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9.06 09:00 | 수정 : 2016.09.06 09:37
강원도 화천의 조경철 천문대는 '별자리 사진 명당'으로 꼽힌다. 광덕산 해발 1010m에 자리 잡고 있어 대기가 깨끗해 밤하늘의 별들을 관찰하기 좋은 데다 연결 도로가 잘 닦여 있어 차량으로도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간 3만명이 찾는다는 이 명소에선 지난여름부터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사진 동호회나 아마추어 작가들의 욕심 탓이다. 이들은 전조등을 켜고 지나가는 차량을 보면 욕설부터 내뱉으며 "불을 꺼라"고 고함을 지른다. 차의 라이트 때문에 별빛이 보이지 않아 사진 촬영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천문대 측은 주차장에 돗자리를 펴놓고 별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진입 차량의 경우 전조등을 켜도록 하고 있다.
천문대를 자주 찾는다는 아마추어 사진작가 박모(53)씨는 "이런 몰상식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낯 뜨겁다"면서 "천문대가 사진만 찍는 장소가 아닌데 별을 보러 온 관람객들 입장에선 얼마나 불쾌하겠느냐"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서울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연애의 온도' 전시를 최근 다녀온 김승우(21)씨는 "사진 스튜디오에 온 것 같았다"면서 "한 작품 앞에서 셀카를 수십 장씩 찍는 관람객들 때문에 도저히 제대로 작품을 감상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민폐형 사진'보다 더 심각한 것이 '위험 불사형 사진'이다. 멋진 '한 컷'을 찾아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문제다. 지난달 철도경찰대엔 "충주역 선로에 내려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선로에서 사진을 찍다가 사고가 나면 열차 운행과 승객 안전을 해칠 수 있다. 철도경찰대 측은 올 들어서만 7월까지 57건의 불법행위를 적발해 과태료 25만원씩을 부과했다고 밝혔다. ▷기사 더보기
한국 뿐 아니라 …'위험 셀카' 사망사건 잇따라
10~20대 청년들이 고층건물 옥상이나 절벽 위에서 ‘셀카’(셀프카메라)를 찍다가 사고로 숨지는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호주를 여행하고 있던 영국인 조이 울머는 호주의 관광 명소 킹스 캐니언에서 셀카를 찍다가 사망했다.
러시아에서는 볼로그다에 사는 안드레이 레트로브스키가 9층 건물에 올라가 셀카를 찍다가 떨어져 사망했다. 레트로브스키는 건물 옥상의 구조물에 매달려 사진을 찍던 중 줄이 풀려 추락했다. 레트로브스키의 취미는 위험한 곳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그는 사진을 인스타그램 등 SNS에 올렸다. 러시아 타스 통신은 2015년에만 100여건의 셀카 사고가 러시아에서 발생해 10명 이상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호주의 크리스티 카프칼로우디스(24)는 지난달 노르웨이의 트롤퉁가 절벽에서 셀카를 찍다가 추락사했다. 이곳은 ‘트롤의 혀’로 불리는데, 긴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는 지형이다. 관광객들은 바위 끝에 걸터 앉기, 공중제비돌기 등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하곤 한다.
러시아에서는 셀카 사고가 급증하자 당국이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하다”는 경고했다. 셀카를 찍기 위해 고층건물 옥상에 올라가는 것은 물론, 맹수에 접근하거나, 열차가 달려오는 기찻길로 뛰어드는 등 실제 있었던 사고를 등장시킨 ‘안전한 셀카 찍기’ 캠페인 광고도 제작했다./손덕호 기자
아르헨티나 민방위 구조대원, 한국인 시신 앞 '무개념 셀카'
2014년에는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던 한국인이 실종 사흘 만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여행객 유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현지 구조대원이 시신을 배경 삼아 자신의 사진을 찍은 뒤 페이스북에 올린 사실이 현지 언론에 보도돼 논란이 일었다.
외국 관광객의 단순 사고사로 잊힐 것 같던 사건은 구조대 소속 민방위 대원 D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이른바 '인증샷'으로 논란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D씨는 계곡에 엎드린 채 숨진 김씨 시신을 '배경' 삼아 자신의 얼굴을 휴대전화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시신만 없다면 영락없이 등산이나 트레킹 중 찍은 '인증샷' 구도였다. 사진은 페이스북을 통해 빠르게 공유됐고, 남미 지역 온라인 매체들이 주요 뉴스로 이를 보도했다. 매체들은 D씨를 강하게 비판했다. 아르헨티나 온라인 매체 '인포바에'는 "이 불운한 관광객은 구조대원의 페이스북 사진에 동원됐다. 사진은 삭제됐지만 비난 댓글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지 일간 '엘 인트란시겐테' 역시 "망자(亡者) 사진을 무단으로 게재한 D씨에 지역사회가 분노했다"고 전했다.
스마트폰과 SNS 사용이 일상화되면서 자기 사진을 찍어 바로 SNS에 올리는 '셀카' 열풍이 세계적으로 불자, 작년에는 셀카의 영어 표현 '셀피(selfie)'가 옥스퍼드 선정 '올해의 단어'로 선정되기도 했다. ▷기사 더보기
생명을 해치고 행사를 망치는 카메라
바위 절벽 틈을 비집고 피어난 진홍빛 꽃 사진이 예쁘다. 그런데 다시 보니 놀랄 만큼 꽃 주변이 깨끗하다. 예쁜 그림을 얻기 위해 사진가가 묵은 잎을 모두 뽑아버리고 주변의 잔풀들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강원도 정선의 동강할미꽃은 전 세계에서 오직 강원도 동강 유역 석회암 바위틈에서만 자라는 희귀종 야생화다. 개화 시기인 3월부터 전국에서 야생화 사진동호인들이 찾아오는데 꽃은 그때마다 몸살을 앓고 있다. 있는 그대로 사진을 찍지 않는 일부 몰지각한 이들의 그릇된 사진 욕심 때문이다. 이들은 줄기 주변 묵은 잎을 보기 싫다고 손으로 뜯어내거나 물이나 자동차 워셔액을 뿌려 물방울을 만들어 찍는다.
이런 행동에 스트레스를 받은 동강할미꽃 씨는 발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진을 찍은 후 다른 사람들이 찍지 못하게 꽃을 뽑아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이도 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볼 수 없게 된 지역 주민들이 몇 년 전부터 자체 조직을 만들어 카메라 들고 몰려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촬영하는지 감시하고 나섰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사진을 처음부터
잘못 배우기 때문
사진가들의 지나친 촬영 욕심이 부르는 생명 파괴 사례는 야생화뿐이 아니다.
몇 년 전 새 사진 전시회가 크게 문제 된 적이 있다. 문제의 사진 중 하나는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인 긴꼬리어미딱새가 둥지에서 새끼에게 모이를 주는 모습. 언뜻 봐서 완벽한 구도와 깔끔한 광선으로 처리된 생태 사진으로 보이지만 조류전문가들은 사진이 새 둥지의 잔가지를 깨끗이 정리한 후 촬영한 것이라고 했다. 둥지는 원래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잘 보이지 않도록 나뭇가지 속에 숨어야 한다. 깔끔한 사진을 위해 사진가가 둥지 주변 나뭇가지를 전부 잘라냈으니 촬영 후 천적들의 먹잇감으로 노출될 위험이 커졌다.
사진에 대한 욕심이 지방의 유서 깊은 민속 축제를 망친 사례도 있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해마다 3월 1일이면 열리는 '영산 쇠머리대기'는 중요무형문화재 25호로 지정된 민속놀이인데 행사 주최 측은 사진을 찍으러 찾아온 사람들의 막무가내 행동 때문에 진행이 어려울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무로 만든 소의 머리를 서로 맞대고 밀어내는 방식으로 승부를 겨루는 이 행사는 나무를 부딪쳐가며 한 바퀴를 돌아야 하는데 행사 참가자보다 훨씬 많은 관객이 카메라를 들고 너무 가까이 몰려들어 사진을 찍기 때문에 재현행사를 제대로 못 할 정도가 된다. 행사 주최 측은 위험을 알지만 일단 아수라장이 되면 제어가 불가능하다고 푸념했다. 대체 왜 이런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날까?
한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무엇보다 사진을 처음부터 잘못 배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디지털 사진인구가 크게 늘어났지만 카메라 노출이나 잘 찍는 방법만 가르치지, 어느 사진 강좌도 사진가의 윤리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사진을 처음 배울 때부터 대상과 교감하고 존중하는 법을 알고 시작한다면 그림을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셀카의 빛과 그늘
자기 모습을 스스로 촬영하는 '셀카 사진' 열풍이 계속되고 있다. 영어로 '셀피(selfie)'라고 부르는 셀카 사진 찍기는 지난해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서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후에도 전 세계적인 유행을 넘어 현대인들의 문화로 정착되는 추세다.
찍을 땐 혼자지만 셀카 사진은 혼자 보기 위해 찍는 것이 아니다. 페이스북(facebook)이나 인스타그램(Instagram)과 같은 SNS에서 사람들은 셀카 사진으로 전하는 친구의 안부를 알게 된다. 못 본 지 10년도 넘은 캐나다 밴쿠버의 초등학교 동창은 그가 즐겨 타는 산악용 자전거를 타고 주말마다 가는 곳을 SNS에 사진으로 올린다. 셀카로 매일 먹는 반찬 사진을 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맛집을 찾아 기다리던 음식이 나오면 이젠 숟갈을 들기 전에 감사의 기도 대신 셀카 사진을 찍고 SNS로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풍광 좋은 산천을 찾아 자신이 다녀간 흔적을 남기기 위해 과거엔 바위에 이름을 새기거나 낙서를 했다면 이젠 셀카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린다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지 않으면
초조해지는 강박증을 갖고 있다
그리고 내가 올린 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린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좋아요'와 댓글을 기대하며 더 재밌고 특이한 경험을 보여주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별난 셀카 사진을 찍기 위한 시도가 지나쳐서 인명 사고마저 늘고 있다.
최근 터키 이스탄불에선 다리 위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한 남성을 구조하기 위해 급파된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한 후 남자를 구하기에 앞서 다리 난간에 서 있는 남성을 배경으로 자신의 셀카 사진부터 찍다가 자살을 막지 못하고 징계를 당한 사례가 있었다. 또 스페인에선 한 남자가 달리는 기차 지붕 위에 올라 셀카 사진을 찍다가 감전사로 사망했고, 포르투갈 해안 절벽에서 셀카 사진을 찍던 폴란드인 부부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중심을 잃고 추락해 숨진 일도 있었다. 셀카 사진 때문에 어이없는 사고가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초고층 첨탑에 오르거나 용암이 끓고 있는 화산 아래로 내려가 셀카 사진을 찍는다. 인터넷엔 이런 셀카 사진들이 수없이 올라와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심리학과 조교수인 테리 앱터(Terri Apter) 박사는 "현대인들은 셀카 사진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기 원한다"면서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지 않으면 초조해지는 강박증을 갖고 있다"고 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셀카 사진을 즐기지 않고 빠져들고 있다.
이제 프랑스 철학자 R.데카르트의 말을 어쩌면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나는 (셀카를) 찍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기사 더보기
누구나 카메라를 들면 좋은 사진을 찍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연과 생명을 해치고 행사를 망치면서까지 사진을 찍는 것은 무지하고 양심 없는 짓이다. 억지로 만든 사진들은 수준 낮은 이미지일 뿐 결코 좋은 사진이 될 수 없다. 좋은 사진은 언제나 좋은 사진가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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