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따라 삼천리> | |||||||||||||||||
③ 박춘석·이미자와 트리오 ‘흑산도 아가씨’ | |||||||||||||||||
1965년 봄. 나는 작곡가 박춘석씨와 ‘카나리아 다방’에서 만나고 있었다. 다음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가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던 이 다방은 당시 우리가 전속작가로 소속돼 있는 지구 레코드사 초입에 있었다. 그래서인가, 가요계 인사들의 단골집이었다. 충무로와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인현동은 당시 다방과 술집이 넘쳐났다. “가요는 시대상과 사회상을 반영하는 건데….”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정서가 아니겠습니까?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정한(情恨)에서 노래를 찾아야겠지요.” “물론입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 지금 우리들의 몫입니다.” 만나면 늘 나누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이날 우리는 석간신문을 펼치다가 순간적으로 눈길이 부딪쳤다. ‘흑산도 어린이들과 청와대 육영수 여사의 이야기’가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산도 어린이들의 꿈, 이뤄지다! 영부인 도움으로 해군 군함에 실려와 서울구경도 하고, 청와대를 방문해 학용품도 받았다.’ 방학을 이용해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이들을 가로막는 건 거센 풍랑. 나중에서야 안타까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청와대는 곧바로 해군본부에 부탁해 소원이 이뤄졌다는 게 아닌가. “이번 이미자 노래는 흑산도로 합시다. 어린이 대신에 아가씨로 해서….” 작품은 이미 잉태되다시피 했다. 집으로 돌아와 흑산도에 관한 정보를 캐기 시작했다. 흑산도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있는 섬. 노령산맥 말단의 침강으로 이루어진 섬으로 목포와는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다고 표기돼 있었다. 그러니까 ‘가거도’ 빼고는 서해안에서 가장 먼 섬이었다. 홍어, 갈치, 조기, 삼치, 도미 등이 많으며, 규사(硅砂)의 산지로도 유명한 곳. 그리고 인근 흑산군도(黑山群島)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돼 많은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이 노래시를 쓸 때만 해도 정보가 어두운 시대였다. 그래서 흑산도가 풍기는 강렬한 이미지에 매력을 갖고 작업에 들어갔다. “검은 뫼섬 흑산도는 유배지가 아닌가.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님이던 정약전이 조선 정조 때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다. 얼마나 서럽고 외로웠으면 이 대학자는 바닷가에 나가 고기 잡는 것으로 안타까운 세월을 보내야만 했을까.” 정약전은 고기를 잡아 어종별로 분류해 ‘자산어보(玆山漁譜)’라는 역작을 남긴다. 이때 정약용도 전남 강진에 유배되어, 바다를 보며 형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귀양살이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라도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단번에 써내려갔다. 섬처녀의 그리움과 외로움을…. 올해는 정약용 탄생 250주년이라 이 노래는 더욱 뜻깊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오는데/못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흑산도 아가씨’(1절)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흘러온 나그넨가 귀양살인가/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흑산도 아가씨’(2절)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에 이미자가 부른 ‘흑산도 아가씨’는 셋을 묶는 노래의 서곡이었다. 이후 트리오는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그리움은 가슴마다’ ‘삼백리 한려수도’ ‘아네모네’ ‘황혼의 블루스’ ‘한번 준 마음인데’ ‘비에 젖은 여인’ ‘타국에서’ ‘못 잊을 당신’ ‘고향의 꿈’ ‘가을초’ ‘대답해 주세요’ 등. 작곡가 박춘석은 누구인가? 나는 그를 ‘한국의 쇼팽’이라고 서슴없이 부른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음악적 재능도 그랬지만 피아노 시인이기 때문이다. ‘별빛이 찬란하게 흐르는 밤에/외로운 철새처럼 슬픈 고독을/가슴속에 새기면서 떠나왔던 길/지금도 하염없이 가고 있는 길/아무리 멀다해도 이 길을 간다/아무리 멀다해도 이 길을 간다’(1절) ‘말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쓸쓸한 달빛처럼 가는 세월을/마음속에 새기면서 지나왔던 길/지금도 하염없이 가고 있는 길/아무리 외로워도 이 길을 간다/아무리 외로워도 이 길을 간다’(2절) ‘빛과 영광의 작곡가 박춘석 여기 잠들다’라는 묘비명과 함께 필자가 작사하고 그가 작곡해 부른 ‘이 길을 간다’는 바로 그 자신의 생애이기도 하다. 음악과 결혼하여 평생을 독신주의자로 살았던 작곡가 박춘석. 그의 노래 ‘이 길을 간다’가 말해주듯 외로움을 씹으며, 그는 이별의 나루에서 하얀 손수건을 우리에게 흔들었다. <12.4.18 문화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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