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보다 스크린으로 보고 싶은 영화가 있듯 사진도 전시회에 가서 봐야 제격인 것들이 있다. 사진은 회화나 조각과 달리 사람들에게 원본의 개념이 희박하다. 그래서 누가 촬영했든 한 장의 사진이 전시회에 걸리거나 책에 인쇄되고 혹은 페이스북으로 공유된 것도 같은 사진으로 여겨진다. 매일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올라오는 수많은 사진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사진이 너무 흔해졌다.
그럼에도 어떤 사진들은 전시회를 찾아가서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 같은 사진이라도 손바닥 위에서 보는 것과 흰 벽에 걸린 사진으로 보는 느낌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느낌만 다른 게 아니다. 적당한 조명 아래 같은 눈높이로 봐야 비로소 의미가 드러나는 사진도 있다. 요즘 열리는 여러 전시회 사진도 그렇다.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 있는 사진 전시장 스페이스22에서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권태균의 1주기 추모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노마드(Nomad)'라는 제목대로 사진가가 1980년대 국내 여러 지역을 방랑하듯 다니며 기록한 흑백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은마아파트와 중학생'이라는 사진엔 지금은 빌딩과 입시학원들로 빼곡한 대치동 은마아파트 주변의 1980년대 초 모습을 담았다. 허허벌판이었고 교복 입은 중학생 셋이 언덕을 지나가는 모습이 있다. 그때 나도 딱 저만 한 중학생이었다고 생각하니 더 아련해 보인다. 1983년 경남 의령에서 촬영한 '장을 마치고'라는 사진엔 찬거리 가득 담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세 여자의 모습이 있다. 보철로 때워 번쩍이는 앞니를 드러내고 촌스럽게 웃는 한 여자에게서 서둘러 귀가해 식구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 읽힌다. 이런 것들은 전시회의 큰 사진으로 봐야 한다.
사진이 작다고 감상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청와대 앞에 있는 공근혜갤러리에서는 핀란드 사진가 펜티 사말라티(Sammallahti)의 국내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대부분 엽서만 한 크기의 작은 흑백 사진이 걸려 있는데 하나씩 오래 보고 싶을 만큼 재밌고 시(詩)처럼 긴 여운을 준다. 모두 사진가가 직접 프린트한 사진들로, 개와 오리, 소년과 나무가 러시아의 겨울 풍경 안에서 어우러진다. 이런 사진들을 볼 때면 빨리 찍고 돌아서기보다 시간을 두고 대상과 충분히 교감하면서 꾸준히 관찰하고 탐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어느 사진가의 충고를 떠올리게 된다.
어떻게 사진을 찍을까 하고 사진가들이 고민한 흔적을 볼 수 있는 전시도 있다. 서울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매그넘(Magnum) 콘택트 시트'전은 보도사진가 그룹인 매그넘 사진가들의 밀착인화(Contact Sheets)를 모은 기획전이다. 밀착인화는 촬영한 필름에서 베스트 컷을 고르기 전에 현상한 필름을 유리 위에 밀착해서 인화한 사진을 가리킨다. 밀착인화가 흥미로운 것은 사진가들이 어떻게 움직이며 사진을 찍고 마지막으로 어떤 사진을 고르는지 전 과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매그넘 사진가들도 좋은 사진을 건지려고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반복했다. 사진이 뜻대로 안 될 때 어떤 각도로 바꿨을까? 무엇을 기다렸고 어떻게 다가갔을까? 털끝만큼 미세한 차이에서 마지막 한 장을 어떤 기준으로 골랐을까 등의 의문이 밀착인화를 보면 풀린다. 르네 뷰리(Burri)는 시가를 문 체 게바라를 어떻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Dali)를 찍기 위해 필립 할스만(Halsman)은 고양이와 물이 가득 찬 양동이를 어떻게 던졌는지, 연설하는 마거릿 대처(Thatcher)를 찍은 피터 말로(Marlow)가 수십 장의 사진 중에서 '철의 여인'으로 알려지게 된 단 한 장을 어떻게 골랐는지도 보여준다. 이미 같은 제목으로 나온 사진집도 있지만 직접 전시장에 가서 벽에 걸린 사진으로 보길 권한다.
사진전은 해마다 늘고 있다. 사진 전문 갤러리와 사진 동호회도 늘어났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진을 보기 위해 전시회를 찾는지는 모르겠다.
사진가에게 전시회란 음악가의 연주회나 축구 선수의 골대 앞 슛과 같다. 좋은 사진은 전시회 사진에 최적화되어 있고 사진가들은 전시회를 통해 사진을 보여주려고 한다. 번뜩이던 순간이거나 가슴 뛰던 찰나, 혹은 새로운 시각을 동원해 펼친 모험의 결과가 전시회 사진 속에 있다. 비슷한 것들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지식을 넓혀준다면, 좋은 전시는 미묘한 차이를 통해 사진을 보는 눈을 넓힌다. 좋은 사진을 많이 보는 것도 더 좋은 사진을 찍는 방법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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