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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상식이야기

지금은 타락한 말들을 세탁할 때

惟石정순삼 2009. 6. 2. 09:08

지금은 타락한 말들을 세탁할 때

언제부턴가 욕이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더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번져 나간다. 정기적으로 욕을 해서 밥을 먹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즉 욕이 먹히는 사회다. 좀 깊게 파고들면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서 파생된 문제가 여러 요소들과 칡덩굴처럼 얼기설기 얽혀 있다가 욕이라는 코드로 모아져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왜 하고많은 것 중 하필이면 욕일까? 욕이 갖는 천박함은 뒤로하고라도 우리가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왔을까? 누구라도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물론 욕도 잘하면 문학작품이 된다. 그래서 욕을 할 때는 기품 있게 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말의 어디쯤에서 강약을 조절해 잘 섞어 쓰면 백마디 말보다 큰 효과를 볼 수가 있다.

우리 말의 다양한 형용사, 부사, 조사 사이에 고명처럼 욕이 살짝 얹힐 때, 욕이 갖는 위엄은 무한대로 커진다. 그래서 욕은 지그시 해야 한다. 욕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이 욕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며, 욕 외엔 대체할 단어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때, 딱 그럴 때만 호랑이가 포효하듯 장엄하게 욕을 해야 된다. 그럴 때 욕은 예술로 승화된다.

이것은 독이 약으로 쓰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그런데 문제는 아무나, 아무 때나, 막 한다는 것에 있다. 내가 기억하기로 욕이 사회에 만연하기 시작한 것은 조폭영화 바람이 불면서부터다. 기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때의 충격을 난 지금도 상처로 기억하고 있다. 오후 6시쯤 산책 무렵에 한 떼의 여중생을 만났다. 운동화를 신은 아이도 있었고, 슬리퍼 바람인 아이도 있었다.

마침 초가을이어서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고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바야흐로 지는 햇살에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 곳에 단발머리의 예쁜 여중생이 걸어가고 있었다.그 아이의 대추씨 같은 작은 입이 열리기가 무섭게 쌍시옷자의 욕설이 튀어나오더니 같이 가던 아이들 여럿이 이구동성으로 욕을 해 대기 시작했다.

아마 그날 학교에서 일어난 어떤 일에 대해 나란히 성토하며 집으로 가는 길인 듯했다. 나로서는 그들의 욕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단순한 형태의 욕이 아니었다. 욕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그들만의 용어로 변화된 것이다. 일종의 암호나 특수기호처럼 말이다. 여중생들이 지나가는 풍경은 한 폭의 서양화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자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 말에 ‘한때’라는 단어가 있다. 한때는 순간이다. 솜털이 보송한 순간, 젖먹이의 피부처럼 모공이 하나도 열리지 않은 여릿한 여중생들의 아름다운 한때. 풋것들의 호기심 가득한 한때를 욕설로 도배하는 것은 비극이다. 비단 욕뿐만이 아니다. 외계어를 연상시키는 인터넷 용어도 문제다.줄임말, 거친 말, 천박한 말들이 유행을 타고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

십대나 이십대가 사용하는 휴대전화 문자는 반 이상 해독하기 어렵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말들이 타락할 때 사회는 부도덕하고 불건전해진다. 점점 센 말만이 먹히는 것이다.우리 사회가 계속 이대로 가도 괜찮겠는가? 지금은 타락한 말들을 세탁할 때. 오늘 내가 무심코 흘린 말들을 점검해 보자. 낯간지러워서 멀리했던 순한 말, 착한 말들을 다시 찾아야 할 때는 아닌지. 더 이상 늦기 전에….

<이현수 소설가·‘내일을 여는 작가’ 편집위원 hyunsu41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