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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하동이야기

“박춘석과 마포 설렁탕집서 술마시다 번개처럼 ‘마포종점’靈感”

惟石정순삼 2012. 4. 3. 16:52
<오랜만입니다>
“박춘석과 마포 설렁탕집서 술마시다 번개처럼 ‘마포종점’靈感”
원로 작사가·시인 정두수
정충신기자 csjung@munhwa.com

‘우리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정두수씨가 1960년대 마포종점 차고지였던 서울 마포구 지하철 5호선 마포역 앞 빌딩숲을 바라보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0여년간 도화동 마포종점에 살았던 정씨가 옛 마포종점을 회상하고 있다.

1997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 마포어린이공원에 세워진 ‘마포종점’ 노래비를 찾은 정두수씨.
10일 오후 가요 작사가 겸 시인 정두수(75·본명 정두채)씨를 서울 마포구 지하철 5호선 마포역 앞에서 만난 것은 ‘마포종점’ 노래비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빽빽히 들어선 고층건물 탓에 옛 마포종점의 흔적은 물론, 노래비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40여년간 마포에서 지낸 토박이 할머니 한 분을 길거리에서 만나 도화동 39번지 마포어린이공원을 찾았다. 마포토박이 노승환 당시 마포구청장이 1997년 세운 노래비가 반겨주었다.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은방울자매 노래’.

노랫말엔 마포종점에서 바라본 한강을 낀 마포의 야경이 눈에 어른거린다. 서민의 애환과 정취를 실어나르던 전차가 사라진다는 아쉬움과 함께 연인의 슬픈 사랑이야기도 전해온다는 ‘마포종점’은 근대화 문명에 밀려난 전차 고별 노래다. 이 노래로 인해 마포는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매년 10월이면 이곳에서 마포종점 노래자랑대회가 열린다. 우리 일행을 안내해준 할머니가 “은방울 자매 중 언니 대신 동생이 대회에 참가한다”고 하자, 정씨가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즉각 수정했다. “큰방울인 박애경씨는 작고했고 작은방울 김형미씨는 캐나다에 이민가 있어. 노래대회에 오는 가수 오숙자씨는 은방울자매와는 아무 관계가 없지.”

정씨는 “알려진 것과 달리 은방을 자매와 저 셋 모두 동갑”이라며 “박애경씨는 키가 커서 큰방울로 불렸다”고 했다. 그의 발길은 자연스레, 그의 아지트 마포 설렁탕집으로 향했다.

함께 찾아간 곳은 도화동 큰길 건너 60년 전통의 용강동 ‘마포옥’ 설렁탕집. 그가 찾던 옛 허름한 2층 기와집은 흔적도 없이 4층 콘크리트 건물로, 이름도 ‘한우양지설렁탕’ 현대식 간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포는 당시 변두리였는데도 전차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니까 서민들이 많이 살았어. 서민들이 많다보니 옛날에는 설렁탕집이 참 많기도 했지.” 옛날 마포옥 뒤에 있던 그 많던 갈대밭도 흔적이 없었다.

“밤깊은 마포종점 갈곳없는 밤전차, 비에 젖어 너도섰고 갈곳없는 나도섰다…” ‘마포종점’ 뮤직폰이 요란하게 울리며 후배 작사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인터뷰 도중 찾아온 후배 작사가와 이날밤 그는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였다. SBS 라디오국장을 지낸 박건삼 시인이 ‘뚝배기 맛 우러나는 우리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라 칭한 ‘걸어다니는 가요 백과사전’과 함께, 도화동에 발착을 알리는 구슬픈 종소리가 들리는 마포종점,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시작했다.

“작고한 박춘석씨, 그리고 미자(이미자), 춘화(하춘화), 중락이(차중락), 남진, 나훈아, 문주란, 조용필, 이용복 등 함께한 가수들과 함께 이곳을 아지트로 삼았어. 새벽 4시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면 밤을 새운 사람들은 일제히 이 설렁탕집으로 몰려나와 얘기꽃을 피웠지. 지구레코드공사 사무실은 수도극장, 명보극장이 있던 ‘스카라계곡’에 있었고.”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들 대부분이 그의 추천을 받거나 그의 ‘노래시’를 받았다. 시를 합쳐 그의 작품은 4000여편. 국내에서 가장 많은 노랫말을 지은 그는 저작권료만으로 노후보장이 된다.

그의 입에서‘마포종점’ 창작 비화가 흘러나왔다. “당시 가난한 대학생 중에는 옥탑방에서 함께 지내는 연인들이 많았지. 남자는 공부 잘해 유학가고, 바걸(여급) 생활로 남자 공부시키며 뒷바라지하던 여자는 연인을 기다리다 처절하게 미쳤노라는 사랑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1960년대 초 젊은 연인들의 사연이 노래 배경이 됐지.” 산파조 얘기건만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니 전혀 식상하지 않았다.

“이 설렁탕집에서 박춘석씨와 소주잔을 기울이다 어느날 번개에 얻어맞은 것처럼 영감이 왔어. ‘바바바(밤깊은) 바바바바(마포종점)…’ 첫 곡조가 뇌리에 떠올랐어.”

소주잔을 기울일수록 ‘국보급 작사가’의 입에서는 가요계 비화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절친한 술친구인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차중락이 마포나루에서 함께 뱃놀이하면서 노래 한곡 달라고 내게 졸라댔어. 그의 애절한 음색에 어울리는‘종착역’을 만들었는데 취입을 준비하던 중 아깝게 요절하고 말았어. 근데 말이야, 종점·종착역·고엽 같은 애달픈 노래를 부르던 가수 중에 노래제목 같은 운명을 맞은 경우가 많아.”

-‘덕수궁 돌담길’에 얽힌 사연은.

“우마차도 다니지 않던 호젓한 정동 덕수궁 돌담길은 주말이면 밤길을 걷는 이대, 연대생 등 가난한 연인들의 아베크(데이트)거리였지. 근데 사랑과 꿈을 다지던 젊은 연인들은 결국 결혼하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었지. 돌담길은 이별의 코스였어. 어느날 제대군인이 군복을 입고 만취한 채 밤비 속에서 담벼락에 기대어 발광을 하더라고.”

한산도 작곡, 진송남이 불러 크게 히트한 ‘덕수궁 돌담길’에 얽힌 사연이다. 죄많은 인생을 탄식하며, 가슴을 쥐어짜는 애절한 탄식조 뽕짝이 대세이던 시절, 격조 높은 ‘서정시’ 노랫말의 첫등장은 대중가요의 격을 한차원 끌어올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노래로 그는 ‘지구레코드공사’의 전속 작사가 및 섭외부장이 돼 본격적으로 노랫말을 쓰기 시작한다. 박춘석-정두수 환상적 콤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정씨가 만날 당시 박춘석은 이른바 ‘금호동사건’으로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박춘석씨는 금호동사건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청산가리를 가지고 다닐 정도였어. 그가 키운 젊은 가수 금호동이 자기에게 곡을 안준다며 동성애자라고 언론에 떠들어댔기 때문이야. 그 위기를 이기는 길은 노래밖에 없다고 용기를 줬어. 그리고 1966년 함께 만든 첫 작품이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야 . 이곡이 대히트하면서 박용호, 한산도가 꽉 잡고 있던 이미자가 지구레코드로 오고, 그후 가요계 판도가 확 바뀌었지.”

바야흐로 박춘석-정두수 콤비 전성시대가 열렸고 순식간에 가요계가 평정됐다. 그가 내놓는 곡은 스타 보증수표였다. ‘흑산도 아가씨’를 시작으로 남진의 ‘가슴 아프게’,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하춘화의 ‘하동포구 아가씨’,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 패티김의 ‘나는 가야지’, 최희준의 ‘노신사’, 조용필의 ‘잊기로 했네’, 배호의 ‘내고향 남촌’, 여운의 ‘과거는 흘러갔다’등 주옥 같은 가요와 국내 첫 메들리송 들고양이의 ‘마음 약해서’와 주현미의 데뷔곡 ‘쌍쌍파티’등이 나왔다.

‘정공채(鄭孔采) 시집 있습니까’란 시집으로 시단의 큰 별이었던 고 정공채 시인과 정두수 작사가가 한 집안에서 나왔다. 문장가였던 그의 할아버지는 ‘큰 아들 공채는 공자와 같은 품성으로 살아라, 둘째 아들 두채는 두보와 같은 문장가가 되어라 하셨다’고 한다. 정씨는 시를 끄적거리며 대중가요의 가사를 막 쓰기 시작하던 23세 무렵, 조흔파의 소설 ‘얄개젼’의 주인공 두수(얄개)의 이름을 따서 정두수라는 필명을 자작했다. 6남2녀 집안, 맏형이 가난한 시인의 길을 걷자 둘째인 그는 시인의 꿈을 일단 접고 대중작사가의 길로 나섰다.

“시 1편이 200∼300원이던 시절, 노래 1편이 1500∼2000원. 월급 2만원에 작사 수당 따로 받았어.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3000∼4000원이던 시절. 히트하면 2만∼3만원의 보너스 나왔지.” 그때부터 그는 한달에 30여편의 작사를 했다. 끄적대면 가사가 마술처럼 술술 노래시가 돼 흘러나왔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말까지 정신없이 써댔다. 하지만 그는 돈 모으는 데는 재주가 없었다.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고 취할 수 있는 만큼 취하는 사람. 대한민국 하늘 아래 제일 넉넉한 자유인. 주선(酒仙) 이태백을 닮은 사람. 박건삼 시인의 표현처럼 그는 ‘파격적인 자유인’인 천진무구한 동심의 소유자다.

‘가슴아프게’ 만큼 공을 들인 작품도 드물다. 그는 이 노래를 쓰기 위해 1966년 봄, 인천 연안부두까지 차로 달렸다. 노래시가 떠오르지 않아 성화가 대단했다. 그는 안개 자욱한 부두에서 소주잔만 기울이다가 결국 돌아왔다.

“남진이란 가수가 왔는데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릴 정도로 참 미남이었지. 레코드사 사장이 거금 5만원을 주며 노랫말 좀 만들라고 통사정했어. 호주머니에 받아 넣고, 열심히 마셔댔지. 연속극에서 통통통 뱃소리가 들리길래 내가 살던 부산 광안리를 다녀오면 구상이 떠오를 텐데 너무 멀어 가까운 인천 연안부두로 달려간 거야. 봄비 속에 지독한 안개로 바다 냄새만 맡았어. 근데 돌아오는 길에 안개로 인해 작품을 쓰게 됐어. ‘저놈의 안개만 없었다면 가슴이 뻥 뚫렸을 텐데’라는 시상말이야. 공중전화로 가사를 불러줬는데 박춘석씨는 과거 송인호가 불렀지만 히트가 안된 곡에다 내 가사를 갖다붙여 편곡을 했지.”

‘당신과 나 사이에 저 안개만 없었다면/바다를 봤을텐데, 바다를 봤을텐데’ 이 원망이 시로 승화되면서 안개가 바다가 되고, 바다는 이별이 되어 ‘가슴 아프게’가 탄생한다. 나훈아의 대표곡 ‘물레방아 도는데’는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 그의 고향, 금오산 자락 마을 어귀 주교천에 징검다리와 물레방아가 있는 돌담투성이 마을 성평리 풍경을 그대로 담았다. 집안의 희망이었지만 학도병으로 끌려가 재가 되어 돌아온 동경유학생 순식(淳植)이 삼촌에 대한 애절한 사연과 함께.

그의 노래는 모든 지역 사람들로부터 두루 사랑받고 있다. 하동 군민들은 ‘물레방아 도는데’를 좋아하고, 호남분들은 ‘흑산도 아가씨’, 부산과 일본 교포사회는 ‘가슴아프게’, 서울에서는 ‘덕수궁 돌담길’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가 가장 아끼는 노래는 이미자가 “뽕짝 말고 클래식 곡도 좀 달라”고 해서 준 ‘고향의 봄’과 ‘가을초’다. 시작을 이어가던 그는 최근 가요작사를 시작으로 새로운 도전을 펼치고 있다. “가요사를 또한번 바꿀 작품을 쓰고 싶어. 마지막으로 우리 가요사를 정리하는 책도 내고 말이야.”<1월13일 문화일보>

인터뷰 = 정충신 문화부장 csju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