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를 졸업하고 신용보증기금에 취업했다. 전공이 특이해서였는지, 입사 1년 만에 미국에 연수 갈 기회가 생겼다.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벼슬이라도 되는 양 출국장에서부터 귀국 선물 목록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총각이었던 나는 비교적 선물 부담이 적었다. 모아둔 3개월치 월급을 털어서 당시 최고 사치품 중 하나였던 카메라를 구입해 돌아왔다.
최신 기종의 카메라 덕분에 동료들의 경조사에 자주 불려다녔다. 어린 시절 그림 그리길 좋아했던 기억, 그리고 초등학교 때 '그리기 상장'을 받아가자 굳어지시던 할아버지의 표정도 떠올랐다. "이놈아, 환쟁이가 되려고 그러느냐."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셨던 할아버지의 단호한 표정을 목격한 이후 그림 언저리에도 가지 않았던 나는 사진을 찍으며 흐릿해진 옛 열정을 가끔 추억했다.
결혼을 하고 세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직장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기술지도사·신용분석사 등 업무에 필요한 자격증을 두루 땄다. 업무는 무난했고, 동시에 지루했다. 사진은 틈틈이 취미로 즐겼다. 1980년대, 알음알음으로 함께 출사(出寫) 여행을 떠난 프로 사진작가들은 토요일 밤에 출발해 일요일 저녁 허겁지겁 짐을 싸는 나를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웃었다. 프로 작가들의 자유로운 삶이 무척 부러웠다.
직장 생활 20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회사에서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다고 했다. 외환위기 탓에 불어닥친 전국적인 명퇴 바람이었다. 앞자리 옆자리의 동료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내가 하는 일은 그중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 허무했다. 고민 끝에 명퇴를 신청했다.
20년 동안 쳇바퀴 돌듯 살다가 집에서 시간을 보내자니 불안하고 허전했다. 바람도 쐴 겸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진작가들의 출사 여행에 같이 갔다가 "사진이 인기가 좋던데, 전업 작가로 나서 보면 어떤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내 사진 판매 회사 데이터베이스를 둘러보던 나는 충격을 받았다. 판매되는 사진의 80% 이상이 외국 작가의 사진이었다. 한국인이 찍은 사진을 외국인에게 팔 수는 없을까 깊이 고민했다. 세계 사진 시장의 과반수를 장악하고 있다는 미국의 사진 위탁 판매사 '게티 이미지' 소속 작가로 이름을 올리기 위한 기나긴 도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4년간의 노력 끝에 게티이미지 정식 사진작가로 등록된 민걸식씨가 최근 평촌에서 꽃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게티 이미지 사진작가로 등록하기 위해 나는 4년을 꼬박 보냈다. 영어로 된 온라인 시험을 통과하는 데만 1년 남짓 걸렸다. 그 후 50장의 사진을 엄선해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사진을 찍기 위해 나는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유럽과 캐나다로 떠났다.
스위스 알프스 산맥의 마터호른봉을 찍을 때는 좋은 구도를 잡기 위해 개미집에 올라갔다가 온몸에 개미가 들러붙어 곤욕을 치렀다. 캐나다 한 호수의 풍경을 담으려 빙하가 녹은 얼음 같은 물에 들어가 동상에 걸릴 뻔한 적도 있다. 디지털 사진이 대세가 된 후엔 책을 쌓아 놓고 포토샵 프로그램을 익혔다. 컴맹에 가까운 나에겐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것만큼 힘든 작업이었다.
밤낮없이 사진에만 매달린 끝에 사진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 느꼈다. 새로 나온 사진을 다시 모아 담당자에게 보내길 반복했다. 필기시험 통과 3년 만인 지난해 5월, 게티 이미지에서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축하합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사진을 보내주십시오.'
독일의 한 호숫가 풍경을 찍은 작품이 가장 먼저 팔렸다. 구매자는 일본인이었다. 북한산 인수봉과 주변을 감싼 운해(雲海)를 찍은 사진은 중국에서 여러 차례 팔렸다. 미국·캐나다·독일·호주에서도 내 사진을 구입한다. 그들이 내 사진을 쓰기 위해 최고 650달러를 기꺼이 지불했다는 게 신기하고 으쓱하다.
요즘 나는 사진으로부터 많이 배우고 있다. 먹구름 사이로 잠깐 지나가는 한 줄기 햇빛이 '운명의 한 컷'을 만든다. 하루하루 변해가는 단풍의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때로는 이국땅에서 2주 넘게 마른 빵을 삼키며 한 곳에서 기다려야 한다. 쉽게 열리지 않던 두 번째 길, 그리고 그 끝에 찾아온 새 삶을 통해 나는 멀게만 보이던 꿈을 한 손에 잡고 '새로운 기다림'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