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 명성을 안겨 준 첫 번째 작품이 ‘피에타’다. 이 작품은 그가 23살 때 조각한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조각상이다. 피라미드 구조로 조각한 작품으로 성모 마리아의 얼굴과 주름진 옷자락, 축 늘어진 예수의 시신 등은 그리스 조각에서 영향을 받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피에타라는 말은 경건을 뜻하지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작품을 보면 피에타라는 말의 뜻을 몰라도 저절로 마음이 경건해진다. 아들을 품에 안고 있는 성모의 모습에서 죽은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어머니의 슬픔을 누구라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산 디오니지 추기경의 주문을 받아 피에타 작품을 제작하게 되는데 피에타는 마리아가 아들의 시신을 매장하기 전에 잠시 무릎 위에서 끌어안고 기도하는 장면을 말한다.
성서 이야기 중에 이 장면은 가장 비감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성모이기 이전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애끊는 슬픔이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을 샘물처럼 적셔 놓을 만한 주제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라는 어려운 주제지만 작품을 제작해 보고 싶던 차에 추기경으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의뢰를 받기에 이른다. 그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실험을 하게 된다. 2m에 가까운 대형 조각상이기 때문에 먼저 점토 모형으로 제작하고 대리석으로 옮기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됐다.
미켈란젤로는 성모의 슬픔과 비애를 자연스러우면서도 종교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성모의 얼굴에 표정을 실어 넣기로 했다. 표정을 살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예수가 죽을 당시 마리아의 나이가 오십이 넘어 젊은 예수의 시신을 어떻게 무릎 위에 앉히는가가 가장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미켈란젤로는 정통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고 예수를 마리아 무릎에 눕히는 방식을 택했다. 그 이유는 마리아의 품과 무릎은 교회의 제단을 상징하고 예수는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의미를 상징하기 위해 그는 마리아의 오른손은 예수의 상체를 받쳐 들게 하고 왼손은 바깥으로 뻗어 있게 제작했다.
‘피에타’ 조각상을 보고 어린 나이의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그 말을 듣고 성모 마리아의 가슴에 두른 띠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 작품이 그가 사인한 유일한 작품이다.
2년 동안 피에타에 매달린 끝에 완성을 했지만 산 디오니지 추기경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약속한 대금을 받지 못한다. 재료비는 물론 완성된 ‘피에타’를 갖고 올 경비조차 없었던 미켈란젤로는 베드로 성당 구석에 세워 놓은 채 피렌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박희숙 서양화가·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