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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44>추존 장조의황제 융릉

惟石정순삼 2010. 8. 1. 09:15

능에서 만난 조선 임금<44>추존 장조의황제 융릉

추존 장조의황제의 융릉.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천추 한을 덜기 위해 능침 앞 정자각을 비껴 세운

정조대왕 효심이 돋보인다.#

융릉의 원찰 화성 용주사. 정조가 심은 대웅전 앞 회양나무가 괴사한 채 쓸쓸히 서 있다.
 사도세자(1735~1762)가 열네 살이던 해 늦가을. 영조대왕이 세자를 대동한 채 시종들을 거느리고 궁궐 뜰을 거닐며 국정 국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 터를 바라보던 세자가 부왕에게 물었다.

 “아바마마, 왜 경복궁을 재건하지 않으시옵니까?”

 “나라의 재정이 부족해 중건하기가 어려운 것이로다.”

 “중국 요·순 임금은 무엇이든 하고자 하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호응했다던데 아바마마께옵서는 저 경복궁 하나를 중창하지 못하시옵니까? 혹시 성군이 못되신 것은 아니옵니까?”

 순간, 대왕의 용안이 주토빛으로 변했다. “이런 발칙한 놈 같으니라구. 네 녀석은 얼마나 성군치도를 잘하는지 내 몸소 지켜볼 것이다.”

 때마침 조정 안 노론 측 중신들이 세자의 서정(庶政) 대리를 영조에게 건의해 왔다. 차기 임금에 대한 일종의 정무 수업으로 금상 밑에서 사소한 국사 처리를 익히는 제왕 실습이었다. 이듬해 봄(영조 25년·1749) 대왕은 열다섯 살 된 세자 선에게 서정을 위임하며 서릿발 같은 엄명을 내렸다.

 “이제부터 세자는 조정의 대·소사 일체를 모두 품의하여 처결토록 하라.”

 부왕의 속을 모르는 세자가 열심히 정사를 돌보며 사사건건 주상께 아뢰었다. 작은 일을 품의하면 “그것도 해결 못해 알리느냐”고 꾸중했다. 용기를 내 단독으로 행하면 “작은 것이라도 모두 고하라 했거늘 왜 혼자 처결했느냐”고 문책하며 불호령이 떨어졌다.

 마침내 세자 행동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왕 앞에서 눈조차 제대로 못뜨고 대신들과 마주치면 슬슬 피했다. 영조의 세자에 대한 증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주눅 든 세자에게서 어느 날 갑자기 서정 대리권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권력의 향일성(向日性)이란 무정하기 이를 데 없는 법이다. 부왕의 버림을 받은 세자는 이튿날부터 허수아비였다. 동궁에 혼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고 때로는 큰 소리도 질렀다.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면 5년 전(10세) 가례를 올린 세자빈 혜경궁 홍씨(1735~1815)에게 분통함을 토로했다. 홍씨는 노론 측 핵심 인물인 영의정 홍봉한(풍산 홍씨)의 딸로 매우 총명하고 조신한 여자였다.

 세자의 이상행동은 어릴 적부터 감지됐다. 천자문을 배우다가 사치할 치(侈)자를 짚고 입은 옷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사치”라고 벗어 던졌다. 영조가 소싯적 쓰던 칠보 감투를 씌우려 했으나 “이것은 더 큰 사치”라며 끝내 거절했다. 안타까운 의대(衣帶) 결벽증이었다. 열 살이 되면서부터는 정치에 대한 안목까지 생겨 부왕과 조정 중신들을 놀라게 했다.

 어느 날 세자는 신임사화에 연루됐던 소론을 몰락시킨 노론 측 처사를 호되게 비판했다. 신임사화는 장희빈 아들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파와 숙빈 최씨 아들 영조 편에 섰던 노론파 간의 정국 주도권 싸움으로, 경종이 즉위(1721)하며 노론 측이 몰살당한 정변이다. 권력은 무상한 것이어서 영조가 즉위(1725)하자 이번에는 노론이 소론을 몰살시켰다.

 당시 조정 안 세력 균형은 노론이 우세했으나 영조의 절묘한 탕평책으로 소론 세력도 무시 못했다. 이런 판국에서 세자는 부왕을 용상에 등극시킨 노론 측을 철없이 매질한 것이다. 노론 대신들은 자파 정권 유지를 위해서는 일찌감치 세자를 견제하는 게 상책이라고 중론을 모았다. 노론은 영조의 가장 큰 열등감인 적통대군 탄출을 자극했다. 이런 연유로 66세의 영조가 52세나 어린 경주 김씨에게 새 장가를 가니 계비 정순왕후(1745~1805)다. 당시 열다섯 살이었던 계비는 노론 중추 세력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사도세자보다 열 살 아래였다.

 젊은 계모를 모시게 된 사도세자의 정신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순간 발작과 착란 증세가 심해졌고 궁녀를 목 베어 죽이는가 하면 여승을 몰래 입궁시켜 희롱까지 했다. 영조 37년(1761)에는 평안도 관찰사 정희량의 계교에 말려 비밀리에 관서지방을 유람하며 여색에도 빠졌다. 이 모든 비행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려는 김한구·홍계희·윤급 등의 음모로 계비에게 전달됐고, 정순왕후는 더욱 부풀려 영조에게 고했다. 이럴 즈음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오점 10여 조목을 들어 영조에게 상주(上奏)했다. 여기에 폐숙의 문씨와 그 오라버니 문성국도 가세했다. 대로한 영조가 나경언을 목 베고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내린 뒤 자결할 것을 명했다. 영조 38년(1762) 세자 나이 스물 여덟 살이었다.

 세자는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엎드린 채 고두배를 하며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자진을 거부하자 영조는 “소주방에 있는 쌀 담는 궤를 가져오라”고 엄명을 내렸다. 열한 살의 세손(정조)이 할바마마 곤룡포를 붙잡고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간청했으나 “나가라”는 불호령만 받았다. 세자는 순순히 어명을 받으면 부왕의 진노가 풀릴까 하는 심정으로 뒤주 속에 들어갔다. 영조는 서둘러 대못을 치게 하고 편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버님, 아버님! 소자가 잘못하였사오니 빛을 보게 해 주소서. 이제는 아바마마가 하랍시는 대로 하고 글도 잘 읽으며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부디 이리 마소서.”

 8일째 되던 날 기척이 없어 뒤주 속을 열어 보니 세자는 쪼그리고 앉은 채로 죽어 있었다. 가장 먼저 세자 주검을 확인한 영조가 망연자실했다. 세자가 죽은 뒤 양주 배봉산에서 장사 지내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영우원(永祐園)으로 부르도록 했다. 그리고는 세손(정조)을 이복 큰아버지 되는 효장세자 앞으로 입양시켜 대통을 이었다. 그러나 영조가 승하한 뒤 정조는 임금으로 등극하며 첫 옥음을 내렸다.

 “짐은 효장세자 아들이 아니고 사도세자 아들임을 분명히 하노라.”

 그리고는 정조 1년(1776)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어머니 홍씨 궁호를 혜빈에서 혜경(惠慶)으로 추상했다. 정조 13년(1789) 영우원을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1 화산 기슭으로 천장하며 현륭원(顯隆園·사적 제206호)이라 고친 뒤 근처의 용주사를 크게 중창해 원찰로 삼았다.

 이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고종황제 광무 3년(1899) 10월 장조(莊祖)대왕과 헌경왕후로 추존된 뒤 같은 해 11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와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추상하고 능호는 융릉(隆陵)으로 격상됐다. 비록 왕위에는 못 올랐지만 정조 이후 조선 임금 모두가 사도세자 혈손이란 점에서 후기 왕실사에 장조의황제는 자리매김이 큰 추존왕이다.

 계좌정향(서로 15도 기운 남향)의 융릉은 정조의 효심을 확인할 수 있는 화려한 상설을 갖추고 있다. 세자 신분의 묘인데도 병풍석을 설치하고 무인석까지 세웠다. 정조는 융릉 앞 정자각을 세우며 어명을 내렸다.

 “능침 앞 좌향을 피해 정자각은 우측에 세우도록 하라. 뒤주 속 암흑에서 죽어 간 아버지 묘 문까지 막아 답답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능침을 조영하던 대소신료 모두가 대성통곡했다. 이래서 융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능침 정면과 비껴 서 있다.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