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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사교육비 경조사비 없고… 새것 안 사고 미장원도 안 가

惟石정순삼 2013. 8. 21. 10:43

[미 중산층 현장보고서 아메리칸 드림은 없다]

<5>사교육비 경조사비 없고… 새것 안 사고 미장원도 안 가

김광기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보스턴대 사회학 박사

미 캘리포니아 주 맨티카의 한 주민이 주택 압류에 앞서 푼돈이라도 건지기 위해 쓰던 물건을 헐값에 내놓는 차고세일을 열었다. 사진 출처 뉴욕타임스


이제까지 필자는 구체적인 자료들을 통해 미국 중산층의 쇠락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왔다. 그렇다면 소득이 갑자기 정체 내지는 감소하고 있는 그들은 변화된 환경에서 어떻게 순응하며 살아갈까.

한국 역시 빠르게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지만 미 중산층의 삶을 들여다보면 한국과는 분명히 다른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어떤 면에선 좀 더 실용적이라 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우선 미 중산층의 경우 우리와는 달리 자녀 교육비에 뭉텅이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즉 자녀 과외비와 참고서비 등의 사교육비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비싼 사립학교에 아이들을 보낸 경우는 다르고 요즘에는 사교육비를 쓰는 이가 조금 늘었다고 하지만 미국의 일반 중산층과 서민들은 사교육의 필요성은커녕 그것에 대한 개념 자체가 아예 없다.

아이들의 예체능 레슨비에 돈을 쓰는 사람도 거의 없다. 미국 공립학교에서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것을 칠 수 있는 아이들은 정말 극소수에 해당한다. “너무 아이들 교육에 무관심한 것 아니냐”고 훈수를 둘라 치면 왜 남의 삶에 간섭하느냐는 반응이 당장 나온다. 하기야 한국은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사교육비를 쓰더라도 기껏해야 문제풀이 기계형 인간이나 공장형 예능인만 양산하고 있는 마당이니 할 말은 없다.

미국 사람들은 부모와 자녀의 삶은 별개라는 생각이 강하다. 그 어떤 희생을 감내하고서라도 자식에게 ‘올인’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미국인에겐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막대한 목돈이 들어가는 대학 등록금도 부모가 대는 일은 중산층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경조사비가 없다는 점도 중산층의 생활 부담을 덜어주는 측면이 있다. 한국인이 한 주가 멀다 하고 날아오는 각종 경조사 영수증(?)에 걱정부터 앞선다면 미국인에겐 그런 걱정거리란 게 아예 없다. 이들은 혼사나 초상에 우리처럼 돈으로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내는 풍습이 없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간단한 선물이나 진심 어린 위로가 전부다. 우리의 경조사비 풍습은 품앗이나 보험 성격도 강하지만 어떤 점에선 과시문화, 남에게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른바 체면문화와 허례허식이라는 요인이 큰 것 아닌가.

미국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겉모습을 보면 어떤 면에선 우리보다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엔 학부모들 등골 빼는 이른바 ‘등골브레이커’(명품 옷)가 없다. 간혹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옷들이 있지만 아이들이나 부모들 모두 유행에 크게 개의치 않을뿐더러 오히려 남들과 같은 옷을 입는 것을 계면쩍게 생각한다. ‘남이 하니 나도’ 같은 집단적 성향은 보기 힘들다.

필자가 유학하던 당시 한 대학교수는 집에서 손수 거울을 보고 머리를 잘랐다. 자녀들 머리도 잘라준다고 했다. 미장원이나 이발소 출입도 별로 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은 중산층의 삶을 그런대로 견딜 만하게 만들어 준다.

골프를 좋아하지도 잘 치지도 못하는 필자가 얼마 전 미국에 머물면서 지인을 따라 골프장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우연히 합류한 일행의 골프채와 가방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70대 정도로 보이는 백인 남성의 것이 족히 50년은 됐을 법한 매우 낡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남성이 기가 죽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눈총을 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골프채가 오래됐건 말건 중요한 것은 쳐서 공이 잘 날아가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런 실용주의적 생활태도는 중고품에 대한 남다른 애착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미국에는 쓸모없어진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있다가 날을 잡아 사고파는 ‘무빙세일’ ‘차고세일’이 일상화돼 있다. 남이 쓰던 것이라도 내가 지금 당장 필요하고 쓸 만하면 오케이라는 생각이다. 요즘은 아예 중고품만 모아 싸게 파는 ‘굿윌’이나 ‘밸류빌리지’ 같은 이른바 ‘검약상점(thrift shop)’이 성행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직거래하는 ‘크레이그스리스트’(craigslist.org)도 인기를 끌고 있다. 저렇게 낡은 것을 누가 사갈까, 거저 줘도 안 가져갈 것 같은 물건들이 며칠 지나 누군가에게 팔리는 것을 보면 불필요하다고 버리려던 물건들이 누군가에겐 소용 있겠거니 하는 생각에 쉽게 버리지 못하게 된다.

미국인의 중고품 사랑은 넓은 나라에서 물리적인 이동이 잦은 문화의 산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잘 차려놓고 산다한들 어느 순간 그대로 남겨놓고 떠나게 되는 날이 오더라는 체험적 인식이 ‘새것은 무조건 좋다’는 생각을 버리게 한 것이다. 좀 더 포장해서 말하면 ‘인생 자체가 정처 없는 나그네 삶’이라는 인식을 많은 미국인이 하고 있기 때문에 중고품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쨌든 지금 미국인들은 뭉텅이로 들어가는 돈부터 자잘한 경비까지 한푼 한푼 절약하며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경기침체 이전에도 이미 그들의 생활에는 실용주의 유전자가 있긴 했지만 막상 불황이 닥치자 이 유전자가 발군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 서민들은 지금 그렇게 길러진 면역력의 강단으로 긴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김광기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보스턴대 사회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