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에 민감한 新중년]
대부분 선생님 호칭 좋아하고 형님·누님으로 불러달라기도
시니어 친목 카페에선 서로 닉네임으로만 불러
김석동(60) 전 금융위원장은 지난 4월 쌍둥이 손주를 봤다. 김 전 위원장은 작년 여름 며느리 임신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내 자식을 가졌을 때와는 다른 '희열(喜悅)'이었다. 며느리의 출산 직후까지만 해도 김 전 위원장은 쌍둥이 손주를 품에 안아 들고 연신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이분이 네 할아버지야."
김 전 위원장은 며느리의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할아버지지?' 손주를 본 기쁨과 '할아버지' 그룹에 진입했다는 씁쓸함이 찜찜하게 교차했다. 김 전 위원장은 9일 "내가 손주를 봤지만, 세대 구분상 할아버지일 뿐"이라며 "난 아직도 쌩쌩한 청·장년이라고 생각한다. 난 앞으로도 계속 일할 사람이고, 할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할머니·할아버지' 호칭이 부담스러운 신중년은 김 전 위원장만이 아니다. '할머니·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소리가 듣기 싫은 신중년은 인터넷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회원 수 1만9000명이 넘는 '시니어 친목' 인터넷 카페 운영자인 김경자(69)씨는 카페에서 사귄 친구들 사이에서 카페 닉네임(nickname·별명)인 '민들레'로 불린다.
56세(1957년생) 이상인 사람만 가입이 가능한 이 카페에서는 회원끼리 서로 이름이나 나이를 묻지 않는 걸 철칙으로 삼는다. 회원들은 서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디에 사는지도 묻지 않는다. 김씨도 친한 카페 친구인 라일락(74)·해바라기(69)·예심(67)·북두칠성(70)님 등과 친하지만, 이들의 실명은 알지 못한다. 친구들의 '띠'로 나이 정도만 짐작할 뿐이다. 이들이 이름·나이에 집착하지 않는 '쿨'한 신중년이 된 결정적 계기는 '할머니·할아버지'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다. 김씨는 "회원들끼리 정모(정기 모임) 할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할머니' 소리를 자주 듣는다.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까지는 기분이 좋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지만 40~50대가 할머니라고 하면 속으로 '내가 왜 너희 할머니야'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다른 '신중년' 카페 회원 이모(68)씨는 "밖에서는 다들 할아버지라고 부르니까 '내가 노인이구나'란 생각에 속상할 때가 많은데 카페에서는 나를 닉네임으로 불러주니 '젊어진 것 같고, 아직 죽지 않았구나'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할머니·할아버지'란 호칭에 상처받는 신중년은 인터넷상에서 '닉네임'을 써가며 활동하는 신중년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7월 약수노인종합복지관 '사랑방'에서 만난 신중년들은 이구동성으로 "젊은 사람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나는 노인이구나'란 사실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중부고령자취업알선센터 손석범 팀장은 "일자리를 구하러 오는 어르신들을 '할머니'나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가 혼난 적이 여러 번 있다"며 "어르신 대부분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하시고 일부 어르신은 '형님'이나 '누님'이라고 불러달라고 하신다"고 말했다.
[경제에 활기 불어넣을 6075]
평균 73세까지 노동 원해… "2~3년 아닌 20년 일자리 찾아"
대부분 보람·적성 중시… 급여 중요시하는 사람은 6%뿐
저출산으로 생산인구 감소하는데 新중년 노동이 대안
"맞벌이 부부들이 출근한 사이에 '베이비시터'가 되는 건 어때요?" "주말마다 순번을 짜서 관악산·청계산에서 환경 지킴이 운동을 해보는 건요?"
지난 7월 29일 경기도 과천의 한 카페. 60·70대 남녀 9명이 둘러앉아 토론이 한창이다. 전직 은행원·공기업 직원·대기업 연구원, 시인과 주부…. 나름대로 한 가닥 하던 이들의 모임 이름은 '시니어(Senior)인재개발아카데미'.
"2~3년 더 일해보려고 했다면 좋은 자리 많았지요. 그런데 저는 앞으로 20년은 내다보고 싶었습니다." 지난 2009년 대구 식약청장을 끝으로 공무원 생활을 마친 박수천(63)씨의 얘기다.
◇"앞으로 30년 살 텐데 2~3년 문제 아냐"
박수천씨는 은퇴 당시 '연봉 2억원 이상에 기사 딸린 차량도 지원하겠다'는 민간 업체들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더 오랜 기간 활동하는 길을 택하기 위해서였다. 박씨는 "앞으로 30년은 더 살 텐데 2~3년이 문제냐는 생각에서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는 3년째 숭실대와 서울사이버대에서 '고령 소비자 타깃 비즈니스'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뒷산을 1시간 20분가량 걷고 컴퓨터·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를 활용하면서 50대 때 못지않은 활기찬 삶을 살고 있다.
-
- 박수천(63·사진 가운데 선 사람)씨와 회원들이 지난 7월 29일 경기도 과천의 한 카페에서 만나 ‘시니어 인재개발 아카데미’ 모임을 하고 있다. /이덕훈 기자
1938~1953년 태어난 신중년들은 대부분 정년을 마친 나이에도 일하고, 봉사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충만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60세 이상의 경제 활동 참가율은 1990년 35.6%에서 2012년 38.4%로 20여년 만에 8%가 신장됐다. 현재 추세로는 25~ 49세 생산 인구가 2010년 2042만명에서 2060년 1069만명으로 50년 만에 반 토막 날 전망인 점을 감안하면 근로 의욕을 가진 신중년의 출현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 해결에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평가다.
서울대 김태유 교수는 "신중년들은 성장 시대를 겪어서인지 근로에 아주 긍정적인 세대"라면서 "일의 보람이나 의미만 찾을 수 있다면 아주 적극적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중장년 구직자의 스펙 상승"
요즘 중장년 구직자들의 상당수는 '고(高)학력, 다(多)경력'의 스펙으로 고용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헤드헌팅 업체 시니어앤파트너즈 이금자 대표는 "요즘 구직하는 신중년들은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과 공기업, 다국적기업에서 임원을 지낸 경력으로 중견·중소기업에 취업하려는 경우가 많다"며 "연봉이나 직위는 불문하고 '봉사할 수 있게만 해달라'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지방대 총장 출신인 고영호(72)씨도 지난달 헤드헌팅 업체에 자신의 이력서와 함께 "보수·직위 등은 전혀 개의치 않겠습니다. 오로지 저의 마지막 열정과 꿈을 달성할 수 있다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업이나 봉사 또는 해외 봉사로 일할 기회가 있을까요?"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GE에너지에서 아시아태평양 조달 담당 전무를 지낸 이영기(60)씨는 최근 2년간 다닌 국내 대기업을 그만두고 중소기업 재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씨는 "내가 가진 경험을 나누고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족하다"고 했다.
☞新중년(만 60~75세)
최근 체력과 지력(知力), 사회적 측면에서 새로운 60대 이상 연령층이 등장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100세 시대'를 맞아, 인생 후반 50년의 절반 지점인 75세까지는 활동기로 봐야 한다고 분석한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중장기 정책과제 보고서를 통해 정책 대상 고령자 기준 나이를 70~75세 이상으로 높이자는 의견을 내놓은 바 있다.
'특별기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6075 新중년] 보수성향 강한 新중년, 朴대통령의 주력 지지층 (0) | 2014.02.04 |
---|---|
[6075 新중년] [1] 日帝시대, 6·25 전후 태어나 IMF때 경제 무대 퇴장 "100세 시대 노후 위해 '평생근로' 해야하는 첫 세대" (0) | 2014.02.04 |
[6075 新중년] 60代 이상, 2017 대선 땐 유권자 4명 중 1명꼴 (0) | 2014.02.04 |
60대 초반, 윗몸일으키기 1분에 21번… 20년전 40대 후반과 비슷 (0) | 2014.02.04 |
<5>사교육비 경조사비 없고… 새것 안 사고 미장원도 안 가 (0) | 2013.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