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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안에 있는 원비 정성왕후의 홍릉. 오른쪽 빈 터가 영조 자리였으나 손자 정조의 미움을 사
영조는 동구릉 내 원릉에 예장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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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침 입수 용맥이 급해 급경사로 복토된 홍릉 사초지. 조선 유일의 건위공지(乾位空地) 단릉이다. |
사적 제198호 서오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에 가면 능침 오른쪽을 비워 둔 채 아직껏 낭군님을 기다리는 외롭고 애달픈 왕비릉이 있다.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대왕 원비 정성(貞聖)왕후 달성 서씨(1692~1757)의 홍릉(弘陵)이다.
그 님은 “자신도 죽으면 옆 자리로 오겠노라”고 철석같이 굳은 맹세를 했건만 머나먼 동구릉(사적 제193호·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안 원릉(元陵)에 계비 정순(貞純)왕후 경주 김씨(1745~1805)와 영면에 들어 여태껏 안 오고 있다. 인생사 고통 중 가장 큰 괴로움이 사람을 기다리는 대인난(待人難)이라 했건만 못 오는 님에게도 까닭은 있는 법이다.
○ 왕후와의 약속 물거품처럼 꺼져
영조(1694~1776)는 자신보다 두 살 위였던 정성왕후를 무척이나 애모하며 존중했다. 달성부원군 서종제 딸이었던 왕후는 예의범절이 남달랐고 특히 비천한 무수리 출신의 생모를 극진히 모셔 영조를 감동시켰다. 후궁(첩) 소생이란 출신 성분이 평생 한이었던 영조는 정성왕후한테 대군 왕자를 얻어 대통을 잇는 게 일생일대의 대원이었다. 그러나 그 뜻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정성왕후는 33년을 곤위(坤位·왕비 자리)에 있다가 영조 33년(1757) 창덕궁 관리각에서 66세로 승하했다. 대문장가로 풍수에도 달통했던 영조는 애책(哀冊·추도사)을 직접 내리고 홍릉 자리를 친히 택지하며 왕후와 묵언의 약속을 했다.
“허우지제(虛右之制)로 광중 오른쪽을 비워 두고 죽은 뒤 함께 묻힐 것인데 무엇을 근심하랴.”
허나 누가 인생의 앞날을 장담할 것인가. 무릇 눈앞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사라지고 열 계집 마다하는 사내 없다 했다. 천지가 개벽할 듯한 견딜 수 없는 슬픔도 세월 앞에는 속수무책이다. 영조는 네 후궁의 몸에서 2남 11녀를 득출했지만 대군으로 왕통을 잇고자 하는 열망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어느덧 정성왕후와도 사별한 지 2년이 돼 갔다.
마침내 영조는 새 장가를 가기로 결심했다. 영조 35년(1759) 66세 임금이 52세나 어린 15세 경주 김씨와 재혼의 가례를 올리니 바로 계비 정순왕후다.
노래(來)한 영조에겐 꽃보다 더 고운 어린 왕후가 입 안의 혀였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지경이었다. 이때부터 정순왕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며 조선 왕실에는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암투와 모함이 난무하고 불길한 조짐의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현숙했던 정성왕후보다 악명 높은 정순왕후를 더 회자하고 있다.
내명부 수장으로 별다른 궤적이 없었던 정성왕후가 영조 원비였음은 물론 서오릉 안 홍릉이 그녀의 능이라는 사실조차 낯설기만 하다는 탐방객들의 표정이다. 그러나 정성왕후가 이곳 홍릉에 예장되고 정순왕후로 왕실 안주인이 교체되며 조선 후기사에 던진 역사적 파장은 실로 엄청나다.
아버지(영조)가 아들(사도세자)을 뒤주 속에 가둬 굶겨 죽이고 할머니(정순왕후)가 손자(은언군·사도세자 아들)를 사약 내려 목숨을 끊는 전대미문의 왕실 참사가 계비 정순왕후로부터 기인된다. 이미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돼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던 천주교가 왕실에까지 파고들자 정순왕후는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서슴지 않았다. 천주교를 국가 주적(主敵)으로 간주하면서 교인들이 당한 박해와 인명살상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 피의 숙청 서슴지 않는 정순왕후
하늘이 내리는 천명을 어느 누가 거역하랴만 이 또한 원비 정성왕후 서씨가 영조보다 일찍 예척하고 어린 계비 정순왕후가 입궐하면서 야기된 역사의 분란이다. 이 모두 당쟁의 소용돌이가 빚어낸 슬픈 역사이니 당시 신료들은 나라 위해 일하지 않고 어이해서 사람 죽이는 데 목숨을 바쳤는지 후일의 사가들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이후 계비는 서(庶)손자 정조가 등극한 후에도 금상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자신의 무고로 아사한 사도세자 아들이 용상에 올랐으니 마음 편할 리 없었다.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 세력 모두를 기용 않고 소론파를 고루 섞어 등용하는 탕평책도 성에 차지 않았다.
온갖 의혹 속에 정조가 예척하자 계비 김씨는 11세 된 증손자 순조를 등극시켰다. 정순왕후는 철없는 어린 주상을 수렴청정하며 5년 동안 조정을 휘젓다가 순조 5년(1805) 61세로 숨을 거뒀다. 계비는 눈을 감으며 원릉의 영조대왕 곁에 가겠다고 유언했다. 이리하여 홍릉은 정성왕후 옆 오른쪽을 영구히 빈터로 남겨둔 채 단릉 신세가 돼 버린 것이다. 역대 조선왕릉 중 생전 임금이 수릉(壽陵·군왕이 살아서 능 터를 잡아 두는 것)지를 택지했다가 공터로 남겨진 건 홍릉이 유일하다.
정서향에 가까운 을좌신향(乙坐辛向)의 홍릉은 입수 용맥이 매우 급해 능침 앞의 사초지를 높이 복토했다. 좌청룡에서 물이 흘러 우백호를 감싸는 좌수우도(左水右倒) 형국으로 이런 지세에선 성미 급한 후손이 나와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 수많은 고금 서적을 독파해 풍수에 관통했던 정조가 이 점을 간과했을 리 없다.
○ 아버지 죽인 영조 끝까지 미워해
정조는 아버지를 굶겨 죽인 할아버지 영조를 끝까지 미워했다. 영조는 부왕(숙종)이 영면해 있는 서오릉 안 명릉 가까이 묻히고자 했지만 손자 왕의 명에 따라 동구릉 내로 가게 된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살아생전의 권세가도 죽고 나면 이 지경이 되는 법이다. 이래서 조선 선비들은 바로 살려고 애를 쓰며 자신의 행적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다.
영조가 예장된 원릉 자리 또한 예사로운 터가 아니었다. 일찍이 제17대 효종대왕을 안장했던 영릉(寧陵) 초장지로 능침 석물에 금이 가자 광중에 물이 난다 하여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릉 곁으로 천장한 곡절 있는 자리다. 이 또한 치열한 당쟁의 산물이었지만 여기에는 왕릉풍수의 무서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자고로 사가에서조차 파묘한 묘 자리는 지기가 샜다 하여 다시 쓰지 않았는데 하물며 왕릉이야 말할 나위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정조는 할아버지 능지를 굳이 영릉을 파묘한 자리로 옮겨 썼다. 정조의 내심은 당시 묘제를 면밀히 살펴보면 금세 드러나고 만다.
고금의 장법에 따르면 일반 묘의 광중은 3자(약 1m) 정도를 팠고 왕릉의 현궁(玄宮)은 십자왕기설에 따라 열 자(약 3m) 깊이로 팠다. 十척(尺)의 깊이에 임금의 시신을 안치하고 석관을 덮으면 곧바로 王자였다. 따라서 일반 사가에서 십 척 깊이로 매장함은 역모에 해당됐다.
세종대왕 영릉(英陵)은 광주 이씨 문중의 선조 묘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천년길지 명당 기운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다. 그 비결이 바로 이 같은 사가와 왕릉풍수의 다른 점에 있으나 원릉 자리는 이미 효종을 예장하며 열 자 깊이로 판 파혈지(破穴地)다. 할아버지가 미워 기가 샌 자리에 일부러 능침을 조영한 정조는 참으로 무서운 군왕이었다.
차라리 정성왕후 서씨는 현재의 홍릉에 혼자 있는 편이 낫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