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의 딸·김지하의 아내… 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
- ▲ 김지하를 낫게 한 장병두옹.
"남편 정신병원 12번 입원, 그리고 완치… 밖에선 김지하를 잘 몰라"
옥중의 김지하를 순교자 만들려는 계획거절하자 운동권서 따돌림
출감 후 이혼할 결심도 운동권측과의 갈등으로 남편, 정신발작 일으켜
어느 날 김지하(金芝河) 시인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지금까지 내가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이젠 완전히 나았어요. 잠을 자도 꿈에 안 시달려요. 병원·한의원 어디서도 못 고친 걸 장병두 할아버지가 낫게 해줬소. 내 처와 자식들도 그렇게 나았소. 그런 분을 의사 면허증이 없다고 환자를 못 보게 막습니다. 법과 제도가 사람 살리는 걸 막고 있는 격이오. 그분 연세가 105세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소. 전통 춤·노래·공예 부문에 ‘인간문화재’가 있듯이, 그분을 전통의술 부문 ‘인간문화재’로 만들 순 없겠소. 그분 비방이 합법적으로 전수될 수 있게 말이오.”
장병두옹은 사회적 논란이 됐던 인물이다. 한쪽에서는 그를 ‘현대판 화타’로 떠받든다. 암·당뇨·간질·백혈병·중풍 등 난치병을 그가 고쳐왔다는 것이다. 다른 쪽에서는 한낱 ‘무면허’ 한의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2006년 의료법 위반 혐의로 고발됐다. 이는 제도의학과 민간의술의 충돌이기도 했다. 그는 1·2심에서 똑같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그 뒤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고령(高齡)의 나이를 감안해 판결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그에 대한 검증은 사실 불가능하다. 설령 그의 치료 효과를 봤다 한들 또한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지하가 그동안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모처럼 그 가족이 ‘건강’해졌다는 스토리는 들을 만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강원도 원주로 가서 김지하 대신 부인 김영주(65)씨를 만났다. 김지하보다는 좀 더 객관적으로 얘기할 것 같았다. 토지문화관 관장인 그녀는 어머니 박경리(朴景利)를 쏙 빼닮았다. 말에는 경상도 억양이 남아있었다.
“외부에서는 김 시인(김지하)이 어떠했는지 몰라요. 출감(1980년)한 뒤로 늘 술에 절어 살았죠. 5년쯤 지나니 도저히 못 참겠더라. 제가 이혼하려고 했어요. 김 시인이 ‘이혼은 못 한다. 대신 당신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해서, 환경을 바꾸면 좋아질 것 같아 전남 해남으로 이사갔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김 시인의 속을 뒤집어 놓았어요. 그들이 떠나간 뒤 헛소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소위 운동권 동지·후배들의 집단따돌림, 이에 대한 분노·배신감·피해의식 등이 복잡하게 작용했겠지요. 그때부터 정신병원에 12번이나 입원했어요. 발광해 들어가면 약을 한 주먹씩 먹였어요. 몸이 고릴라처럼 부어 멍하게 앉아있어요. 조금씩 약을 줄여가고 그렇게 1년쯤 지나면 사회 활동을 합니다. 세상 일에 대해 못 견뎌했어요. 그러다가 다시 발작하고. 1991년 시위 때 분신자살이 유행하자, 운동권 세력을 향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조선일보에 쓴 것도 그러했던 거죠.”
당시 나는 현장을 취재했다. 아침에 눈뜰 때면 ‘지금 어디서 누군가 또 자살할지 모른다’고 괴로워했다. 열댓명이 ‘민주화’라는 명목으로 유행처럼 자살했다. 그때 김지하가 작심하고 쓴 ‘죽음의 굿판’ 칼럼은 세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운동권 동지·후배들로부터 욕설과 비난, 협박 전화가 끊이질 않았어요. 우리 집에 경찰을 보내 지켜주겠다고 했어요. 나는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스트레스를 못 견뎌 정신병원에 또 들어가고. 지나고 보면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이 저 사람의 소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 사건 이후 운동권에서는 김지하를 ‘변절자’ ‘생명사상 교주’로 욕했지요. 어린 후배조차 소위 인연을 끊었습니다.
“조직적으로 매도하고 따돌렸어요. 그 모욕감에 김 시인이 술 마시고 들어오면 대성통곡을 했어요.”
―그쪽에서 보면 ‘배신’과 ‘변절’일 수도 있지요. 김지하는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김 시인은 ‘나는 달라진 게 없다. 나는 어떤 조직에 들어간 적도 없고, 모든 운동조직은 나 스스로 만들었다. 나 자신은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니 나와 다르다면 저네들이 변절자다. 내가 변절한 적은 없다’고 했어요. 감옥에 갇혀 있을 때부터 ‘동지’라는 사람들이 김 시인을 죽이려 했고, 그게 안 되자 그를 따돌렸어요.”
―납득이 안 되는군요. 동지들이 수감 중인 그를 왜 죽이려고 하며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김 시인은 형무소에 들어갔지만 ‘투사’가 돼 죽으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렇게 7년이나 오래 독방 수감 생활을 할 줄은 자신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세력은 김 시인을 소위 민족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로 삼으려고 했지요. 박정희 체제에 더 극렬하게 저항하는 문건을 옥중에서 계속 쓰도록 요구했어요. 박정희로 하여금 김 시인을 죽이도록 해 김 시인을 ‘투사’나 ‘영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지요. 그 동력으로 박정희 체제를 엎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엄마(박경리)가 ‘동지들이 김지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했어요. 이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어요. 그러니 우리 모녀도 죽이려고 했어요. 누가 동지고 적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믿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증거도 없고. 어떤 피해의식에 근거한 망상 아닙니까?
“세상에서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것이 있어요. 당시 첫 번째 오는 택시는 안 탔어요. 그렇게 납치될 뻔한 경험을 했거든요. 이런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지나간 일은 덮고 가려고 했어요. 선과 악 모두가 당시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김 시인을 매도하고 건드려요. 그것에 쇼크를 받고 정신병원에 갑니다. 폐인에 가까운 상태였어요. 사람 사는 게 아니었어요. 발작을 일으켜 집을 나가면 제가 찾아서 병원에 데려가요. 그러면 퇴원시켜달라고 전화로 난리칩니다.”
- ▲ 김영주씨는“김지하가 정치적으로 그렇게 휘말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원주 토지문화관=최보식 기자
―김지하는 어떤 사람입니까?
“억세고 무서운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면이 있긴 하나, 순한 사람이에요. 결혼 전에 이 사람에게서 세 가지를 봤어요. 굉장히 여성적인 모습과 속이 텅텅 빈 허(虛)한 느낌, 그리고 골짜기가 많은 큰 산 같다는 인상이었어요. 앞의 둘은 부정적인 느낌이었는데 들어맞았어요. 마지막은 모르겠어요. 골짜기에 가만히 있으면 편할 것 같았는데 살아가면서 아직 그런 맛을 못 봤어요.”
―처음 어떻게 만났습니까?
“동료 문인들과 함께 정릉의 우리 집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왔어요. 제가 대학원을 졸업했을 때였어요. 그가 ‘오적(五賊)’을 발표한 시인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때는 시를 읽어보진 않았어요. 그다음 왔을 때는 ‘수배받고 있으니 숨겨달라’고 했어요.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 엄마로서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를 보내면서 마음이 안됐어요. 어릴 때 외할머니가 제게 ‘너는 복(福)이 많아 잘 살 것’이라고 했는데, 내 복의 절반을 저 사람에게 떼줬으면 했어요. 결혼 생각은 없었는데…, 결국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이었어요. 수배가 풀리자 그가 다시 나타났어요. 엄마가 결혼을 허락했어요. 하지만 내가 그런 인생을 살게 될 줄은 몰랐죠. 정치적으로 그렇게 휘말릴 줄은 몰랐던 거죠. 딸을 보면서 평생 속상해한 거지.”
―1973년 결혼하자마자 바로 이듬해 김지하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수감됐는데(당초 사형선고를 받고 감형돼 1980년 석방됐다).
“자기가 붙잡혀 들어갈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 준비를 다 해놓은 뒤였어요. 그러고는 저와 결혼을 한 거죠. 그때 결혼 안 했으면 결혼 못 했을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이었지요. 감옥에 들어가면서 생후 몇 달 안 된 아들까지 남겨놓았으니….”
―그런 남편과 같이 살았다는 점만으로도 김 관장께서는 충분히 대단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버리겠습니까. 김 시인이 멀쩡하면서 애를 먹였다면 같이 안 살죠. 병이 나서 그러니 누가 데려갈 사람도 없지, 할 수 없는 일이죠. 저는 상황에 매달려 질질 끌려왔어요. 그 상황을 책임질 수밖에 없었어요. 김 시인은 외부 강연에서는 ‘마누라 덕분에 어쩌고저쩌고’ 해놓고, 막상 조금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삐쳐요. 어떨 때는 집을 나가버려요(웃음). 하지만 매일 한 주먹씩 정신병 약을 먹고 지금껏 살아있다는 게 대단해요. 장병두 할아버지 치료를 받을 때 그 약을 끊으라고 하니 겁을 냈어요. 약 안 먹으면 잠을 못 드는데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어떻게 장병두옹의 치료를 받게 됐습니까?
“발작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이들은 상처받고 무서워했어요. 둘 다 대학을 못 갔어요. 이제 서른살이 넘었지만 결혼을 안 하려고 합니다. 아버지처럼 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무의식에 있는 것 같아요. 김 시인에게 ‘당신이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꿋꿋하게 서 있어줘야 한다’고 말해왔어요. 어느 날 큰아이가 우울증에 걸렸을 때는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그때는 제가 죽고 싶었어요. 병원에 데려가도 소용없고. 한 지인의 소개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장병두 할아버지를 찾아간 겁니다.”
―김 관장 본인도 치료를 받았다면서요.
“저도 만날 아팠어요. 하체에 감각이 없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의 약을 먹고 어느 날 앙가슴에서 울화로 맺힌 불덩어리가 확 빠져나가는 걸을 느꼈습니다. 그분으로 우리 가족 모두가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생명의 은인이지요.”
장병두옹의 구술(口述)로 엮은 ‘맘 놓고 병 좀 고치게 해주세요’란 책에서 김지하가 서문을 썼다.
‘큰아들은 나의 발광을 보고 극도의 우울증에 사로잡혔다. 작은아들도 내 발광에 놀라 뇌신경의 반이 마비돼 낮에는 자고 밤에는 깨어있다…. 두 아이가 선생에 의해 완전히 치료됐다. 우리 식구 중 끝까지 잘 치료가 안 되고 끝없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던 아내도 어느 날 몇 시간 몸부림치다 기적처럼 치유의 경험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렸는데도 김지하 마음속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와의 통화에서 “과거에 내가 어려울 때 이명박씨는 3000만원이나 도와줬다. 지난 정권 때 정신병원에 세 번이나 입원했지만 그쪽에선 아무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운동권 사람들이 많이 들어간 지난 정권에서 비리가 터져나왔을 때는 참지 못했어요. ‘도둑질이나 해먹고 너희가 인간이냐’며.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몇 시간씩 욕을 해대요. 그래서 아예 휴대폰을 빼앗아 버렸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을 때도 자살 행위를 비판해 더욱 적을 만들었지요.”
―이제 본인을 위해서라도 분노를 비우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됐습니다.
“김 시인도 그걸 알고 있어요. 할아버지도 처음 ‘서푼짜리 노여움을 풀어라’는 말부터 했어요.”
―그런데 박경리와 김지하 중 누가 더 문학적 천품을 타고난 것 같습니까?
“모두 대단한 사람이지요. 엄마는 친구도 없이 딸 달랑 하나와 살았어요. 글을 그렇게 많이 고쳐요. 파지가 산더미 같았어요. 원고를 쓰면 제게 읽어보라고 했고, 제가 고쳐주곤 했어요. 어떤 때는 제가 읽기 싫다고 하면 화를 냈지요. 너무 가까이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얼마나 큰 사람인지 몰랐어요. 김 시인은 천상 시인이에요. 모든 시가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탁월한 시들이 많아요. 하지만 산문 쓰는 것, 어려운 글 쓰는 것은 못마땅해요. 내가 ‘누구 읽으라고 그런 글을 쓰나’고 타박하면 화를 벌컥 내요. 참견한다고.”
이런 자리를 만들어준 장병두옹은 올라오는 길에 잠깐 만났다. 105세의 나이란 귀한 것이다.
김지하는 보았다, ‘한’이 꽃피울 새 문명을
김지하의 예감
김지하 세계기행문집|이룸|511쪽|1만7900원
‘바람 구두를 신은 사내’로 불리며 떠돌이로 살았던 시인 랭보는 “시인이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미래를 맑은 눈으로 보는 견자(見者)”라고 했다. 저항 시인에서 생명과 평화 사상가로 거듭난 김지하 시인은 요즘 “이 작은 한반도에서 동양과 서양의 창조적 결합을 통한 새로운 문명의 꽃을 예감한다”고 말한다. 지난 10년 동안 일본 중국 베트남 중앙아시아 유럽 미국을 떠돌아다닌 끝에 그는 견자의 입장에서 한국과 아시아 르네상스의 도래를 예견한다. 그 르네상스의 추동력은 한류(韓流) 열풍이다.
‘붉은 악마의 고정연호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대~한민국’의 ‘3박 플러스 2박’ 즉 ‘역동 플러스 안정’을 한류의 상징으로 내세운 김지하의 ‘한류’론은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무대 진출이란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신화적, 종교적, 미학적 상상력의 총체를 담은 신문명운동의 세계화를 지향한다.
- ▲ 고대 아시아와 아메리카 문명이 만나 7000개의 신화를 빚은 캄차카 반도를 찾아 문명의 시원을 탐구한 김지하 시인. /조선일보 DB
너무 거대한 꿈이라는 것을 김지하 시인도 잘 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제정신 나간 ‘도라이’는 아니다”고 한다. “오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인으로서 새 문명을 예감한다”고 한 그는 “그 새로운 문명의 꽃을 ‘한’이라 부르고 싶다”며 이 책을 썼다. ‘한’은 韓과 恨 어느 한쪽으로 축소될 수 없고, 그 모두를 아우르고, 뛰어넘는 문명의 시원이다.
시인은 조선일보에 ‘문명의 시원을 찾아서’를 연재하면서 찾아간 중앙아시아 대초원의 푸른 하늘에서 ‘한’의 얼굴을 봤다. 그는 카자흐 민속대학의 민속학연구소장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카자흐에서 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한이다.” “그 뜻은?” “영원한 푸른 하늘이다.” “알타이어로는 무엇인가?” “후에 문헤 탱그리다.” “그것은 중앙아시아와 아시아 전역에서 일률적인가?” “바로 그렇다. 거의 아시아 공통이다.”
시인은 여행을 통해 ‘한’의 뿌리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성장과 복지를 조화시킬 정치 경제적 중도(中道) 노선의 원형을 발견하기도 했다. 사마르칸트 시내의 사원 앞 시장에서 ‘여긴 신성과/ 욕망이/ 엇섞이는 사마르칸트’라고 읊은 시인은 신화 속의 신성한 시장(神市)의 향취를 느꼈다. ‘시장 경제의 교환 가치를 인정하면서 평등과 복지를 위한 호혜의 가치를 살리는 상생의 길이 고대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혼돈에 처한 인류 문명의 활로는 신시(神市)의 부활에 있고, 한류는 그 신화에서 발원한 ‘한’의 정신을 되살리고 동서양 문명을 결합하는 문화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해 미국 문화와 만나야 한다. 미국을 두번 다녀온 시인은 “미국은 쉽게 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구대혼돈에 대응할 새로운 콘텐트가 없다”며 “아시아를 압축한 한국의 새로운 콘텐트와 유럽·미국의 소프트 및 하드웨어를 결합하여 미국의 전지구적 동력을 타고 전 인류문명사를 전환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지하는 한류가 실천해야 할 민족미학을 ‘흰 그늘’이라고 부른다. 명창을 향해 ‘저 사람 소리에는 그늘이 있다’고 할 때 그 그늘이다. 그런데 ‘흰 그늘’이란 모순어법은 좀 복잡하다. 한(恨)을 삭이면서 신바람을 통해 밝은 삶의 지평을 열어가고, 어둠과 밝음을 통합하는 ‘숭고’의 미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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