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과 함께 새 인생이 시작됐다, 자전거 바퀴 돌리며 세상에 희망 주련다"
"폐암 4기입니다."
높은 절벽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찰나의 공포와 절망. 쉰여덟 해 동안 꿋꿋이 뿌리내린 내 삶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듯했다. 하염없는 눈물만 뺨을 타고 흘렀다.
침묵을 깨뜨린 건 아내였다. "여보, 가요. 우리, 암을 새로운 친구로 맞아들여요." 아내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하지만 아내의 눈동자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나 역시 몹시 떨고 있었다. 딱 1년 전 일이다.
내 삶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인생의 늘그막에 만난 내 소중한 인연, 아내의 것이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2007년 결혼했다. 나는 초혼(初婚)이었고 아내는 사별한 뒤 재혼이었다. 젊은 시절 해외 생활을 많이 한 나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어 결혼하지 않고 쉰다섯까지 혼자 살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아내 때문에라도 나는 살아야 했다.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네 번 했다. 누워서 아무 생각 없이 TV만 보면서 무기력한 일상을 이어갔다. 보다 못한 아내는 산책을 권했다. 함께 저녁마다 뒷산을 산책하다 보니 조금씩 기력이 돌아왔다. 바위틈 꽃이, 산들바람이, 자그만 돌멩이가 병마(病魔)에 굳어 있던 내 몸을 보드랍게 간질였다. 어느덧 등산이 가능할 정도로 몸이 회복됐다.
북한산 정상에 오른 날 아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보, 우리 약속했던 자전거 세계 일주 추진할까?" 까마득하게 잊었던 계획이 그제야 떠올랐다. 나와 아내는 내년 5월 내가 퇴직하면 자전거로 세계 여행을 할 계획이었다. 문득 남은 시간을 아껴 나와 내 가족, 그리고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암 환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온 시간을 이타적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나는 한 일본 종합상사의 서울지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줄곧 무역업에 종사했다. 한때 서울 압구정동에서 수입회사를 운영하면서 꽤 재미를 봤지만 영화(榮華)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6년 사업을 접고 호주 로 이민을 갔다. 그곳에서 근 20년 동안 무역회사를 하다가 2005년 귀국해 가구 수입업을 했지만 또 실패를 겪었다. 그러고 나서 새로 찾은 일이 지금 하고 있는 주한 스리랑카 대사관의 노무관직이다.
이런 해외 경험을 살리면서 자전거 여행 계획도 실천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결론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암 환자를 돕기 위한 자전거 세계 여행'을 해서 자선단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암을 극복한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이 암 투병 환자를 후원하기 위해 만든 '랜스 암스트롱 재단' 같은 것이다. 자전거는 이런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도구였다. 암 환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No pain, no gain(고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이라는 메시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슷한 해외 단체 사이트를 뒤적이며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당장 복용하고 있는 암 치료제 제조 회사를 비롯해 미국 대학, 기부단체 등 100여개 단체에 협조 요청 편지도 보냈다. 신기하게도 일을 벌이자 도와주겠다는 이가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스리랑카인 1등 서기관이 영문 편지를 고쳐주고 사무실 옆 건물에 사는 젊은 디자이너들은 내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게 예쁜 로고와 슬로건을 만들어주겠노라 했다. 근처 커피숍 주인도 발벗고 나섰다. 교회에서 만난 청년은 웹페이지를 영어로 해석하는 작업에 동참하겠다고 했다. 암이 새로운 인생의 친구들을 불러온 것이다.
현재 생각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가칭은 '사이클링 포 큐어(Cycling for cure·치유를 위한 자전거 타기)'이다. 일단 내년 초부터 자전거로 국내 여행을 하면서 암 투병을 하고 있는 환우(患友)들을 찾아갈 계획이다. 암 치료제 제조회사에서 보내준 암 투병 환자들의 리스트를 보며 한 명 한 명 찾아갈 것이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주말이면 2~3시간씩 자전거를 타게 된다.
아직 계획이 영글려면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희망을 공유하는 여행을 함께 만들 기획자, 여행 관리자도 필요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재능을 기부해 줄 이도 필요하다. 내 여행은 언제, 어디서 갑자기 멈출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착한 자전거 여행'으로 피우기 시작한 2막의 새 삶이 많은 이의 가슴을 타고 흘렀으면 좋겠다.
높은 절벽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찰나의 공포와 절망. 쉰여덟 해 동안 꿋꿋이 뿌리내린 내 삶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듯했다. 하염없는 눈물만 뺨을 타고 흘렀다.
침묵을 깨뜨린 건 아내였다. "여보, 가요. 우리, 암을 새로운 친구로 맞아들여요." 아내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하지만 아내의 눈동자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나 역시 몹시 떨고 있었다. 딱 1년 전 일이다.
↑ [조선일보]호주에서 살 때 현지 문화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을 때 모습.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네 번 했다. 누워서 아무 생각 없이 TV만 보면서 무기력한 일상을 이어갔다. 보다 못한 아내는 산책을 권했다. 함께 저녁마다 뒷산을 산책하다 보니 조금씩 기력이 돌아왔다. 바위틈 꽃이, 산들바람이, 자그만 돌멩이가 병마(病魔)에 굳어 있던 내 몸을 보드랍게 간질였다. 어느덧 등산이 가능할 정도로 몸이 회복됐다.
북한산 정상에 오른 날 아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보, 우리 약속했던 자전거 세계 일주 추진할까?" 까마득하게 잊었던 계획이 그제야 떠올랐다. 나와 아내는 내년 5월 내가 퇴직하면 자전거로 세계 여행을 할 계획이었다. 문득 남은 시간을 아껴 나와 내 가족, 그리고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암 환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온 시간을 이타적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나는 한 일본 종합상사의 서울지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줄곧 무역업에 종사했다. 한때 서울 압구정동에서 수입회사를 운영하면서 꽤 재미를 봤지만 영화(榮華)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6년 사업을 접고 호주 로 이민을 갔다. 그곳에서 근 20년 동안 무역회사를 하다가 2005년 귀국해 가구 수입업을 했지만 또 실패를 겪었다. 그러고 나서 새로 찾은 일이 지금 하고 있는 주한 스리랑카 대사관의 노무관직이다.
이런 해외 경험을 살리면서 자전거 여행 계획도 실천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결론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암 환자를 돕기 위한 자전거 세계 여행'을 해서 자선단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암을 극복한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이 암 투병 환자를 후원하기 위해 만든 '랜스 암스트롱 재단' 같은 것이다. 자전거는 이런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도구였다. 암 환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No pain, no gain(고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이라는 메시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비슷한 해외 단체 사이트를 뒤적이며 구체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당장 복용하고 있는 암 치료제 제조 회사를 비롯해 미국 대학, 기부단체 등 100여개 단체에 협조 요청 편지도 보냈다. 신기하게도 일을 벌이자 도와주겠다는 이가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스리랑카인 1등 서기관이 영문 편지를 고쳐주고 사무실 옆 건물에 사는 젊은 디자이너들은 내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게 예쁜 로고와 슬로건을 만들어주겠노라 했다. 근처 커피숍 주인도 발벗고 나섰다. 교회에서 만난 청년은 웹페이지를 영어로 해석하는 작업에 동참하겠다고 했다. 암이 새로운 인생의 친구들을 불러온 것이다.
현재 생각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가칭은 '사이클링 포 큐어(Cycling for cure·치유를 위한 자전거 타기)'이다. 일단 내년 초부터 자전거로 국내 여행을 하면서 암 투병을 하고 있는 환우(患友)들을 찾아갈 계획이다. 암 치료제 제조회사에서 보내준 암 투병 환자들의 리스트를 보며 한 명 한 명 찾아갈 것이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주말이면 2~3시간씩 자전거를 타게 된다.
아직 계획이 영글려면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희망을 공유하는 여행을 함께 만들 기획자, 여행 관리자도 필요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재능을 기부해 줄 이도 필요하다. 내 여행은 언제, 어디서 갑자기 멈출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착한 자전거 여행'으로 피우기 시작한 2막의 새 삶이 많은 이의 가슴을 타고 흘렀으면 좋겠다.
'중년부부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춤선생'으로 변신한 산업戰士의 유혹 "셸 위 댄스?" (0) | 2011.09.29 |
---|---|
신용보증기금에서 20년 일한 뒤전업 사진작가 된 민걸식(62)씨 (0) | 2011.09.29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어, 지금이 내 인생 '9월의 이틀'" (0) | 2011.09.29 |
나이가 들어도 청춘 처럼 사는 요령 (0) | 2011.09.28 |
소중한 사랑과 우정 (0) | 2011.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