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권서 겪은 고초는 죄업에 대한 업보라 생각하나?
"나는 로봇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인간이다"
그때 바레인에서 죽었어야 - 미인이라 동정론?
北이라면 내게 돌 던졌을 것… 유족들 격려 덕분에 인간성 조금씩 회복
115명 숨진 테러를 정치적 이용 - 노무현정부, 나를 '가짜'로 몰아
방송출연 거부하자 거주지 노출, 국정원 보호도 못받아… 관련 직원들 처벌 대신 승진
"정말 배신이었다! 등에 칼을 꽂는 것과 같았다. 자기들 말 안 듣는다고 나를 노출했다. 자기들이 직접 나를 손댈 수는 없고 북한에서 와서 나를 살해하라는 것이었다."
'KAL기 폭파범' 김현희(49)씨는 우리 기억 속의 얼굴은 아니었다. 길 가다 만났다면 못 알아봤을 것이다.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날아오던 KAL 858편이 공중폭발했다. 미얀마 근해 상공(上空)이었다. 탑승자 115명 전원이 숨졌다. 대부분 열사(熱砂)의 땅에서 일하다 3년 만에 귀국하는 중동 근로자였다. 이들의 시신도 찾지 못했다.
- ▲ 김현희씨는 “KAL기 폭파 때만 해도 나는 통일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그 미모의 폭파범은 이제 중년이 돼서, 지난 정권에서 겪은 일을 털어놓고 있었다. 목청을 높이다가 울먹이곤 했다. 흥분할수록 북한 억양이 살아났다.
"김대중 정부 때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나를 '가짜'로 만들고 온갖 의혹을 부풀렸다. KAL기 폭파 사건을 뒤집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나를 압박해왔다. 그때 나는 바깥 활동을 일절 안 하고 있었고, 딸이 막 걸음마를 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이 국가기관의 보호를 받으며 여유 있게 생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좌파 정권이 만든 국정원(김대중 정부 이후)에서는 보호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추위와 공포에 떨면서 도망쳐나온 내게 방송에 출연하라고 했다. 지휘부에서 이미 결정한 사항이라고."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선 궁금해했다. 방송에 출연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내가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 안기부 공작원임을 '고백'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가짜'라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북의 김정일 정권이 저지른 KAL기 폭파 사건을 우리나라로 돌리려는 것이었다. 표적을 거꾸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 비열한 공작의 나팔수처럼 된 방송 프로에 어떻게 나갈 수 있나. 국정원이 MBC 'PD수첩'에 출연하라고 강요했다."
―당시 여론 분위기에서 국정원의 고충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거부하니까, 국정원에서 내 남편을 불렀다. '정 그렇다면 방송 출연은 하지 말고 국정원 안에서 신부님들(KAL기 폭파 사건은 안기부 조작 사건이니 재수사하라고 서명운동을 하던 정의구현사제단을 지칭)을 모셔놓고 설명회를 갖는 걸로 하자'고 제안했다. 남편이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바로 그 시각에 MBC 'PD수첩'팀이 내 거주지로 들이닥쳤다. 나는 갓난아기를 업고 한밤중에 집을 나와 피신해야 했다."
―우리 사회에서 언론의 취재는 자유롭다. 당신은 뉴스 메이커였으니, 적극적인 취재를 나무랄 순 없는 것이 아닌가.
"나의 최고 보안(保安) 사항은 거주지 노출이다. 황장엽 선생에게도 북한이 테러하겠다고 암살단을 보냈고, 이한영(김정일 처조카)도 거주지 노출로 살해됐다(1997년).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경찰이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내 거주지를 노출해 버린 것이다."
―언론 매체가 당신을 수소문해 취재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국정원에서 정보를 흘려준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이는 보호해야 할 사건의 '증인'을 말살하려는 것이다. 추운 겨울날 아이를 업고 나와 어디 가나. 허름한 단칸방에서 지금 9년째 그렇게 살고 있다."
―KAL기 유가족 중 일부도 당신을 '가짜'라고 주장하고 있다.
"서민과 노동자의 정부라면서 중동 근로자들의 희생을, 그 유가족들의 슬픔을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했다. 사제단이 앞장서 그런 여론을 조성했다. 난 이해할 수 없다. 북한에서는 성경책이 발견돼도 대역죄고 가족이 멸절한다. 하느님을 부정하는 그런 정권을 옹호하고, 김정일 정권이 저지른 사건을 남한이 했다고 뒤집어씌우니, 과연 그들은 사제복을 입고서 정말 하느님을 믿는 것인지 모르겠다."
―당시 국정원으로부터 외국에 이민 갈 것을 권유받았다고 들었다.
"국정원 직원이 와서 직접 그렇게 말했다. 2년쯤 나가 있다가 오라고. 나를 보호하던 관할 경찰서에서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라'고 협박했다. '우유를 마시지 마라 (우리가) 독약을 넣을 수 있다, 신문을 보지 마라 탄저균을 넣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가 세놓은 가게에는 영업을 못하도록 법원의 빨간 딱지를 붙여놓았다. (눈물을 흘리며)내가 말을 다 못하겠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에서 KAL기 폭파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들어갔다. 당신은 한 번도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보통 뱃심이 아니다.
"숱한 협박과 회유가 있었지만 근본을 훼손하고 다른 목적을 가진 조사에는 응할 수 없었다. KAL기 폭파 사건의 모든 자료는 국정원에 보관돼 있다. 내가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 초동수사 때 급하게 하느라 약간의 오차가 있었지만 나중에 정정 확인됐다. 이들은 지엽적인 오류 몇 개를 갖고 트집 잡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렇게 해도 사실은 달라질 수 없다. 과거사위원회에서도 북한 정권의 소행으로 결론 내렸다(2007년 10월). 그런 결론을 내리고도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이나, 사과하라는 권고 한마디 없었다."
―지난 정권이 왜 그렇게 했다고 보나?
"이 사건을 뒤집으면 이전의 군부와 우파 세력이 도덕적으로 타격받는다. 정치 구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랬다고 본다. KAL기 폭파 사건 직후 미국은 북한을 '테러 국가'로 지정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 명단을 풀어달라고 했다고 들었다(2008년 10월 해제)."
―지난 정권에서 겪은 고초는 당신이 저지른 죄업에 대한 업보(業報)라는 생각은 없나?
"그것은 내 개인의 고통 문제만이 아니다. 115명이 숨진 테러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나. 돌아가신 분의 영혼을 말살하고 유가족을 속이는 범죄 행위다."
―지난 정권 시절의 국정원이 그랬지, 지금의 국정원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니….
"그때 공작에 가담했던 이들은 처벌받는 대신에 승진했다. 국가관도 안보관도 없다. 이게 제대로 된 사회인가. KAL기 폭파 사건은 이명박 대통령과도 관련 있다. 당시 희생된 근로자 중 현대건설 직원이 60명 이상이었다. 이 대통령은 현대건설 회장이었다. 그럼에도 사건의 진실을 뒤집으려는 범죄에 대해 팔짱 끼고 보고 있는 게 한심하지 않은가."
―당신은 자신을 살인범으로 받아들이나, 아니면 체제의 희생양으로 받아들이나?
"나는 북한 정권의 로봇, 도구가 된 것이다. 자동적으로 명령을 수행한 것이다. 그렇게 했지만 유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봤다. 그전까지는 상상도 안 해본 상황이었다. 내가 왜 이 짓을 했을까. 정말 잘못됐다는 걸 느끼게 됐다. 나를 이렇게 도구로 만든 김일성·김정일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근로자들도 희생됐고, 나도 그렇고 내 가족도 희생이 됐다."
―서글픈 얘기지만 당시에도 사건의 본질보다 당신의 미모가 더 화제가 됐다. 세간에는 TV에 나온 당신 모습을 보는 순간 "살려줘야 한다"는 동정론이 일었다.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게 놀라웠다. 북한이라면 사람들이 내게 돌을 던졌을 텐데…."
그녀는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보름 뒤 특별사면(1990년 4월 12일)됐다. 그녀를 살려둔 것은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한 테러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가 역사적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증언으로 미국은 북한을 '테러 국가'로 지정했고, 베일에 싸였던 일본인 실종 사건이 북한 납치극으로 드러나 일본 열도를 흔들었다.
―당신은 이 자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당신에게 축복인가 지옥인가?
"당시 바레인 공항에서 우리 정체가 탄로 났을 때 준비한 독약 앰풀을 깨물었다. 그때 죽었어야 했다. 죽지 못하고 살아났을 때 참 괴로웠다. 지난 정권에서도 죽고 싶었다. 내가 큰 죄인이지만 나를 살려준 것은 '증인'이기 때문이었다. 진실을 지켜야 하는…."
"안기부 수사관에 내가 청혼… 결혼 허가에 2년"
"집 전화·휴대전화도 없어… 엄마 과거 잘 모르는 두 아이, 평범하고 자유롭게 살았으면"
그녀는 특별사면 뒤로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1991년)라는 베스트셀러를 썼다.
"귀순자에게는 국가보조금이 나오지만 나처럼 검거된 사람에게는 그게 없었다. 안기부에서 살아갈 방도를 위해 책을 쓰라고 권했다. 그렇게 잘 팔릴 줄은 생각 못했다."
―'이제 여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어떤 마음이었나?
"출판사와 상의해서 그 제목을 했지만 내 마음이 좀 들어가 있었다. 어릴 때 공작원으로 선발돼 혁명가로서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이 땅에서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봤나?
"소원이었다."
- ▲ 1987년 12월 15일 국내로 압송되는 장면. /박창선 기자
―책 인세 8억5000만원을 KAL기 폭파 사건 유족회에 건네준(1997년 12월) 걸로 안다.
"당시 유족들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많이 울었다. 유족들은 '마음고생 많이 했다. 잘 살아라'고 격려해줬다. 그분들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은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다."
―진심으로 그 사건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는가?
"그때만 해도 나는 통일을 위한 혁명가였다. 폭파한 것은 죄가 아니었다. 혁명가로서 임무를 수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사를 받으면서, 재판정에서 유족들을 만나면서, 나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해 갔다. 내가 한 짓이 통일을 위한 것이 아닌 큰 범죄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바로 1997년 말 당신을 담당하던 전직 안기부 수사관과 결혼했다.
"내게는 안기부의 안가(安家)가 제2의 고향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수사관들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근무지가 바뀌면 떠나갔다. 언제까지 이렇게 보호받으며 살아야 하나. 홀로서기를 해야 하지 않나. 사회적응을 위해 먼 친척 집에서 잠깐 살아보기도 했다. 안기부에서는 나보고 수녀(修女)가 되라고 권하기도 했다. 결혼은 못 할 줄 알았다. 바깥의 누구를 대놓고 만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남편에게 결혼해 달라고 청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때 나로서는 고민이 많았다. 김현희씨와 결혼하면 안기부라는 직장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안기부에서도 보안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안기부의 결혼 허가가 나는 데 2년쯤 걸렸다"고 말했다.
―결혼 생활에서 무엇을 꿈꿨나?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과 시골에서 조용히 살기를 원했다. 바깥에 나서지 않고. 지난 정권 전까지 그렇게 살고 있었다."
―5학년 아들과 3학년 딸을 두고 있다고 들었다. 자녀는 엄마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나?
"…아직 잘 모른다. 다만 매스컴에 나고 하니까 좀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다."
―동네에서 학부모들끼리 어울리는 기회는 있나?
"그런 모임에 나간 적이 없다. 동네에서 혹 나를 알아보는 주민들이 있을지 모르나, 일부러 만나는 경우는 없다."
―아이들이 집으로 친구를 데려오나?
"놀러오기 어렵다. 경호원도 있고."
―당신 아이는 어떻게 성장하기를 원하나?
"평범하고 자유롭게." 사생활에 관해 그녀의 말은 짧았다. 그녀 부부는 집 전화도 휴대전화도 없다. 공중전화를 이용하거나 경호원을 통해서만 연락이 된다. 이번 인터뷰 때는 4명의 경호원이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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