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機 폭파범 김현희 <下>
안기부 조사 받을 때 - 수사관들 서울 말씨 상냥, 말 못알아듣는 것처럼 꾸미려 우스갯소리에도 안 웃으려 해… 한국말로 잠꼬대 할까봐 걱정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 자유롭게 말하고 생기 있어… 북한 역사는 김일성만 가르쳐, 한글 누가 만들었는지 몰랐다… 한국역사 여기 와서 알아
"10분 뒤에 로마행(行) 비행기가 뜨는데 그것만 타고 날라버리면 되는데. 이젠 틀렸구나. 탈출하기 힘들겠구나."
김현희씨는 무대에서 독백하는 듯했다.
그녀 일행의 탈출은 바레인공항 검색대에 막혔다. 위조 일본 여권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바레인 주재 일본대사관 직원이 나와 있었다.
"우리는 일본으로 송환될 처지였다. 그때 할아버지(공작 파트너 김승일)가 '일본에 보내지면 비밀만 다 불고 고생하다 죽으니 일본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자결하는 게 낫다. 나는 살 만큼 다 살아서 괜찮지만 마유미는 아직 젊은데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자살을 권유받았을 때의 심경은?
"독약 앰풀을 갖고 있었지만 이렇게 깨물게 되는 상황이 닥칠지는 몰랐다. 마지막이구나. 그때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주저하는 마음은 없었나?
"사실 앰풀을 깨무는 연습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신호를 해달라. 내가 먼저 깨물고 이를 확인한 다음에 할아버지가 깨물라'고 했다."
일본행 비행기 안에서 하려던 자살 계획은 어긋났다. 이들은 대합실에 억류돼 있었다. 바레인 경찰이 그녀에게 "핸드백을 달라"고 했다. 그녀는 담뱃갑을 챙기고 가방을 건네주었다. 경찰은 담뱃갑도 요구했다. 그녀는 독약 앰풀이 든 담배를 꺼내고 담뱃갑만 건네줬다. 경찰은 "그 담배도 달라"고 했다.
경찰이 담배를 빼앗으려는 순간 그녀는 담배 필터를 깨물었다. 경찰이 덮쳤고, 앰풀이 깨지면서 기화된 청산 성분이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김승일도 앰풀을 깨물고 들이마셨다.
―'음독(飮毒) 쇼'라는 주장도 있었다.
"당시 일본대사관 직원(스나카와 쇼준)이 현장을 보고 쓴 수기가 있다."
2003년 출판된 '극비지령'이란 책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신이치(김승일)와 마유미(김현희)는 격렬한 발작 상태에서 전신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였다. 몸의 모든 근육 말단까지 경련 상태였다. 마유미의 몸이 더 격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심장에 전기 쇼크를 받은 것처럼 몸이 튀어 오르기도 했다. 눈을 감고 입은 조금 열려 있었다. 입 왼쪽에 찢어진 상처가 보이고 피가 묻어 있었다. 이번엔 신이치의 경련이 심해지고 마유미는 조용해졌다….'
―독약 앰풀을 마시려고 했을 때와 그 직후의 상황을 기억하나?
"깨문 순간부터 정신을 잃었다. 기억이 전혀 없다."
―바레인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무엇을 봤나?
"말소리가 들렸다. 내가 살아났다는 걸 알았을 때 정말 괴로웠다. 살면 안 되는데, 이 비밀을 어떻게 지킬 수 있나. 죽은 할아버지가 부러웠다.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나를 생각했다."
- ▲ 김현희씨는“88서울올림픽 저지 공작이 한국에 와서 보니 선거와 연관돼 정치 사건이 됐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이들의 국적과 정체는 아직 불분명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안기부의 한 수사관은 독약 앰풀로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북한 공작원'으로 찍었다. 2년 전(1985년) 재일교포 간첩 신광수를 검거할 때 그의 옷깃에서 똑같은 독약 앰풀이 발견됐던 것이다.
신광수는 1986년 사형 판결이 확정된 뒤 1988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이듬해 일본 의원들은 '민주화 운동으로 체포된 재일한국인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한 적이 있다. 당시 간 나오토 일본 총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해서 신광수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밀레니엄 사면'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비전향 장기수 송환 당시 북한으로 건너갔다. 뒤늦게 일본 경찰은 신광수가 일본인 납북에 관여했다며 국제 수배했다. 간 나오토 일본 총리도 이 문제로 비판받았다.
―당신은 새벽 3시쯤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 특별기에 실렸다. 그때의 심경은?
"한밤중에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때까진 몰랐다. 지프에 태워 어디로 갔다. 비행장 안으로 들어가 멈췄는데, 대한항공 태극마크를 봤다. 한국말이 들렸다. 범의 소굴로 가는 심정이었다. 온갖 고문받고 갈기갈기 찢겨서 비밀만 털어놓고 죽게 되리라."
―기내에 있던 우리 수사관을 보니 어땠는가?
"처음부터 눈을 감아버렸다.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누군가가 '네가 북한 사람이라는 걸 우린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혹시 혀를 깨물까 봐 입마개가 씌워졌다. 장차 받게 될 고문을 떠올리니 무서웠다. 속으로 '굴하지 않고 싸우리라'는 혁명가요를 불렀다."
―국내에 압송된 날은 대통령 선거 전날(1987년 12월 15일)이었다.
"공작 임무를 받고 북한을 떠날 때도 대통령 선거가 있는 줄 몰랐다. 그런 걸 알려주지도 않았다. 오직 서울올림픽 저지가 목표였다. 88년 1월 17일까지 참가국 등록 신청을 받으니 그 전에 타격을 줘야 한다. 그러면 다른 국가들이 신청을 안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 선거와 연관돼 정치적 사건이 됐다. 이번 사건으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는 말을 들었다."
―선거에 이용될 것이라는 정세 판단을 못하고 공작한 것인가?
"북한에서도 전두환을 '테러 대장'이라고 욕을 많이 했다. 풍자극도 했다. 그런 군부를 도와주려고 했겠는가."
―당시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을 만난 적 있나?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만난 적이 있다."
―당신은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조사받았다. 첫날을 기억하나?
"고문받고 험하게 다뤄질 줄 알았는데 수사관이 '오느라 고생했으니 이제 좀 편히 쉬어라'고 했다. 남자들의 서울 말씨가 왜 이리 상냥한가. 그리고 목욕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밤 수사관들은 자해 방지용 입마개를 떼는 문제로 고심했다. 그걸 제거한 뒤 만약 그녀가 자해라도 하면 한국이 고문 조작의 누명을 뒤집어쓸 판이었다. 어쨌든 조사하려면 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자해할 용기가 사라졌는가?
"방 안에서 여러 명의 수사관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짓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비밀을 지켜낼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조사를 받으면서 첫 문화적 충격은?
"다음 날인가 잠결에 수사관들끼리 '누굴 찍었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무슨 선거를 그렇게 하나 의아했다."
―조사받을 때 중국어와 일본어를 섞어 답변했다고 들었다.
"혹시 잘되면 중국으로 추방되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빠이취히(百翠惠)'라는 중국인이라고 주장했다. 수사관들은 '네가 북한에서 온 것을 안다' '네가 잘못되게 시킨 김정일이 나쁘지' 말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꾸미는 건 못할 짓이었다. 자기네끼리 우스갯소리를 할 때 웃지 않으려고 표정 관리를 하는 것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자면서 한국말로 잠꼬대를 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당신은 12월 23일 오후 5시쯤 자백한 걸로 되어 있다. 수사를 시작한 지 8일 만이다. 전날에 승용차 뒷좌석에 태워 서울 야경을 보여준 게 주효했다고 하는데.
"그런 구경도 하고, 수사관들이 얘기하는 걸 보면서 느껴졌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전부 달랐으니까. 아무리 내가 거짓말해도 정확한 사실을 들이대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양심의 가책도 들었고."
―수사관이 "이제 이름이라도 알자"고 했을 때 당신이 "쇠 금(金)자"라며 처음으로 우리말을 했다는데.
"공작원으로 뽑힌 뒤 '김옥화'라는 가명을 썼다. 8년 만에 내 본명을 대려니 쑥스러웠다. 한국말을 하면서 자백하게 됐다. 사실 입을 열고 싶어도 나 때문에 처벌받을 북한의 가족이 늘 걸렸다. 인간으로서 진실을 밝히고 죽자, 그게 죗값을 치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부모 소식은?
"모른다. (눈시울을 붉히며)나 때문에…."
- ▲ 공작원 훈련 시절 일본어 교사였던 다구치 야예코씨 아들과의 만남(2009년).
―실제 겪어본 남한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자유롭게 말하고 표현하고 생각하는 그런 자유다. 삶에 대한 생기가 느껴졌다. 역사에 대해서도 다시 알게 됐다. 한글을 누가 창제했는지도 몰랐으니.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가장 위대하다는 것밖에 몰랐다."
―역사 지식 부족은 당신 개인의 문제가 아닌가?
"전반적으로 그렇다. 북한 사람들은 역사를 모른다. '삼국이 있었다. 고려가 통일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김일성만 가르치고 그걸로 시험친다. 거짓 교육이었다."
―당신은 과거에 한 언론인을 만나 '남한에서는 히스토리(history)를 가르치고 북한에서는 히즈 스토리(his story)를 가르친다'고 말했다.
"…김일성만 가르쳤으니, 여기에 와서 한국 역사가 있다는 걸 새삼 알았다."
국내 압송 당시 '하치야 마유미'였던 그녀는 1988년 1월 15일 '김현희'라는 이름으로 첫 기자회견을 가졌다. 1990년 3월 27일 대법원은 사형을 확정했다.
"나는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형 선고를 받는 순간 맥이 탁 풀린다고 할까, 눈물이 핑 돌고 주저앉게 되더라.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때는 나도 별수 없는 인간이었다."
보름 뒤 그녀는 특별사면됐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당신은 어떻게 비칠까?
"나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부정적일 수도 긍정적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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