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학수 스포츠부 차장
지난주 주말 충남 태안반도에 있는 골프장 골든베이에는 박세리와 신지애·최나연 등 여자골프 스타들이 모처럼 국내대회에 참가했다. 골든베이 골프장을 설계한 이는 현역시절 '골프 여제(女帝)'라 불리며 박세리와 우승 경쟁을 벌였던 애니카 소렌스탐이다. 그녀는 이제는 골프장 설계와 골프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올해 미국 투어에서 부진해 집단슬럼프에 빠진 게 아니냐는 지적을 듣는 한국 여자골프 선수들을 보다가, 문득 2008년 소렌스탐의 은퇴식 장면이 떠올랐다. 나이 서른여덟의 소렌스탐이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비장미 넘치는 음악이 홀을 메웠다. 잠시 눈시울을 붉힌 그녀는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이 자리에서 듣게 돼 고맙다"며 말문을 열었다. 2001년 아카데미상 5개 부문 수상작인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의 주제곡이었다. 로마의 장군에서 검투사로 전락해 매일 누군가를 쓰러뜨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주인공의 인생역정이 그 음악에 녹아 있었다.
소렌스탐은 이 음악을 MP3에 담아 들으며 훈련했노라고 고백했다. 늘 엷은 미소에 담담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실제로는 원형경기장에 나서는 검투사의 심정으로 '칼을 갈며' 필드에 섰다는 사실을 알고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녀는 어려서 취미로 골프를 시작했지만, 미국 언론이 '골프 기계'라고 꼬집은 한국 골퍼들보다 더 혹독하게, 더 오랫동안 자신을 몰아붙였다. 한 라운드 54타를 치겠다는 '비전 54'라는 목표 아래 자신의 한계와 싸웠다. 하루 1000개씩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엄청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질 몸집을 키워 남자대회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원대한 포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소렌스탐이 전 세계에서 90승을 올린 '장수(長壽)'의 또 다른 원동력은 골프 외의 삶에도 충실했던 것이다. 그녀는 TV 요리 프로그램에 나올 정도로 취미생활에 공을 들였다. 그녀의 골프 레슨서(書) '골프 애니카의 방식' 추천사는 가수 셀린 디옹이 썼다. 음악감상이 취미인 소렌스탐이 디옹의 콘서트장을 찾았다가 절친한 사이가 됐다고 한다. 학창시절 컴퓨터 엔지니어를 장래 직업으로 꼽을 만큼 수학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에도 소질이 있었던 그녀는 경기 내용을 컴퓨터로 분석해 단점을 고치는 데 활용하기도 했다.
지금 한국 여자골프의 주축은 이십대 중반의 '세리 키즈'다. 박세리의 성공신화에 자극받은 '골프 대디'들의 손에 이끌려 열살 남짓부터 골프가 전부이다시피 한 삶을 살아왔다. 이들은 최근 "골프를 즐기면서 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몇년 전 지독한 슬럼프에 빠졌을 때 "아버지는 골프만 가르쳐줬지, 쉬는 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너무 힘들다"며 눈물을 쏟던 박세리와 비슷한 성장통(痛)을 겪고 있다. 이들 중에는 지금도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강행군을 하지만 발전속도는 떨어지고, 서른도 되기 전에 무대에서 사라지는 경우까지 있다. 이들이 삶의 균형을 맞추며 끝없이 자신의 한계를 넘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던 소렌스탐의 노하우를 터득할 때 한국 여자골프는 또 한 번 한계를 넘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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