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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이후 생존법] "모은 돈 흥청망청 다 쓰고 중병 걸렸는데 빈털터리… 아르헨티나가 지금 그 꼴"

惟石정순삼 2012. 1. 11. 16:36

 

[위기 이후 생존법] <6> 레드라도 아르헨티나 전 중앙은행 총재
국민 80%에 보조금 퍼줘 정부 재원 바닥나자 국민연금에서 빼 쓰고 외환보유액까지 건드려
"국민도 외국인 투자자도 정부 불신, 돈 있으면 달러로 바꾸려고 아우성"

마틴 레드라도 전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는 외환보유액을 정부 재정으로 쓰게 해달라는 대통령 요구를 거절했다가 해임됐다. /부에노스아이레스=김영진 기자

"예를 들어 봅시다. 당신이 오랫동안 일을 해서 모아둔 돈을 흥청망청 써버리고, 일자리도 없다고 합시다. 그런 상황에서 중병이라도 걸리면 병원 갈 돈도 없어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르헨티나가 지금 그 꼴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마틴 레드라도(Redrado·51) 전(前)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는 "외채(外債) 상환 자금이 필요하니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을 내놓으라"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드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요구를 거부했다가 2010년 1월 졸지에 해임됐다. 그는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지금 정부에서 돈을 달라고 요청하면 곧바로 수표에 사인을 해주는, 정부의 보물 창고가 되고 말았다"고 개탄하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아르헨티나는 포퓰리즘과 일관성 없는 정책이 한 나라를 어떻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이다. 레드라도 전 총재는 그 산증인이다.

아르헨티나는 복지 천국이다. 월수입이 5200페소(약 140만원) 이하일 경우 결혼하면 900페소, 아이 낳으면 600페소를 주고, 자녀 지원금으로 월수입에 따라 1인당 월 136~270페소씩 지급한다. 월수입 5000페소 이하 가구가 80%에 이르는 점을 감안할 때 국민 대부분이 보조금 혜택을 본다. 문제는 정부가 그만큼 돈을 퍼줄 능력이 못 된다는 점이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국민에게 주기로 약속한 보조금 재원이 바닥나자 2008년부터 국민연금에서 돈을 빼 쓰기 시작했고, 그걸로도 부족하자 2010년엔 대통령이 외환보유액에까지 손을 벌린 것이다. 당시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외채 상환 자금 마련을 위해 필요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국민에게 줄 보조금 재원이 필요했던 것이었다고 레드라도 전 총재는 말했다.

그의 사임 후 정부는 외환보유액에 마음껏 손을 댔다. 2010년 말 520억달러이던 것이 2011년 말엔 467억달러로 10% 이상 줄었다. "내가 총재에 취임한 뒤 위기에 대비해 달러를 확보해 놨는데 내가 사임한 뒤 그걸 다 쓰고 있어요. 이렇게 쓰다 보면 언젠가는 외환보유액도 바닥을 드러낼 겁니다."

정부가 돈을 마구 뿌리다 보니 물가도 걷잡을 수 없다. 정부가 발표한 2011년 공식 물가 상승률은 9.5%이지만, 민간 연구기관들은 평균 22%로 보고 있다. "중앙은행의 가장 큰 목표는 물가 안정이지요. 그런데 우리 정부는 외환보유액의 달러를 가져다 시중에 돈을 풀었으니 결과적으로 중앙은행이 인플레를 조장한 셈이 되어버렸어요."

레드라도<사진> 전 총재는 “국민들은 서로 달러를 구입하려고 아우성”이라며 “2011년 9월 한 달에만 국민이 은행에서 찾아간 달러만 30억달러에 달하는데 이래서는 어떻게 경제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또 “아르헨티나 국민 가운데 은행 거래를 하는 사람은 1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현금을 주고받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힘만으로는 인플레를 잡을 수 없다. 정부와 정치권 모두가 물가 안정을 도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2010년 사망)이 집권했던 2004년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돼 6년간 총재직을 수행했다.

지난 30년 새 남미의 이웃나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비슷한 경제위기를 겪었다. 1000%가 넘는 인플레이션과 외채 위기 등을 경험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다. 브라질은 과감한 재정 개혁과 화폐 개혁으로 물가를 잡았지만, 아르헨티나는 그러질 못했다. 레드라도 전 총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브라질은 정치·경제적으로 국제사회에 잘 적응했고 외국인 투자를 많이 유치했지요.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었고, 큰 내수시장을 잘 활용해 경제 성장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모든 게 반대로 움직여서 이 모양이 됐어요.”

그는 “아르헨티나가 투자 유치를 못하고 인플레 위기도 막지 못하고 경제를 더 성장시키지 못하는 것은 결국 정부가 국민과 외국인 투자자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정책 일관성도 없고, 투명하지 않아 항상 외국인 투자자들을 놀래킵니다. 그 때문에 외국인 투자가 잘 안 들어옵니다. 아르헨티나는 연간 8%대의 성장 잠재력을 갖고 있는데도 2012년엔 5.2% 성장에 그칠 것으로 보입니다. 국제 사회로부터 신용을 얻지 못해 차관도 못 들여오고 산업 투자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드라도 전 총재는 “모두 정부에 대한 불신 때문이며, 정부가 비전을 주지 못한다면 아르헨티나 경제는 더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