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링커로 명성을 떨쳤던 조광래 ⓒ이상헌
현 대표팀 사령탑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조광래(56)는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컴퓨터 링커'로 명성을 떨쳤던 명 미드필더이다.
그는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패싱력이나 축구 센스, 기술이 탁월했다. 단순히 공격적인 면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강한 승부근성을 바탕으로 수비력까지 갖췄다. 강인한 체력으로 미드필드 전방위를 커버하며, 공격과 수비의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했다.
축구가 아닌 공부로 경남 지역의 명문 진주고(43회 입학, 44회 졸업)에 진학하기도 했던 조광래는 이후 연세대를 거쳐 포항제철(현 포항)과 대우(현 부산) 등에서 활약했으며, 1974년에 처음 대표팀에 선발되어 1978년과 1986년 아시안게임 우승, 1980년 아시안컵 준우승 등에 일조했다. 또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해 세 경기 모두 출장하며 아시아 정상급 미드필더임을 과시하기도 했다.
천재 축구소년, 축구가 아닌 공부로 진주고 진학
경남 진주에서 성장한 조광래는 진주봉래초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경남 지역의 축구 강호였던 봉래초에서도 조광래는 주장으로 활약하며 최고 선수로 각광받았다. 재능 면에서도 돋보였지만, 축구에 대한 집념이 어린 시절부터 대단했다.
"초등학교 1~2학년 시절부터 동네에서 항상 축구를 하면서 하루를 보냈었죠. 그러다가 4학년 때부터 축구부 활동을 정식으로 시작했는데, 주장을 하면서 경남에서 제일 축구를 잘한다는 소리도 들었어요.(웃음)"
"그 시절부터 축구에 대한 집념은 다른 선수들보다 컸습니다. 팀 훈련이 끝난 뒤에도 항상 집에 와서 담벼락에 패스 훈련하고, 볼 컨트롤 훈련도 하고 그랬어요. 캄캄해질 때까지 그렇게 개인훈련을 하면 모친께서 저녁 먹으러 빨리 들어오라고 소리치시곤 했죠."
그러나 조광래는 축구 뿐 아니라 공부에도 소질이 있었다. 결국 조광래는 공부로 시험을 쳐서 명문 진주중에 입학했고, 중학교 3년간 축구부 활동을 하지 않은 채 공부에만 매진했다. 그 결과 시험을 통해 역시 명문인 진주고에 당당히 진학했다.
"예전에는 중학교도 시험을 쳤었죠. 당시 진주남중과 진주중을 놓고 고민했었는데, 진주남중은 축구부가 있었고, 진주중은 축구부가 없는 대신 경남 최고 명문이었어요. 둘 다 욕심이 나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제 친구 중 하나가 진주중 시험을 친다고 자랑하는 바람에 저도 오기가 생겨 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었던 겁니다.(웃음) 진주중은 축구부가 없으니까 3년간 공부만 열심히 해서 진주고 역시 시험을 쳐서 들어갔습니다. 진주고 역시 경남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가는 학교로 유명했었죠."
ⓒKFA 홍석균
진주고에서 뒤늦게 다시 축구 시작, 엄청난 노력으로 3년간의 공백 메워
축구를 잠시 접었던 조광래는 진주고에서 결국 운명처럼 다시 축구와 마주하게 된다. 그와 봉래초에서 같이 축구를 차던 친구들 대부분이 진주남중을 거쳐 진주고로 왔던 것이다. 시험을 쳐서 들어온 조광래와는 달리 그들은 축구부가 있었던 진주고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했다.
조광래의 축구 재능을 잘 알고 있던 친구들은 진주고 축구부 감독에게 그를 추천했고, 내심 축구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던 조광래는 축구를 다시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다시 축구의 세계로 들어오게 됐다.
"축구를 하지 않았던 중학교 시절에도 방과 후에는 친구들과 반대항 축구도 하면서 거의 매일 축구와 함께 지냈었습니다. 워낙 축구를 좋아했던 터라 축구부 그만뒀다고 축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거든요. 진주고 진학 후에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시 축구부는 오전 수업만 듣고 오후에는 훈련을 했는데, 수업 듣다가 가끔 창 너머로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축구를 계속 했으면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웃음)"
"마침 봉래초에서 같이 축구를 했던 친구들이 감독님께 저를 강력하게 추천했었나 봐요. 저 때문에 여름방학 직전에 1학년만 반대항 축구대회를 열면서 감독님께서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교장실에 불려갔었죠. 감독님과 교장 선생님이 계셨는데, 축구를 잘하던데 다시 할 생각 없냐고 물으셨고, 저 역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집에서도 특별한 반대는 없었어요. 사실 봉래초 졸업할 때 동래중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었는데, 부모님께서 먼 타지에서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고 반대했었거든요. 뒤늦게 다시 제 길을 찾게 된 것이죠.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일은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응원해주셨습니다."
다시 축구부 생활을 시작한 조광래이지만, 4년에 가까운 공백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체력에서부터 동료들에 비해 훨씬 뒤처졌다. 그 때부터 조광래의 피땀 어린 개인훈련이 시작됐다.
"처음 훈련을 하는데, 체력적으로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다음 날부터 줄넘기를 하나 사서 새벽 5시쯤에 매일 진주고 뒷산인 비봉산을 올랐어요. 매일 1시간씩 뛰어서 비봉산을 올랐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지금도 새벽 5~6시 사이에 일어나는데, 그 때부터 새벽훈련 하던 습관이 남아서죠.(웃음)"
"그렇게 1시간 동안 산을 타고 오면 6시 조금 넘어서 동료들이 숙소에서 볼을 들고 훈련하러 나오기 시작했어요. 같이 볼을 갖고 훈련했죠. 그렇게 3개월 정도 하니까 체력적으로는 보완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3개월 더 훈련한 뒤에는 주전으로 경기를 뛸 수 있었죠."
다시 축구를 시작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조광래는 강호 진주고의 주전을 꿰찼다. 어렸을 때부터 기술 좋기로 유명했던 그는 진주고에서도 최고의 기술과 패싱력을 가진 미드필더로 자리매김했고, 3학년에 올라가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전국 제패도 달성하면서 고교무대에서 명성을 떨쳤다. 이런 가파른 성장에는 이유가 있었다. 조광래는 축구, 그리고 훈련 역시 머리를 써서 최대한의 효과를 만들어냈다.
"세밀한 드리블을 위해서 진주고 동산을 많이 이용했죠. 거기에는 잔디가 있었고, 그 위에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거든요. 오후 훈련이 끝나고 집에 가서 밥 먹고 저녁에 거기를 찾았어요. 잔디 위에서 드리블 하면 유연성이 생기고, 또 나무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자연스럽게 볼이 내 발 밑에 착착 달라붙게 되었죠.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제 발 밑으로 오는 볼은 잘 안 빼앗겼습니다.(웃음)"
"무엇보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조금 독특하게 훈련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기술과 축구를 보는 시야가 좋다는 평을 들었는데, 그 이유가 단순히 드리블 훈련을 해도 실전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했어요. 어떤 훈련을 해도 게임과 연관시켜서, 실전을 하고 있다는 의식으로 했죠. 아무런 목적 없이 훈련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것은 없습니다."
"지금도 지도자를 하면서 선수들에게 가장 답답한 것이 그것이에요. 예를 들어 피지컬 훈련을 하면 선수들은 게임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그냥 체력 훈련을 한다는 의식만 하고 있어요. 내가 왜 이 동작을 하는지에 대해 궁금증이 없습니다. 러닝 훈련을 할 때에도 항상 105m의 시야를 봐야 해요. 축구장이 105m 잖아요. 항상 그런 의식을 갖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제가 늦게 축구를 다시 시작했어도 빨리 성장할 수 있었죠. 지금 선수들도 훈련할 때 이것이 실전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상황들을 머리에 그리면서 한다면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훈련을 하더라도 더 빠른 성장을 할 겁니다."
조광래의 특기 중 하나였던 아웃 프런트 패스 역시 이 시기에 갈고닦아 최고의 무기가 되었다. 미드필드에서 아웃 프런트로 좌우 공간으로 찔러주는 패스는 조광래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아웃 프런트 패스 훈련은 학교 강당에서 많이 했습니다. 벽치기를 하면서 볼이 튀어나오면 컨트롤하면서 우리 편이 빠져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순간적으로 아웃 프런트 킥으로 찔러주는 훈련이었어요. 그 훈련 하면서 강당 유리창도 가끔 깨곤 했었는데...(웃음) 아웃 프런트 패스의 장점은 볼을 가진 자세로 볼 때 도저히 그 방향으로 패스가 갈 수 없는 상황에서 볼을 보낼 수가 있다는 점이었어요. 상대로서는 예상 외의 방향으로 패스가 날아가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죠."
대표팀의 사우디 원정 모습(아랫줄 맨 오른쪽이 조광래)
치열한 경쟁 끝에 연세대 진학, 1학년 때 대표팀 선발
진주고에서 이름을 떨친 조광래를 원하는 대학들은 많았다. 축구 명문 대학 팀들이 열띤 경쟁을 펼쳤지만, 사실상 조광래를 잡은 쪽은 건국대였다. 당시 진주고 감독이 건국대 출신이었고, 진주고가 서울에서 경기를 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여기에 조광래가 입학한다면 진주고 숙소를 새로 지어주겠다는 약속까지 한 상황이었다.
"원래 건국대를 가려고 했었어요. 당시 건국대에서 저를 데려간다는 조건으로 진주고에 많은 편의를 제공했었거든요. 원래 용돈도 주겠다고 했었는데, 제가 차라리 진주고 숙소를 새로 지어달라고 해서 그것까지 약속을 받은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고향의 주위 분들은 연세대나 고려대로 가라고 그러셨지만, 저는 건국대로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변수가 등장했다. 진주 출신의 연세대 선배 한 명과 김지성 연세대 감독이 직접 진주로 내려와 조광래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입학식을 마칠 때까지 조광래는 연세대 숙소에서 꼼짝없이 지내야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카우트 방법(?)이었다.
"어느 날 새벽훈련을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더라고요. 그래서 나갔더니 잠시 차에 타라고 해서 탔는데, 그 길로 연세대 숙소로 직행했어요.(웃음) 그리고 입학식까지 거기서 지내야 했죠. 저 말고도 허정무, 박종원, 최종덕, 박성화 같은 또래 선수들은 다 이런 일을 겪었어요. 연세대 말고 다른 학교들도 이런 방법을 썼던 겁니다."
이렇듯 우여곡절 끝에 연세대에 입학한 조광래는 놀라운 승부 근성으로 1학년 때부터 주전을 차지했다. 쟁쟁한 선수들 틈에서 그는 철저한 자기 관리와 훈련으로 실력을 쌓아갔고, 결국 주전을 꿰찼던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잘 알고 있죠.(웃음) 1학년 때부터 훈련에 모든 초점을 맞췄어요. 보통 대학 들어가면 훈련 마치고 당구장에도 자주 가고 그러거든요. 저 역시도 처음에는 갔었죠. 그런데 보통 당구를 치고 나면 선배들이 데리고 가서 술도 마시게 하거든요. 몇 번 그렇게 하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당구를 끊어버렸습니다. 당구를 처음 배울 때 얼마나 눈에 선해요. 밤에 누우면 천장에 당구대가 나오고 그러잖아요.(웃음) 그런데 2차로 술 마시러가기 싫어서 끊은 거예요."
"그리고 이제 성인축구레벨에서 경쟁해야 하니까 체력을 더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침 연세대 백양로 입구에서 상경대 건물까지 도로 가운데에 작은 나무를 심어놨길래 아침에 일어나서 거기를 매일 뛰어넘으면서 올라갔어요. 점프력과 체력을 동시에 키우는 것이었죠. 그런데 막판쯤 되면 힘이 떨어져 점프도 낮아지잖아요. 사타구니 쪽에 가시가 찔려 고통도 많이 받고 그랬어요.(웃음)"
이런 조광래의 처절할 정도의 노력은 연세대 주전을 넘어서 대표팀 발탁이라는 큰 선물까지 안겼다. 1학년 말이었던 12월에 조광래는 또래 동기들인 허정무, 박성화, 박상인, 최종덕, 박종원, 김강남-김성남 형제 등과 함께 대표팀 세대교체의 기수가 되었다. 당시 대표팀은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의 실패 이후 세대교체를 꾀하며 미래를 도모하는 시기였다.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실패하면서 우리 또래 선수가 12명 정도 대표팀에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한 부분도 있었죠. 축구를 시작하면서의 목표가 대표 선수가 되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대표팀에 들어가서 보니까 역시 한국 최고의 선수들을 모아놓으니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표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빠른 생각과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축구 지능의 문제였어요.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리그에서는 별로 단점이 보이지 않는 선수도 대표팀에서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부분이 축구 지능인 것 같아요. 그래서 축구에 대한 공부를 더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항상 경기가 끝난 후에는 제 나름대로 분석을 했어요. 저에 대한 분석과 함께 팀에 대한 분석도 했죠. 이런 부분이 선수 생활에 있어서도 도움이 됐지만, 나중에 지도자가 되었을 때까지 생각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노력들이 조광래를 오랜 기간 대표팀에 머물게 만들었다. 그는 86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11년 동안 대표팀의 주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대표팀은 수준이 높죠. 경기 운영 능력이나 플레이 스피드, 지능적 플레이 등이 높기 때문에 생각의 속도를 더 높여야 했습니다. 선수 때부터 줄곧 생각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오랜 기간 대표팀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 같네요."
1984년 대우에서 K리그 우승을 차지할 당시(오른쪽) ⓒ월간축구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우승, 그리고 80년 아시안컵의 아쉬움
1975년 박스컵부터 대표팀에 몸담은 조광래는 1977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예선부터 본격적으로 대표팀의 중심 멤버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북한과 공동우승을 차지하며 대표팀에서의 입지를 굳혔다.
"기본을 잘 갖춘 선수는 언젠가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어요. 당시 미드필드에는 이차만, 박병철 등 좋은 선배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꾸준히 연구하고 노력했었죠. 그러면서 기회를 점차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1980년 쿠웨이트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도 조광래는 이영무, 이강조 등과 호흡을 맞춰 허리를 책임졌다. 대표팀은 첫 경기에서 말레이시아와 1-1로 비기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으나 이후 연승을 거두며 4강에 안착했고, 북한과의 명승부 끝에 2-1로 이기고 결승까지 진군했다. 결승전 상대는 예선에서 3-0 대승을 거뒀던 쿠웨이트. 그러나 대표팀은 손쉽게 이길 것으로 생각했던 쿠웨이트에게 0-3으로 허무하게 패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예선에서 쿠웨이트를 대파했었기 때문에 조금 우습게 본 것이 사실이에요. 그리고 준결승전에서 정말 부담이 컸던 북한을 2-1로 꺾으면서 결승전을 하기 전부터 우승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심리 컨트롤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1골을 기습적으로 허용한 이후에는 갑자기 급해지면서 서두르기 시작했죠. 결국 역습으로 계속 골을 내주면서 무너졌어요. 지금 아시안컵을 준비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런 심리적인 부분의 컨트롤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선수들에게 계속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대표팀에서 조광래는 '컴퓨터 링커'라는 별명답게 탁월한 패싱력과 시야를 바탕으로 공수의 연결고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여기에 덧붙여 풍부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한 수비력을 보여줬고, 적재적소에서 상대 공격의 맥을 끊는 파울을 구사하며 팀의 살림꾼 역할도 해냈다.
"제가 현역 시절에 파울을 많이 했어요. 대부분 상대 공격의 흐름을 끊는 파울이었죠.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수비 시에 제 뒤에 누가 있는지를 확인했어요. 현재 우리 팀의 수비 상태가 어떤지를 확인하고, 그에 따른 수비를 구사하기 위해서였죠."
"중앙에 볼이 있는데, 뒤 수비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섣불리 덤벼들었다가는 위험한 상황에 빠지죠. 그럴 때는 지연 플레이를 펼쳐야 합니다. 만약 수비와 공격의 수가 동수라면 저는 볼을 빼앗기보다는 측면으로 모는 수비를 펼쳤어요. 그 후에 프레싱을 가했죠. 이렇듯 선수라면 항상 주위 상황을 보면서 수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현대축구는 기술 있고 패싱력만 갖춘 선수로는 안 됩니다. 11명이 다 공수에 가담해야 해요. 한 사람에게 의존하면 경기 템포가 늦어지고, 그래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저는 미드필더로서 기술과 패싱력이 있었지만, 수비력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드필드는 공수의 포인트 지점이에요. 거기서 무너지면 수비도 무너집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수비했죠. 작은 체구였지만, 태클 훈련도 많이 하고, 헤딩 훈련도 많이 했죠. 낙하 지점을 잘 찾기 위해 노력했고요. 미드필드가 복잡한 지역인 만큼 짧은 거리의 순발력, 민첩성 훈련에도 많이 신경 썼습니다. 좁은 지역에서의 스텝 훈련을 정말 많이 했죠. 아마 5m 거리를 뛰는 것은 한국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죠. 차범근 선배와 100m를 뛰면 20m 이상 차이가 나겠지만, 5m는 제가 더 빠르다고 자부합니다.(웃음)"
이런 영리함과 성실성 때문인지 감독들은 조광래에게 특별한 주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표팀에서 오랜 기간 조광래를 지도했던 김정남 감독(현 프로축구연맹 부회장)도 "조광래는 알아서 하니까 별다른 주문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의 모습(왼쪽에서 6번째) ⓒ한국축구100년사
차범근과의 인연, 그리고 독일 진출에 대한 아쉬움
대표팀에서 생활할 때 조광래가 가장 감탄했던 인물은 차범근(전 수원 감독)이었다. 조광래는 차범근의 축구에 대한 성실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포지션상으로도 주로 오른쪽 미드필더를 봤던 조광래는 오른쪽 윙이었던 차범근과 호흡을 자주 맞췄다. 이들은 팀 훈련 외에도 개인훈련을 함께 하는 등 유대감을 키웠다.
"사실 저도 성실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인데, 차범근 선배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차 선배는 원체 체력과 스피드, 폭발력이 대단했었거든요.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축구에 대한 성실성이었어요. 저도 더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을 들게 할 정도였죠."
"차 선배와의 에피소드도 떠오르는군요. 사실 당시에는 선후배 사이가 상당히 엄격했어요. 그런데도 경기 도중에 제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냐고 말하면 다른 선배들보다 훨씬 긍정적으로 잘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둘 다 오른쪽에서 뛰었기 때문에 컴비네이션 측면에서 잘 맞았죠."
"한 가지 덧붙인다면 팀 훈련이 끝나면 둘이서 개인훈련을 함께 하기도 했어요. 당시 차 선배는 유럽 진출을 위해 개인 기량을 더 연마하는 상황이었고, 저 역시 기량 향상을 위해 뭐든지 할 때였죠. 서로 1대1 훈련을 했는데, 당시 차 선배에게 '형, 드리블할 때 치고 뛰면 어차피 내가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러면 훈련이 안되니까 내 행동반경 안에서 짧게 드리블을 쳐라. 그런 부분이 형이 부족하니까 발전시켜야 한다'라고 조언했던 기억이 납니다. 반대로 저는 하드웨어와 스피드가 뛰어난 차 선배를 상대로 드리블 훈련을 할 수 있었고요."
이후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로 진출해 성공시대를 열었고, 이후 프랑크푸르트와 함께 금의환향했다. 차범근이 소속된 프랑크푸르트는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경기에 앞서 프랑크푸르트를 비롯한 독일 클럽들이 조광래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흘렀다. 조광래 역시 이를 의식해 훈련의 강도를 더욱 높였는데, 오히려 이것이 불운의 씨앗이었다. 프랑크푸르트와의 경기를 앞두고 조광래는 훈련 중 부상을 입어 정작 경기에는 뛰지 못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차범근 선배가 프랑크푸르트 감독에게 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 들었어요. 아마도 예전에 함께 개인훈련 했던 것도 생각나고 해서 저를 추천했었나 봐요. 그래서 이번에는 뭔가 보여주겠다면서 엄청 열심히 훈련했죠.(웃음) 그런데 개인훈련을 하다가 허들을 뛰어넘는 과정에서 다리가 걸려서 허벅지 근육이 늘어나버렸어요. 결국 경기를 앞두고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독일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셈이라 너무 아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했던 대표팀(아랫줄 오른쪽 2번째가 조광래) ⓒ한국축구100년사
86년 멕시코 월드컵에 나서다
이후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과 1984년 싱가포르 아시안컵에서 실패를 맛본 조광래와 대표팀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도전한다. 대표팀은 아시아예선에서 숙적 일본을 꺾고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획득했다.
그리고 처음 맞이한 월드컵 무대. 첫 경기 상대는 우승후보 아르헨티나였다.
이 경기에서 대표팀은 '최고 스타' 디에고 마라도나를 막기 위해 주전 미드필더였던 조광래를 대신해 김평석을 선발 투입, 전담마크를 시켰다. 그러나 18분 만에 2골을 내주면서 무너졌고, 결국 조광래는 전반 22분에 교체 투입되어 피치를 밟게 됐다.
"원래 제가 선발멤버였는데, 아르헨티나전을 바로 앞두고 아무래도 불안했는지 저 대신 김평석을 마라도나 전담 마크맨으로 기용했어요. 사실 우리는 국제무대 경험이 전혀 없는 것과 같았거든요. 기껏해봐야 외국 클럽 불러서 국내에서 평가전 했던 것이 전부였죠. 세계축구의 수준과 우리의 수준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모두가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8분 만에 2골을 내주면서 감독님이 저보고 빨리 나가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급히 준비하고 나갔죠. 사실 전반은 견딜 줄 알았기 때문에 조금 얼떨떨한 상태로 투입되긴 했어요. 그러나 적응은 의외로 빨리 했죠. 사실 평석이가 마라도나 마크에만 신경 쓰느라 전체적인 밸런스가 흐트러지면서 박창선 혼자 중원에서 감당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제가 투입되면서 박창선과 호흡을 맞춰 연결 플레이가 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안정이 되면서 후반 들어서는 제법 대등한 경기를 펼쳤어요. 박창선의 골도 터졌고...경기가 끝나고 감독님께 이왕 이렇게 된 거 2차전부터는 우리가 하던 대로 해보자고 말씀드렸죠. 그래야 다음 월드컵에서 후배들이 뭔가 준비할 수 있지 않겠냐고요. 코칭스태프도 모두 동의해서 이후에는 준비한대로 경기를 펼쳤습니다."
결국 대표팀은 동구권의 강호 불가리아와의 2차전에서 수중전을 펼치며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한국축구가 월드컵에서 얻은 첫 승점이었다. 조광래는 이날 경기에서 폭우 속에서도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뛰어다니며 대표팀 허리를 책임졌다. 김종부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한 것도 그였다. 그리고 결국 근육 경련을 일으키며 후반 27분에 교체되어 나갔다.
"그 때는 정말 많이 뛰었습니다. 아마 제 축구 인생에서 가장 많이 뛰었던 경기가 아닐까 싶어요.(웃음) 제가 근육 경련이 거의 없었는데, 그 날 근육 경련으로 교체됐잖아요. 그 정도로 많이 뛰었어요. 그래도 결국 제가 어시스트해서 종부가 동점골을 넣었죠."
전 대회 우승팀 이탈리아를 상대로도 대표팀은 선전을 펼쳤지만, 전력의 차이를 극복하기는 힘들었다. 끈질긴 추격전 끝에 2-3까지 따라붙었으나 거기까지였다. 이 경기에서 조광래는 1-2 상황에서 측면에서 연결된 패스를 슬라이딩으로 막으려 하다가 손에 맞고 골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자책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사실 그 상황은 제가 아니었어도 뒤에서 이탈리아 공격수가 따라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골이나 다름 없었어요. 수비가 완전히 쏠렸고, 상대 공격수가 치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기에 달려 들어가서 슬라이딩했는데, 제 팔에 맞고 들어갔죠.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골로 인정됐다가 나중에 자책골로 변경됐더군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해요."
86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을 당시(왼쪽에서 6번째가 조광래) ⓒ한국축구100년사
86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대표팀 은퇴..현역 생활도 정리
멕시코 월드컵을 마친 조광래에게 마지막 목표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이었다.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공동 우승의 주역이었던 조광래는 서울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고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혼자 결심을 했죠. 이번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은퇴한다. 모든 정성을 다해서 금메달을 따고 그 자리에서 은퇴 선언을 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끝날 때까지 일요일에 쉬는 것을 제외하고는 절대 훈련을 쉬지 않겠다는 목표도 세웠죠. 장기 합숙이었기 때문에 정말 힘들었지만 이겨냈어요."
결국 조광래와 대표팀은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특히 조광래는 인도네시아와의 준결승전과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결승전에서 연이어 결승골을 터뜨리며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결국 금메달을 땄죠. 정말 정성을 다해 준비했고, 그 결과로 선물을 받은 것이었어요. 경기가 끝나고 나서 인터뷰를 하는데, 바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죠. 지도자 공부를 위해서 체력이 남아있을 때 외국에 나가 뛰면서 공부를 하고 싶다. 지도자로서 새롭게 나타나겠다고 밝혔습니다. 팀에서는 상의도 없이 발표했다고 난리났었어요.(웃음)"
소속팀 대우에서는 계약금을 다시 주겠다고 만류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고, 결국 조광래는 김우중 회장의 배려로 독일과 프랑스로 축구 유학을 떠났다.
85년 대통령배대회에서 우승할 당시(왼쪽부터 조광래-박창선-김평석) ⓒ한국축구100년사
조광래에 대한 몇 가지 진실
글을 마무리 짓기 전에 조광래에 대한 몇 가지 진실을 추가로 소개한다. 일단 조광래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장발. 그는 현역 시절 내내 장발을 고수했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조광래의 머리는 길었다.
"제가 어렸을 때 조지 베스트(북아일랜드, 맨유의 전설)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의 경기 영상이 담긴 비디오를 보고 깜짝 놀랐고, 어린 마음에 흥분해서 축구를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라고 감탄했었어요. 그 덕분에 저도 기술훈련에 더 매진했었죠. 어쨌든 조지 베스트를 너무 좋아해서 그의 헤어 스타일을 따라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웃음)"
"군대 시절에도 장발을 했다기보다는 머리가 조금 길긴 했어요.(웃음) 그런데 사실 그 때는 대표팀 경기가 워낙 많았고, 합숙훈련도 엄청 길었거든요. 그래서 대표팀에서 합숙하다가 경기가 있으면 잠시 부대에 합류해서 경기 뛰고 다시 대표팀에 들어가곤 했어요. 그런 상황이라 부대에 들어갈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머리도 길어졌습니다.(웃음)"
그렇다면 조광래와 가장 호흡이 잘 맞았던 선수는 누구일까.
앞서 언급되었듯이 대표팀의 오른쪽을 담당했던 차범근과의 콤비 플레이도 좋았고, 또한 멕시코 월드컵을 즈음해서 중앙 미드필드 콤비로 함께 했던 박창선과의 호흡도 좋았다. 조광래는 박창선에 대해 "개성이 정말 강했던 선수인데, 특히 킥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둘 다 기술이나 패싱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조화가 잘 맞았던 것 같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조광래가 꼽은 가장 호흡이 잘 맞는 선수는 이태호(전 동의대 감독)였다. 대표팀과 대우에서 함께 했던 이태호는 조광래의 패스에 가장 잘 반응하고, 그것을 골까지 연결시켰던 킬러였다.
"공격수 중에서는 이태호와 정말 잘 맞았죠. 태호는 기술이 좋고 영리한 선수였어요. 스피드는 조금 떨어지지만 스루패스가 들어갈 때 문전에서 볼을 터치해서 골을 넣는 능력은 정말 예리했죠. 제가 패스하기 전에 태호를 슬쩍 쳐다보면 바로 알아채요. 그리고 공간으로 움직이면 제가 발 밑으로 찔러주고, 이런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죠. 제 의도를 가장 빨리 알아채는 선수가 이태호였습니다. 그 친구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패스해준 선수가 조광래였다고 이야기했다고 하더군요.(웃음)"
현재 대표팀 사령탑을 맡고 있는 조광래 ⓒ이상헌
축구인으로서의 최종 목표를 향해
조광래는 현역 은퇴 후에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꾸준히 유럽과 남미를 오가며 선진축구의 흐름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안양LG(현 서울)와 경남FC 감독을 거치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마침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 대표팀 사령탑을 맡게 되었다. 지도자로서 그가 꿈꿨던 목표에 다가선 것이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그는 그 1단계로 아시안컵을 준비 중이다. 물론 그것이 조광래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그는 지도자 이후의 삶으로 축구행정가를 꿈꾸며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선수 시절에는 대표 선수가 되는 것이 첫 번째 꿈이었죠. 대표 선수 생활을 하면서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최종적으로는 대표팀 감독이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이런 과정들을 위해 항상 연구하고 준비해왔습니다. 프로팀 감독까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봤지만, 대표팀 감독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를 마치고 나면 구단 행정을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 목표를 위해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행정에 대한 부분을 제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죠. 만약 단장이든, 강화부장이든 내가 구단을 운영하는 입장이라면 팀을 어떻게 꾸려나가고, 유소년을 비롯한 육성 정책은 어떻게 준비하고, 이런 부분들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해외에 나가 명문 클럽들을 돌아볼 때에도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죠. 언젠가 지도자를 마치고 나면 이런 구단 행정 일을 꼭 해보고 싶습니다. 재미있고 보람 있는 일이 될 것 같아요."
인터뷰=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1년 1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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