.

 네 후궁 중 제1후궁 정빈 이씨에게서 장남 효장세자(추존 진종소황제)를 탄출했으나 10세 때 요절하고 말았다. 제2후궁 영빈 이씨에게서 아들을 보게 되니 바로 사도세자(1735~1762·추존 장조의황제)다. 영조 가족사의 참극은 어린 정순왕후와 사도세자의 갈등과 반목에서 비롯된다.

 이 또한 극심한 당쟁의 산물로 결국엔 성미 급한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고 못 박아 굶겨 죽이고 만다. 기막힌 꼴을 당한 영빈 이씨는 아들보다도 10세 어린 계비 김씨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 수경원(綏慶園)에 묻혔다가 1968년 6월 서오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475-95) 내 묘좌유향으로 이장된 뒤 오늘에 이르렀다.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의 동구릉 내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해좌사향) 비각을 본 참배객들은 의아해한다. 영종(英宗)과 영조(英祖)의 묘호 비가 나란히 있기 때문이다. 조선 임금들은 조(祖)보다 종(宗)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재위 시 군왕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천하를 주름잡던 제왕도 자신의 묘호를 알고 훙서한 임금은 없다.

 종(宗)은 계승왈종(繼承曰宗)이라 하여 정상적으로 왕위를 이었다는 의미며 조(祖)는 유공왈조(有功曰祖)로 승통 당시 정변이 있었거나 공이 있을 경우 지어 올렸다. 영조는 승하 직후 영종이었다가 후일 영조로 개묘(改廟)됐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