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40년 살아가는 법] <7> 남의 눈 의식 말고 일하자
월 80만원씩만 계속 벌어도 웬만한 연금 받는 것과 같아, 교장·CEO 출신도 궂은 일 "부끄러워하는 게 창피한 것"
은퇴 시기 늦추기 위해 눈 낮춰 미리 이직할 수도
"주문하신 세트 나왔습니다. 운전 조심하시고요, 고맙습니다."
3일 오전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한 패스트푸드점. 머리 희끗희끗한 이승화(60)씨가 자동차에 탄 손님에게 햄버거를 건네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는 '실버 알바(아르바이트)생'이다. 시급 5300원. 주 5일간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일해 한 달에 80만원 정도 번다. 원래 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일하던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우리나라에 컴퓨터 자체가 생소하던 1978년 KIST에 입사해 기업체, 병원, 군(軍)에 컴퓨터 프로그램을 설계해 주는 일을 했다. 1998년 외환위기 때 명예퇴직한 뒤 다른 은퇴자들처럼 여행하며 봉사활동하며 지내다가 지난해 10월부터 이 매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캐나다 여행 가서 전직 의사였던 백발노인이 서빙해주는 햄버거를 먹으면서 '이런 일이라면 나도 즐겁게 할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부인 엄희자(56)씨도 같은 매장에서 함께 알바로 일하고 있다.
◇월급 80만원이 국민연금 30년 가치
이씨는 "알바 하며 돈도 벌고, 번 돈으로 친구들 만나니 집에서 눈칫밥 먹지 않아도 되고, 규칙적으로 몸쓰는 일을 해 저절로 운동까지 되니 일석삼조"라고 말했다. 그는 "남들 보기 부끄러워서 일 안 한다는 사람이 제일 창피하고 바보 같다. 나이 먹고 어디든 자기를 써주는 곳이 있다는 점에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재고용의 기회가 있다면 월급이 아무리 적어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 현금흐름이 극적으로 개선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놀다가 한번 일하기로 결정하면 '자산'이 된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인적(人的) 자산(human capital)'의 가치는 0이 되기도 하고 높아지기도 한다. 이승화씨가 패스트푸드점에서 받는 월 80만원을 국민연금으로 받으려면 매달 25만원씩을 30년 이상 넣어야 했을 것이다. 25만원은 지난해 국민연금 의무가입자의 평균 납입액 17만원을 웃도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 ▲ 이승화·엄희자씨 부부가 3일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손님들에게 햄버거를 건네고 있다. 이씨는“아들 녀석이 처음엔‘왜 힘든데 거기서 일하느냐’고 반대하더니, 재밌게 일하는 모습을 본 이후로는‘무리하지 말고 하세요’라고 말한다”며 웃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나이·체면·시선을 버리니"
이종석(68)씨는 '실버 주유원'이다. 경기도 의왕의 현대 오일뱅크 주유소에서 일한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2006년 은퇴했고, 2009년부터 주유기를 손에 잡았다. 그는 "나이, 체면, 남들의 시선 세 가지를 버리니까 돈과 건강, 가정을 모두 얻을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통계청의 '2011년 가계금융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은퇴자의 평균 은퇴 연령은 60.7세인 반면, 아직 은퇴하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예상 은퇴연령은 65.5세였다. 은퇴 예비군의 바람대로라면 5년 동안 어떤 식으로든 일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강창희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장은 "정년 후에 일을 하려면 화려하고 권한 있는 일은 젊은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어떻게 보면 허드렛일에 가까운 일도 즐겁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역 때 잘나가던 은퇴자들이 모여 어찌 보면 허드렛일을 하는 사업장을 꾸리기도 한다. 지난해 말 서울 강남구청역 앞에 문을 연 '싱그로브'라는 이름의 실버 카페. 16명의 은퇴자들이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4개조로 돌아가며 하루 4시간 정도씩 일하고 한 달 50만원 정도를 받는다. 카페 주인 황경연(59)씨는 전직 건설회사 CEO이다. 지난해 8월 말 과천외국어고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류재희(61)씨는 좁은 주방에서 주먹밥·샌드위치 등을 만드는 조리 담당이다. 류씨는 "주위에서 '격(格) 떨어지게 무슨 그런 걸 하냐'는 말을 많이들 하는데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눈을 낮춰 이직하는 것도 방법
조영학(51)씨는 2010년 4월까지 LG그룹 계열사인 LG하우시스의 본부장이었다. 지난해 4월 희망퇴직한 뒤 퇴직금과 저축 3억~4억원을 털어 건축자재 쪽 사업을 하려고 10개월 동안 검토하다 생각을 접었다.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에 취직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그는 욕실자재를 만드는 직원 25명의 중소기업 임원이 됐다.
예전 직장에 비해 직원은 100분의 1, 매출은 200분의 1로 줄었다. 하지만 그는 "번듯한 명함만 따져서는 늙어서도 지속가능한 일자리에 남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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