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들녘에도 로맨스는 있는가
100세장수시대가 다가옴에 따라 홀로 사는 노년들이 많아졌다. 지금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80세이고 여성이 남성보다 5년 정도 더 오래 산다. 이에 따라 황혼의 로맨스가 자주 인구에 회자된다. 특히 주위의 친지가 이성의 친구를 사귀면 빅뉴스가 된다. 남자들 세계에서는 이런 뉴스가 그냥 그저 가볍게 넘어가는데 여자들은 호들갑을 떤다. 아마도 부러워서 하는 질시가 아닌가 싶다.
결혼생활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과 자녀들이 독립하여 집을 떠난 후가 가장 행복한 시기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한 순간을 제대로 만끽하는 부부는 많지 않다. 자녀들이 자라서 독립하면 자신의 배우자에게 눈을 돌려 꺼져가는 로맨스에 다시 불을 지펴야 하는데, 불행히도 이때쯤 되면 여성은 자연의 섭리인지 폐경기가 와서 남편에게 짜증을 많이 내게 된다.
중년의 로맨스는 몸과 마음, 정신과 영혼이 만나 깊고 즐겁고 다정하게 서로를 아껴야 하는데, 그때는 이미 마음과 몸이 메말라 버리고 만다. 미치 엘봄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을 나누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년 이후가 되면 서로 엇박자가 나서 "나누는 법"과 "받아 들이는 법"을 망각해 버린다. 한마디로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식이다. 그래서 중년 이후의 여성들은 '인형의 집'의 노라라도 된 양 집을 빠져나와 동창이나 교회 교우들 그리고 아파트 주민들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한다. 이러다가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더욱더 친구와 취미생활이나 여행에 몰입한다.
내가 뉴욕에 근무할 때 이야기다. 혼자가 된 할머니의 집에 세들어 살았는데, 집 주인은 왕년에 뉴욕 맨하탄의 링컨센터를 주름잡던 발레리나였고 남편은 피아니스트였다. 남편이 죽자 큰 집이 필요없으니까 자기가 살던 1층는 나에게 세를 주고 자기는 입구가 별도로 있는 반지하로 내려가 살았다. 나이는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80대 초반 정도였다. 남편이 죽은지는 1~2년 전이라고 하였다.
월세를 주러 반지하에 내려 가면 심심한지 와인과 쿠키를 주며 벼라별 얘기, 주로 링컨센터를 누비던 얘기를 밑도 끝도 하더니 언제부터인가 약속이 있다며 월세만 받으면 횡하곤 외출하는 거였다. 그러다가 2~3달 후 지하에 내려가나까 왠 백발의 멋쟁이 할아버지가 와 있었다.
그리고 또 몇 달이 지나 내가 출근하려고 주차장에 가보니 그 할아버지의 차가 밤새 주차되어 있었다. 그래서 집사람과 농담을 하며 한바탕 웃은 적이 있는데, 그때만 해도 그런 풍경이 우리에게는 생경하였다.
당시 한국에는 로맨스그레이(romance grey, 머리가 희끗희끗한 매력 있는 초로(初老)의 신사)라는 말은 있었지만 로맨스화이트(실제 이런 말은 영어에도 없음)란 말은 없었다. 즉 당시 우리나라는 80이 넘으면 로맨스라는 것은 주책이라고 사회적 비난을 받아 마땅했고 80인생은 그저 폐기처분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남편을 잃은 노부인들은 적적함을 달래고자 가지각색의 친구모임, 다양한 취미활동 등으로 생의 기쁨을 되찾고 인생의 충만함과 만족감을 느낀다. 취미활동 교실이나 동아리에서 그리고 친구의 소개로 이성을 만나 데이트를 하게 되고 나이가 70이 넘은 사람도 로맨스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귀다 보면 결혼에 까지 도달할 수도 있지만 대개 결혼까지는 원하지 않는다. 동거생활로도 얼마든지 황혼의 로맨스를 꽃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윌 듀란트는 그의 90번째 생일에서 "늙은 남편이 늙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에 비하면 젊은 시절의 사랑은 매우 얕고 표면적인 사랑일 뿐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집주인 할머니는 그 해 가을 결혼하여 저녁 식사를 초대했는데 그녀는 그 자리에서 "난 이제껏 이렇게 행복한 적도, 이렇게 사랑에 푹 빠져 본적도 없어"라는 말을 했다. 5년 후 뉴욕에 다시 발령이 나서 그 할머니를 찾아 갔는데, "우리는 어제 결혼 5주년 축하 파티를 했어. 그리고 난 그이를 어느 때보다 훨씬 더 사랑하고 있어. 우리는 하루하루가 축복이며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어"라고 행복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이들의 행복이 순전히 운으로만 볼 수 있는가? 이들이 이토록 행복한 건 서로 사랑을 소중히 가꾸어 나가고 서로를 배려하며 상대방을 소중하게 대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일이나 취미, 친구를 배우자보다 더 우선순위로 두었지만 황혼의 로맨스는 이러면 당장에 깨지고 만다.
그리고 사랑받고 싶다면 매력적이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운 마음을 갖고 사려 깊고 사랑스러우며 유쾌한 모습으로 자신의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외면적으로는 여성은 화장과 옷에 신경을 써야 하고 남성도 멋을 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 자주 웃어야 한다. 웃음은 인생의 힘든 순간을 헤쳐나가는 동안 사랑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집안일을 나누어서 하는 것은 노년의 로맨스에 기초다. 설거지도 해야 하며 요리책이나 인터넷을 보고 반찬도 만들어 보아야 한다. 늙으면 배우자가 아파 누울 때가 많아지는데 이때 남성이 반찬을 만들지 않으면 누가 밥상을 차릴 것인가?
잔소리는 로맨스를 짓밟아버리는 지름길이다. 잔소리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갉아먹는다. 설사 크게 싸우더라도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않된다. 특히 여성은 말로 입은 상처는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잊지를 않는다.
노년이라고 해서 인생의 마지막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며 대화하고 사랑하고 웃고 노는 것이 흉이 되는 시대는 이제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얘기다. 손을 마주잡고 안개 낀 아침 한강 고수부지를 산책하고 멋진 저녁 요리를 함께 만들어 보거나 거실에서 꼭 끌어안고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 보아라.
곱게 물든 노오란 은행잎을 밟으며 고궁의 돌담길을 거니는 것도 좋고, 고풍스럽고 자그마한 레스토랑에서 촛불이 켜진 조용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노년을 마지막으로 불 태울 꿈이나 함께 할 여행계획을 세우며 다정하게 저녁 식사를 해 보아라. 이리하면 노년이라도 얼마든지 로맨스를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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