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내 별명은 '춤 선생'이었다. 춤 하나로 동네를 주름잡았다. 까까머리 고교생 시절, 리듬에 몸을 싣고 발끝을 움직이기만 해도 옆 동네 여고생들까지 '꺅' 소리를 질러댔다.
한번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여관방에 친구들을 모아두고 트위스트를 가르쳤다. 뜨거운 구들장에 대고 다들 얼마나 발바닥을 비벼댔는지 절반 이상이 발이 퉁퉁 부어 다음 날 토함산 등산을 못 갔다. 춤은 그렇게 내 철없던 어린 시절을 밝힌 등불이었다.
↑ [조선일보]춤을 출 때 내 몸의 모든 근육이 살아 움직임을 느낀다.
나이가 육십 언저리에 이른 지금, 나는 진짜 '춤 선생'이 됐다. 댄스스포츠 강사로 춤을 가르치고 이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글을 쓴다. 댄스 전문 잡지 기자로도 활동한다. 지금까지 쓴 댄스 칼럼이 3000건 정도 된다. 결국 어린 시절 내 모든 것이었던 춤으로 귀착됐지만 그동안 참 많은 길을 거쳤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작했던 첫 직장은 미군부대 안에 있던 미(美) 국방성계약감사국(DCAA)이었다. 카투사에서 복무해 영어를 잘해서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1979년 결혼하면서 럭키개발주식회사로 옮겨 모래바람 날리는 중동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여의도만 한 크기의 사우디아라비아 '킹 사우드 대학'이 내가 참여했던 프로젝트다. 당시만 해도 국내 기업이 막 중동 진출을 시작할 무렵이어서 숙소도 제대로 없었다. 외화 한 푼이 절실한 고국을 위해 열사(熱沙)의 땅에서 청춘을 불살랐다.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死境)을 헤맸지만 추방당할까 봐 치료를 제대로 못 받은 적도 있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성실히 일한 덕에 다음 부임지는 선진국 독일 의 프랑크푸르트 였다. 1년 동안 그곳에 머물며 선진 문화를 경험했다. 한번은 가족과 함께 로렐라이로 여행을 갔다. 마침 축제 때라 사람들이 전통 춤을 추는데 음악이 흘러나오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과 손녀뻘 돼 보이는 젊은 여자가 무대 가운데로 올라가 춤을 추는 것이었다. 선율에 맞춰 우아하게 밟는 그들의 스텝이 마력처럼 나를 빨아들였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더니 기억 저편에 있던 옛 시절이 불쑥 튀어 올랐다. 나의 스텝 하나하나에 환호하던 친구들…. 그리고 마음먹었다. 언젠가 꼭 다시 춤의 세계로 돌아갈 거라고, 저 노인과 젊은 숙녀가 추는 춤을 꼭 배워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겠다고. 알고 보니 그 춤이 '자이브'였다.
하지만 당장 현실에서 꿈을 실천하기란 무리였다. 먹고 사는 게 우선이었다. 독일에서 돌아와 여의도 트윈빌딩 공사 현장을 담당했다. 휴일도 없이 꼬박 4년을 공사장에서 보냈다. 건물이 완공된 뒤 1988년 스포츠 장갑 제조·수출을 하는 중소기업 '시즈'라는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서른여섯, 젊은 나이의 내게 직원 500명을 거느리는 공장장을 제안했다. 고심 끝에 이직했고 이 회사에서 11년을 보냈다. 그동안 스포츠 장갑 분야에서 세계 최대 회사로 키우는 데 일조했다고 자부한다. 1998년 모범 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하지만 극심한 노사분규와 IMF 외환위기 앞에선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1999년 이 회사의 자회사였던 스포츠 브랜드 엄브로(Umbro)코리아 사장을 끝으로 회사원 생활을 끝내야 했다.
회사를 나오니 뭔가 몰입할 것이 필요했다. 그때 스멀스멀 가슴 저 아래에서 요동쳐 올라온 것이 춤이었다. 일은 열심히 했지만 항상 한쪽 더듬이는 춤을 향해 뻗어 있었다. 1993년, 국내에 댄스스포츠가 처음 들어왔을 때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해 드디어 '자이브'를 배웠다. 오랫동안 굳어있었던 내 몸의 춤 세포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것 같았다. 퇴직한 뒤 본격적으로 이 길을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03년 경기대 사회교육원에서 댄스스포츠 코칭 아카데미 1급 자격증을 1년 만에 땄다.
춤을 배우면서 느낀 것은 춤을 잘 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춤을 잘 가르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엔 국내의 이론적인 배경이 너무 열악했다. 2004년 쉰둘의 늦은 나이에 100년 전통을 가진 영국의 댄스 스쿨 '셈리(Semley) 스튜디오'로 가서 국제 지도자 자격증을 땄다. 귀국 후 체계적으로 댄스 용어를 정리하고 댄스스포츠 관련 책도 4권 냈다. 8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댄스 관련 글을 써서 블로그나 잡지에 기고하고 있다. 얼마 전 내 이런 사연을 보건복지부에서 주최한 '액티브 시니어 공모전'에 보내 당선됐고, 최근 등단해 한국문인협회의 정식 회원도 됐다.
춤은 내게 제2의 인생을 열어줬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요즘 노인요양원 복지사들에게 댄스스포츠를 가르치고 있는데 노인 한 분이 뒤통수를 후려치며 말씀하셨다. "여기가 어디 카바레인 줄 아냐?" 많은 이와 건전하고 아름다운 춤을 나누는 일, 그게 내 남은 인생의 목표다. 나는 오늘도 외친다. "셸 위 댄스(Shall we dance·춤 추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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