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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하동이야기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①~③ 박춘석·이미자와 트리오 ‘흑산도 아가씨’

惟石정순삼 2012. 4. 18. 23:55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패티김을 보는 길옥윤 눈은 점차 뜨거워지고…
① 길옥윤-패티김 ‘서울의 찬가’

1967년 베트남 파견 비둘기부대 장병 위문공연 중인 길옥윤-패티김 부부.
“나는 일본 생활을 끝냈습니다. 이제 우리 서울에 살려고 왔습니다. 세계 어디로 가더라도 우리나라 서울만큼 살기 좋은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름다운 서울….” 그랬다. 길옥윤은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에서 살았다. 연주활동은 물론 작곡도 하면서…. 서울은 아름다운 곳, 살기 좋은 곳이다. 오랜 역사와 함께 문화가 녹아 있는 고대도시이면서 현대도시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푸른 향기가 감도는 남한산성이며 북한산성, 이끼 서린 옛 성터의 돌담길은 또 어떠한가. 남산을 바라보며 휘도는 한강의 경관은 절경 중의 절경. 누가 서울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1965년 길옥윤이 돌아오던 해. 미국에서 가수생활을 하던 패티김도 잠시 귀국한다. 당시 모친이 위독했기 때문. 두 사람, 패티김과 길옥윤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길옥윤 음악에 패티김 노래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감동도 이런 감동이 또 어디 있겠는가. 부르는 노래마다 국민 공감대를 얻었다. 사랑을 받았다. 환상의 콤비 탄생.

패티김을 보는 길옥윤의 시선은 점차 뜨거워진다. 가수의 가창력에 빠지게 되고, 모든 노래를 소화해내는 재능에 매료된다. 패티김 또한 길옥윤과 공연을 자주 하면서 색소폰 연주에 끌리게 되고…. 고등학교 시절, 창을 배워 고음에서 소리를 내지르면 이게 바로 패티김식 창법. 성량이 누구보다 풍부한 이 가수는 재즈, 칸초네, 라틴노래도 불렀지만, 세계적인 가수 패티 페이지의 노래를 듣고서는 패티김으로 이름을 바꾼다.

“‘한오백년’, ‘칠갑산’ 같은 노래는 부를 수 있겠지만, 트로트는 안돼요.” 그러나, 필자가 작사한 ‘가슴아프게’ ‘물레방아 도는데’를 잘 불렀다. 편곡을 달리하긴 했지만…. 이 시대의 최고 절창 가수와 인기 작곡가의 열애는 길옥윤의 구애로 시작된다. 4월이면 미국으로 다시 떠나야 할 연인에게 바치는 길옥윤의 러브송은 참으로 열정적이면서도 애절했다.

사랑이라면 너무 무정해. “사랑한다면 가지를 마라. 날이 갈수록 깊이 정들고….” 얼마나 사모했으면 전화로 불러주는 길옥윤의 노래가 떨리고 흠뻑 젖었을까. 이런 노골적인 사랑 고백에 이들은 부부 연을 맺는다.

‘좋아해 좋아해 당신을 좋아해/저 하늘에 태양이 돌고 있는 한/당신을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당신을 좋아해/밤하늘에 별들이 반짝이는 한/당신을 좋아해/그대 없이는 못살아/나 혼자서 못살아/헤어져서는 못살아/떠나가면 못살아’

길옥윤 작사·작곡/패티김의 노래 ‘그대 없이는 못살아’는 이들 부부애가 절정에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예인으로서 패티김은 오만하고 거만해 보여도 가정에서는 모범적인 현모양처. 길옥윤과는 정반대 성격이었다. 패티김이 계획을 세우면 그대로 실천하는 스타일인 데 비해, 길옥윤은 두주불사(斗酒不辭)형. 마셨다 하면 만취해 업혀서 들어오는 게 다반사였다. 1972년에 헤어지고 만 두 사람. 그러나 헤어지면서도 약속을 한다. 1년에 한 번씩은 앨범을 내자고….

노래시인 길옥윤의 사랑은 일편단심. 그는 죽으면서까지 연인 패티김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한때 일본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길옥윤은 1995년 이른 봄. 서울 길동 성모병원에서 타계한다. 짧은 생애. 하지만 그가 서울에 살면서 작사·작곡한 서울의 찬가는 빛났다. 그가 눈을 감은 그 해 가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공원에서는 ‘서울의 찬가’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1995년 오후 4시쯤이었다.

주인공은 안보였지만, 서울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조촐하게 치러졌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그리워라 내 사랑아/내 곁을 떠나지 마오/처음 만나서 사랑을 맺은/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아름다운 서울에서/서울에서 살으렵니다-//봄이 또 오고, 여름이 가고/낙엽은 지고, 눈보라 쳐도/변함없는 내 사랑아/내 곁을 떠나지 마오/헤어져 멀리 있다 하여도/내 품에 돌아오라, 그대여/아름다운 서울에서/서울에서 살으렵니다.’

길옥윤 선생을 떠나보내면서 정두수 삼가 올리는 글입니다.

‘길옥윤 선생님./저 밤하늘에 이제는 색소폰을 불지 마십시오./얼마나 힘들었습니까/타국살이…/일본 도쿄의 술집에서/생존을 위한 연주를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당신은 아름다운 사람, 색소폰 연주자 이전의 참 멋있는 노래 시인./‘서울의 찬가’와 ‘이별’은/지금도 우리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편히 쉬십시오, 길옥윤 선생님.’
<4월4일 문화일보>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감성의 神 남인수 - 가요계의 紳士 현인 ‘서바이벌 게임’

(2) 남인수-현인, 노래대결 빅쇼 전설이 되다
남진-나훈아, 김건모-신승훈, 그리고 원더걸스-소녀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라이벌이 있다. 라이벌로 인해 가요도 진화한다. 프로가수들의 라이벌전을 확대한 것이 최근 유행하는 ‘위대한 탄생’‘나는 가수다’‘불후의 명곡’ 같은 서바이벌 가요프로다.

‘낙화유수’는 1942년 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 남인수 노래로 탄생했다. 인생의 정한(情恨)을 마치 자신의 운명처럼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았을까. 당시 한국 최고의 절창 남인수(그림 위)는 이 노래를 참으로 애틋하게 불러 다시 한번 정상의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유수(流水) 같은 세월을 무엇으로 막겠는가. 정상에 오르면 누구나 내려오게 마련이다.

‘신라의 달밤’ ‘서울 야곡’ ‘비 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 금순아’ 등 불후의 명곡으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떠오르는 태양’ 현인(아래). 오토바이에 엔진이 걸리면 오토바이는 달리게 된다. 현인이 그랬다. 그의 인기는 멈출 줄 몰랐다. 최전성기의 현인은 남인수와 함께 당시 가요계 양대 산맥을 이룬다.

“남인수와 현인, 두 사람이 한무대에서 노래 대결을 한다면 누가 승산이 있을까?” “그야 해봐야 알겠지.”

팬들 사이에 여론이 들끓자 두 가수를 한무대에 올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빗발치는 팬들의 요구 때문이었을까. 1959년 두 사람은 한무대에 오른다.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인천 등지에서 화려한 경연이 펼쳐졌다. 그해 봄날 부산극장, 남인수 응원단장에는 막둥이 구봉서, 현인의 응원단장에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나섰다. 지휘는 작곡가 박시춘.

“결국 두 사람이 붙게 됐군. 누가 더 노래를 잘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볼 만한 구경거리야.” 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표부터 서둘러 예매하기 시작했다. 공연 며칠 전부터 입장권이 매진됐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극장 앞은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무대 오른쪽 좌석은 남인수 팬, 왼쪽 좌석은 현인 팬들로 좌석은 둘로 갈렸다. 막이 오르자 남인수는 오른쪽 무대 마이크 앞, 현인은 왼쪽 마이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양쪽 응원단장들의 열띤 응원 속에 도전자 현인이 먼저 노래를 불렀다.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이 장기인 현인이 ‘신라의 달밤’으로 서곡을 장식했다. 이에 남인수는 뛰어난 가창력으로 ‘가거라 삼팔선’으로 맞대응했다. 다시 현인이 ‘비 내리는 고모령’을 부르면 남인수는 ‘청춘 고백’을, 그렇게 두 사람은 열곡씩을 주고받았다. 열광하는 팬들의 환호와 터져 나오는 박수갈채, ‘앙코르! 앙코르!’로 무대는 후끈 달아올랐다. 객석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도전자 현인은 챔피언 남인수를 새로운 창법으로 거세게 몰아쳤다. 챔피언은 정교한 세련미와 뛰어난 가창력으로 무대를 압도해나갔다. 막상막하로 치닫던 두 사람의 노래대결은 남인수가 열한 번째 노래로 ‘꼬집힌 풋사랑’을 부르고 이어서 ‘낙화유수’를 부르면서 대세는 챔피언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낙화유수’를 일컬어 쇠패영락(衰敗零落)에 비유했던가. 인생무상? 세월은 덧없이 허무하다. 그렇다고 어찌 영탄만 할 수 있겠는가. 지는 꽃에도 정이 있고, 흐르는 물에도 정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풍류와 서정 또한 인생의 시가 아니겠는가. 하늘이 베푼 축복 속에서 자연과 인생은 어우러져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 강산 흘러가는 흰 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 어린 봄 나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포구로 가자.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오면은 가는 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무지개 같은 꿈을 찾아 설레는 가슴 안고 인생은 출발한다. 나루에 배를 띄워 사랑을 구가하고 청춘을 예찬한다. 이뿐만 아니라 행복도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꿈과 사랑, 그리고 행복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고뇌와 고통, 비애와 비통함이 인생살이에서는 더 길기 때문이다. 이 모든 감정을 담은 남인수의 노래는 신기에 가까웠다. 라디오가 없던 시절, 녹화를 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그 양반을 도저히 못 당하겠더란 말이야. 정말 타고난 가수야. 백년에 한 번 탄생하기 힘들다는 불세출(不世出)의 가수 말이야. 어찌나 잘 부르던지….”

1992년. ‘정두수 하동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현인 선생께서 필자에게 털어놓은 말이다. 그때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대(大)가수는 역시 어디가 달라도 다르구나! 깨끗이 승복할 줄 아는 미덕과 겸손함의 진면목을 보여준 신사 중의 신사 현인. 그 못지않게 곧고 바르게 살다 간 전설의 가수 남인수. 가요황제 이전에 훌륭한 인간적 면모가 사람을 반하게 하는 분들이었다. 둘 다 사람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한 천재가수. 두 라이벌의 빈자리는 그래서 더 크다.
<4월10일 문화일보>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흑산도 어린이 서울구경’ 기사 보고 “이번 이미자 노래 흑산도로 합시다”

③ 박춘석·이미자와 트리오 ‘흑산도 아가씨’

‘흑산도아가씨’ 앨범 재킷 사진. ‘엘레지의 여왕’으로 불리는 가수 이미자가 불러 크게 히트했다.
1965년 봄. 나는 작곡가 박춘석씨와 ‘카나리아 다방’에서 만나고 있었다. 다음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가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던 이 다방은 당시 우리가 전속작가로 소속돼 있는 지구 레코드사 초입에 있었다. 그래서인가, 가요계 인사들의 단골집이었다. 충무로와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인현동은 당시 다방과 술집이 넘쳐났다.

“가요는 시대상과 사회상을 반영하는 건데….”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정서가 아니겠습니까?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정한(情恨)에서 노래를 찾아야겠지요.”

“물론입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지금 우리들의 몫입니다.”

만나면 늘 나누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이날 우리는 석간신문을 펼치다가 순간적으로 눈길이 부딪쳤다. ‘흑산도 어린이들과 청와대 육영수 여사의 이야기’가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산도 어린이들의 꿈, 이뤄지다! 영부인 도움으로 해군 군함에 실려와 서울구경도 하고, 청와대를 방문해 학용품도 받았다.’

방학을 이용해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이들을 가로막는 건 거센 풍랑. 나중에서야 안타까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청와대는 곧바로 해군본부에 부탁해 소원이 이뤄졌다는 게 아닌가.

“이번 이미자 노래는 흑산도로 합시다. 어린이 대신에 아가씨로 해서….”

작품은 이미 잉태되다시피 했다. 집으로 돌아와 흑산도에 관한 정보를 캐기 시작했다. 흑산도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있는 섬. 노령산맥 말단의 침강으로 이루어진 섬으로 목포와는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다고 표기돼 있었다. 그러니까 ‘가거도’ 빼고는 서해안에서 가장 먼 섬이었다. 홍어, 갈치, 조기, 삼치, 도미 등이 많으며, 규사(硅砂)의 산지로도 유명한 곳. 그리고 인근 흑산군도(黑山群島)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돼 많은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이 노래시를 쓸 때만 해도 정보가 어두운 시대였다. 그래서 흑산도가 풍기는 강렬한 이미지에 매력을 갖고 작업에 들어갔다.

“검은 뫼섬 흑산도는 유배지가 아닌가.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님이던 정약전이 조선 정조 때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다. 얼마나 서럽고 외로웠으면 이 대학자는 바닷가에 나가 고기 잡는 것으로 안타까운 세월을 보내야만 했을까.”

정약전은 고기를 잡아 어종별로 분류해 ‘자산어보(玆山漁譜)’라는 역작을 남긴다. 이때 정약용도 전남 강진에 유배되어, 바다를 보며 형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귀양살이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라도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단번에 써내려갔다. 섬처녀의 그리움과 외로움을…. 올해는 정약용 탄생 250주년이라 이 노래는 더욱 뜻깊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못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흑산도 아가씨’(1절)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흘러온 나그넨가 귀양살인가/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흑산도 아가씨’(2절)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에 이미자가 부른 ‘흑산도 아가씨’는 셋을 묶는 노래의 서곡이었다. 이후 트리오는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그리움은 가슴마다’ ‘삼백리 한려수도’ ‘아네모네’ ‘황혼의 블루스’ ‘한번 준 마음인데’ ‘비에 젖은 여인’ ‘타국에서’ ‘못 잊을 당신’ ‘고향의 꿈’ ‘가을초’ ‘대답해 주세요’ 등.

작곡가 박춘석은 누구인가? 나는 그를 ‘한국의 쇼팽’이라고 서슴없이 부른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음악적 재능도 그랬지만 피아노 시인이기 때문이다.

‘별빛이 찬란하게 흐르는 밤에/외로운 철새처럼 슬픈 고독을/가슴속에 새기면서 떠나왔던 길/지금도 하염없이 가고 있는 길/아무리 멀다해도 이 길을 간다/아무리 멀다해도 이 길을 간다’(1절) ‘말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쓸쓸한 달빛처럼 가는 세월을/마음속에 새기면서 지나왔던 길/지금도 하염없이 가고 있는 길/아무리 외로워도 이 길을 간다/아무리 외로워도 이 길을 간다’(2절)

‘빛과 영광의 작곡가 박춘석 여기 잠들다’라는 묘비명과 함께 필자가 작사하고 그가 작곡해 부른 ‘이 길을 간다’는 바로 그 자신의 생애이기도 하다. 음악과 결혼하여 평생을 독신주의자로 살았던 작곡가 박춘석. 그의 노래 ‘이 길을 간다’가 말해주듯 외로움을 씹으며, 그는 이별의 나루에서 하얀 손수건을 우리에게 흔들었다.

 

<12.4.18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