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 톤즈의 슈바이처 고 이태석신부에 관한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 글 : 건강나래 이우영 기자
이 영화는 고 이태석신부에 관한 다큐멘터리입니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9살 때 돌아가시어 이태석신부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10남매를 키웠습니다.
이태석신부는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을 마친 후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정, 다시 광주 카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합니다.
이미 자녀 중 신부와 수녀가 2명이 있기에 그가 사제의 길을 걷고자했을 때는 어머니는 반대했으나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아들의 길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수단의 톤즈에 정착하여 투병생활을 하기 전까지 톤즈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다 지난 2010년 4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고인이 되셨습니다.
<울지마, 톤즈>라는 제목의 의미는 마치 톤즈에 거주하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에게 고인이 된 자신을 떠올리며 슬퍼하지 말라는 이태석신부의 마지막 유언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울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듭니다.
이태석신부는 2003년부터 톤즈에 정착하여 아무런 시설조차 없으며 썩은 물을 먹어야하는 현실에서 톤즈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성당에서 신부로 사제의 길을 걸으면서 많은 일들을 혼자서 해내었습니다.
수단은 내전이 끊이지 않아 젊은 청년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을 정도로 대치국면이 끊이지 않는 곳이며, 가난하여 말라리아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암흑의 땅이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톤즈에 태양열로 전기를 공급하여 냉장고 안에 백신을 보관하였고.. 직접 병원을 설립하는 가하면.. 학교를 지어 학생들을 다시 학교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런가하면 바르스 밴드를 결성하여 학생들에게 직접 악기를 가르치고 한국에서 가져온 밴드복을 입혀 밴드학생들에게 음악이라는 새로운 인생을 제시합니다.
그는 자신이 한센병에 걸렸는지도 모른 채 살아온 톤즈의 한센병환자들에게 한센병환자임을 알려주고, 그들이 모여 살도록 터전을 마련해주었으며 발이 썩어 들어가 뭉개진 그들의 발모양을 일일이 그려 특수 제작한 신발을 나눠주어 신도록 합니다. 이태석신부는 톤즈인들에게 신부이자 의사이자, 선생님이었고, 지휘자이자 아버지였습니다. 오지의 땅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사제의 길을 걷는 그의 표정은 고난에 찌든 얼굴이 아니라 해맑은 아이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2008년 잠시 휴가차 한국에 들러 난생처음 건강검진을 받고 말기암 판정을 받습니다. 말기암 판정을 받고도 그를 기다리는 수단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가족과 주변인들의 만류로 결국 한국에서 16회의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수단으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투병생활을 합니다.
그냥 보통 의사로 한국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도 되는데 굳이 다시 카톨릭대학교에 다시 진학하고 졸업하고 나서도 아프리카에서 사제의 길을 걷고자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아프리카에서 고생하지 않았다면 암에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이태석신부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고, 수단에서 자신의 의지를 펼치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그를 불쌍하게 바라볼 수도 있고 너무 힘들어 보여 걱정하는 이들도 많았겠지만, 정작 그는 수단의 톤즈아이들과 생활하면서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행복해했습니다.
더욱 감동적인 점은 그가 자신을 희생하여 톤즈사람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마음가짐보다는 그저 톤즈에서 자신이 할 일을 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죽음이 안타깝고 그가 죽기 전 보여준 삶에 숭고함마저 들었습니다. 누구나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는 다짐을 하기는 쉬워도 꾸준히 실천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삶 전부를 봉사에 내던지고 거기다가 오지의 땅 아프리카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텐데 말입니다. 이태석신부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가슴이 따뜻한 의사이자 신부였으며, 아프리카에 그저 종교를 전파한 것을 넘어 생명을 살리고 그들의 영혼을 살리고 내전의 불안 속에서 배우지 못한 그들에게 학문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행복과 안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급급하고.. 내 가족과 나 자신만을 챙기느라 급급하여 늘 부족한 현실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요즘 세태에 이태석신부의 이야기는 어쩌면 조금 모자란 사람의 인생이라고 측은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강한 주장을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피력하지 않아도 그저 톤즈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환하게 웃는 이태석신부의 해맑은 표정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아주 가끔 봉사하면서 느낀 봉사의 행복을 앞으로는 좀 더 자주 느끼고 살아야겠다고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좀 더 나눠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좀 더 나눠주고자 하는 마음을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봉사는 결국 남을 돕고 살리지만, 피폐된 자신의 영혼도 살리는 숭고한 일이니까요~ *^^*
고 이태석신부의 명복을 빕니다. 당신의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
말라위의 '나이팅게일'
아프리카 奧地에 '최고 병원' 세운 간호사 백영심씨… 故이태석 신부와 닮은 삶
[21년 전 무작정 아프리카로] "더 어려운 환자들 찾아가자" 마사이族 '소똥 집' 살며 봉사
[병 고쳐주는 '시스터 백'] 500명 사는 마을에 진료소… 소문 나자 하루 100여명 몰려
[병원 지었지만… 자신은 癌에] 대양상선 정유근 회장 쾌척
전 세계 NGO들이 장비 기증… 암투병 중에도 환자 곁으로
"2009년 여름 병원에 한 산모가 급히 실려왔습니다. 세 쌍둥이를 출산했는데 저체중이었던 아이들과 출혈이 심했던 산모가 위독했어요. 인큐베이터가 없어 아이를 둘 곳이 없었는데, 한 간호사가 주도해 플라스틱으로 임시 인큐베이터를 만들어 세 아이를 살려냈습니다. 건강하게 눈을 뜬 산모와 가족은 '예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며 연방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어요."
몇해 전까지만 해도 치료받지 못한 아이들이 하루가 멀다고 죽어나가던 아프리카 말라위에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인구 5만명당 의사 1명이라는 열악한 의료 환경을 가진 말라위에서 최고(最高) 시설을 갖춘 '대양누가병원'에서다. 이 병원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말라위의 천사'로 불리는 한국인 간호사 백영심(49)씨다.
- ▲ 백영심씨 제공
제주도에서 태어난 백씨는 제주여고와 제주간호대를 졸업하고 1984년부터 고려대 부속병원에서 내과 간호사로 일했다.
하지만 더 어려운 환자를 위해 일하고 싶었던 그는 한국의 큰 병원에 머물지 못했다. 의료 선교에 나서기로 작정하고 1990년 28세의 나이에 아프리카 케냐로 갔다. 케냐 마사이 부족에서 소똥으로 집을 짓고 의료 봉사를 하던 그는 1994년 다시 케냐보다 의료 환경이 더 열악한 말라위 치무왈라로 떠났다.
주민 500명이 살고 있던 치무왈라에 도착한 백씨가 맨 먼저 시작한 일은 현지인들 도움을 받아 벽돌을 직접 만들어 약 99㎡(30평) 규모 진료소를 짓는 일이었다. 옥수수 가루로 죽을 만들어 먹을 때도 있었고 고향 생각날 때는 쌀밥을 지었다.
구릉지였던 곳에 진료소가 생기자 하루 100명 이상이 몰렸다. "아침 문을 열기 전부터 와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픈 것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거죠."
치무왈라에 병을 고쳐주는 '시스터 백'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다른 마을에서도 진료를 와달라고 요청했다. 2004년 여름 말라위에서 처음 백씨를 본 뒤 한국과 말라위를 오가며 봉사하는 홍민희 을지대 간호학과 외래교수는 "149㎝의 작은 키에 하얀색 가운을 입은 한국 여인은 누구보다 추진력이 강했다"고 했다.
그러나 진료소는 직원과 약품 모두 부족했다.
"5살짜리 어린아이가 엄마 등에 업혀 들어왔습니다. 수술에 필요한 도구도 모자랐고 수혈해 줄 피도 없었어요.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아이는 숨졌죠. 무릎 꿇어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저들을 도와줄 수 있는 큰 병원을 지어 달라고요." 백씨는 그때부터 큰 병원 건축을 도울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2005년 하반기 어느 날 외래진료를 가기 위해 차를 몰고 있던 백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홍 교수는 "백 간호사가 전화를 끊고 차를 멈추더니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양상선 정유근 회장이 백씨 소문을 듣고 사재를 털어 현지에 큰 병원을 짓고자 전화한 것이다. 정 회장은 '나중 돈을 벌면 아프리카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고 다짐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말라위 한인 교민을 만나 백씨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2008년 2월, 정 회장의 33억원이 들어간 '대양누가병원'이 말라위 릴롱궤에 완공됐다. 완공식엔 무타리카 말라위 대통령이 참석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80병상으로 시작한 이 병원은 이후 200병상으로 증축됐다.
개원 첫날 이 병원엔 346명의 환자가 몰렸고, 2009년 한 해 1333명의 신생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현지인들은 이 병원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병원 설립 취지를 들은 일본 NGO는 CT 촬영 기계를 기증했고, 한국 정부는 KOICA(한국국제협력단)를 통해 초음파 의료장비를 줬다. 대만·노르웨이·스코틀랜드 등 여러 나라 NGO 단체도 병원에 힘을 보탰다. 대양상선에서는 지금도 한 달에 최소 1억원 이상 지원한다. 작년 10월엔 병원 옆에 간호대학도 세웠다.
작년 말 한국에 잠시 들렀던 백씨는 최근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건강검진을 통해 '갑상선 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목의 통증은 여전하다고 했다. 치료를 위해 6개월에 한 번씩 한국을 들러야 한다.
목이 아파 크게 말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백씨는 지난 20일 인천공항을 통해 다시 말라위로 떠났다. 공항에서 백씨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의사가 부족합니다. 얼른 다시 돌아가 의과대학 설립 방안을 찾아야겠습니다."
백씨를 보고 아프리카 남(南)수단 톤즈에서 의료·교육봉사 활동을 펼쳐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이태석 신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 신부는 작년 1월 48세의 나이로 선종(善終)했다. 이 신부의 활동은 지난해 개봉된 다큐 영화 '울지마 톤즈'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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