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극 등에서 "종묘사직을 보존하소서"라는 말을 많이 듣게되는데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정확한 뜻을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현장을 방문해 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 생각되어 종묘와 사직공원을 방문해 보기로 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첫 사업으로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
즉 경복궁의 왼쪽에는 종묘(宗廟)를 짓고 오른쪽에는 사직단(社稷壇)을 지어 경복궁을 중앙으로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종묘(宗廟)는 왕의 선조들을 모시는 곳으로 남성과 하늘을 상징하고, 사직(社稷)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서 여성과 땅, 즉 음을 상징한다.
한양천도를 설계한 정도전의 "좌묘우사(左廟右社)"와 "음양(陰陽)"의 원칙에 의거한 것이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이다.
종묘(宗廟)의 묘는 무덤을 뜻하는 묘(墓)가 아니라 사당을 뜻하는 묘(廟)이다.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으뜸이 되는 사당. 즉 왕과 왕비들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흔히 말하는 왕들의 무덤은 뒤에 릉(陵)을 붙여 표시하고 있다.
56,000여 평의 규모를 자랑하는 종묘는 제사 준비에 사용되는 건물과
제사를 직접 지내는 건물로 구분된다.
종묘는 태조 3년 (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9월에 완공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셔왔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正殿)(국보 제227호)은 총 19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발이 걸려 있는
한 칸마다 신주가 모셔져 있다. 정전은 왕조가 계속 이어짐에 따라
광해군 11칸, 영조 4칸, 헌종 때 4칸을 증축하여 왔으며,
이것을 일반인들이 구별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서쪽에 초기에 지었던 정전의 기둥이
배흘림 기둥이라면 동쪽에 조선 후기에 지은 건물의 기둥은 민흘림 기둥이라고 한다.
왕이 되었다고 해서 다 정전에 모셔지는 것은 아니었고 공덕을 따져 정전에 남을지
영녕전으로 옮겨질지 결정되었다고 한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된 군주이기 때문에 종묘에 신주가 모셔져 있지 않고
노산군이였던 단종은 숙종 때 추존되면서 영녕전에 들어왔다고 한다.
종묘는 건물들 뿐 아니라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이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종묘제례악은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1호이기도 하다.
유교의 중심인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의 제례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지정된 이유는 중국과 달리
왕조가 멸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제사를 전통방식에 따라 모시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에는 5월 첫째주 일요일에 종묘제례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종묘제레의 상주는 조선이씨 왕조의 장자가 진행하여야 하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1970년에 타계하고, 영친왕의 아들인 이구는 미국유학중 미국인과 결혼한 후에
귀국후에 건축관련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나 일본으로 도피중 일본의 한 호텔에서 사망하였다.
따라서 현재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고종황제의 5황태자 의친왕의 9남 이갑의 장남인
이원을 황세손의 계승손으로 지명하여 현재 시행하고 있는 5대 제향의 상주를 맡기고 있다.
종묘에도 일반 궁궐처럼 삼도(三道)가 있는데 궁궐의 삼도와는 의미가 다르다.
일반 궁궐의 삼도는 가운데 길은 임금만이 걷고 양쪽길은 신하들이 이용하는 길이라면
종묘의 가운데 길은 신도로서 신령만이 걷는 길이며, 양쪽길은 임금과 세자가 이동하는 길이다.
따라서 종묘에서는 신도(神道)로 일반 관광객들이 걷지말라고 안내판을 비치해 두고 있다.
종묘의 정문인 외삼문을 지나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보이는 연못이 지당(池塘)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세상의 모습을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난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말해 납작한 사방형의 땅위에 반구의 형태로 하늘이 덮혀있는 모양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비원이나 궁궐의 연못들과 같이 이곳도 네모난 모양으로 연못을 만들었고 가운데 떠있는
섬모양도 둥근모양을 가지고 있다. 통상적으로 연못가운데 있는 섬에는 소나무를 많이 심는데
이곳은 제사지내는 곳이라 그런지 향나무를 심어 놓은 것 같다.
종묘에서 신위(神位)를 모시고 있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인데, 옛말에 신주단지
모시듯이 한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그만큼 신위를 정성껏 모셨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 외침이 있을 때는 제일 먼저 신위를 단지안에 넣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였으며, 잠 잘 때에도 신주단지는 품안에서 내려놓지 않았다고 한다.
재궁은 정전과 영녕전으로 가기 전에 왕과 세자가 목욕재계하며 제사를 준비하기 위한 공간이다.
때문에 재궁에서 정전으로 향하는 삼로에는 신로가 없고 궁궐과 마찬가지로 왕이 가운데 길을 걷는다.
조선은 정전에서 1년에 다섯 번(계절과 음력 12월)에 걸쳐 정기적인 제사를 지내고
영녕전에서는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종묘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기 때문에 단청이나 건물들이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고 단순하다.
그래서 더욱 건물들이 위엄이 있고 기품있는 모습을 자아내고 있다.
영녕전(永寧殿)(국보 제821호)은 정전의 신위를 옮겨모시기 위해 1421년에 새로 지은 별묘로
건물의 이름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영녕전의 신실은 정전의 구성과 차이는 없으나 부재의 크기가 정전보다 약간 작고
전체 건물의 크기도 정전보다 작다.
영녕전은 가운데 4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낮은 건물들로 이루어져있어 정전과는 사뭇 다르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신 자리이고
양쪽에는 정전에서 옮겨진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의민황태자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국왕과 왕비는 죽은 후에 그 신주가 종묘에 모셔진다.
그러나 영원히 종묘에 모셔진 것은 아니었다. 왕의 공덕을 평가한 뒤 왕의 공덕이 크면
옮기지 않는 신주인 불천지주(不遷之主)가 되기도 하였지만 정치적 변고에 따라 이들의 신주가
종묘에서 내쳐지기도 하였고, 상당한 기간동안 숱한 논쟁을 거친후에야 복위되어 종묘에
다시 돌아오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아울러 왕으로서의 재직기간과 공덕이 적은 왕들을
영녕전에 모심에 따라 누구를 영녕전에 모실 것인가도 커다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광해군처럼 반정에 의해 쫓겨 난 왕은 신위가 종묘에 신주가 모셔지지 않았고,
단종은 왕에서 쫓겨나고 260년이 지나서야 정종이라는 이름으로 모셔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세자와 조선의 마지막 황세자인 영친왕도 영녕전에 모셔져 있다.
정전이나 영녕전에 출입하는 문은 2개가 있는데 왕과 세자가 출입하는 동문은 3칸 대문이고,
신하들이나 악공들이 출입하는 서문은 2칸 대문으로 건립되어 있다.
사직단은 조선시대에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태조는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고려의 제도에 따라 1395년(태조 4년)에 경복궁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社稷壇)을 설치하였다.
사직단 입구 도로변에 있는 사직단 정문은 보물 제 17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이다.
사직단은 홍살문이 설치된 두겹의 담장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는데
동쪽에는 사단(社壇)이 서쪽에는 직단(稷壇)이 있다.
두단의 모습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설에 따라
한변이 7.65m인 정사각형이고, 두단의 높이는 약 1m 정도이다.
사직단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의 주요 도시에도 설치되어 있는데
이중 서울에 설치되어 있는 사직단이 규모가 가장 크다.
서울과 지방에서 왕과 수령이 사직단에 제사를 올렸는데, 이는 농업이 근본이었던
전통사회에서는 토지와 곡식의 신을 중요하게 섬겼기 때문이다.
사직대제는 매년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날 밤에 거행되어 왔었는데,
1908년(순종 2년) 일제의 강압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당시 복원한 이래 해마다 개천절에 서울 사직단(사적 제121호)에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大同宗約院) 주관으로 매년 9~10월경에 봉행해 오고 있다.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직단이 사적으로 지정되고 경성부로 이관되었다.
경성부는 조선 왕조의 성지로 잡인이 근접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일제는 1897년 고종 황제가 사직단 정문(보물 제177호)을 태사(太社)·태직(太稷)이라
높여 부르게 했던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이곳에 순환도로· 정자· 벤치 등을
설치해 1924년 5월부터 공원화하였다.
이어서 1940년 3월에 정식으로 서울의 도시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 서울시에서 사직단을 새롭게 단장·복원하였다.
신사임당과 이율곡 모자의 동상과 각종 공원시설과 어린이 놀이터 등이 있다.
사직공원 내에는 단군성전, 시립종로도서관 등이 있으며, 매년 전국 규모의 활쏘기 대회가
열리는 황학정이 유명하다. 황학정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5호로 고종 광무 2년(1898년)
어명에 의하여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었던 것을 1922년에 현위치로 옮긴 것이다.
종묘광장 공원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쉼터가 되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는 모르지만
종로 3가에 있는 탑골공원(옛 파고다공원)에서 이리로 옮겨 온 것 같다.
종묘는 문화재 보존을 위해 1회 300명 단위로 문화재해설사를 대동하여 단체관람 하여야 한다.
시간대 별로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으로 관람을 안내하는 만큼
사전에 종묘홈피에서 한국어 관람시간을 알아보고 가는 것이 좋다.
시간나면 한번쯤은 종묘· 사직공원을 다녀오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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