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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사이야기

[Why][강훈의 와일드 터치] 신정아

惟石정순삼 2011. 1. 16. 06:40

죽도록 창피했다 죽도록 반성했다… 이제는 살고싶다 절박하게

변양균 아저씨와의 만남, 잘못된 사랑
불같은 감정으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만나다 보니 어느새 남자로 와 있었고
큰 나무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학력위조 사건의 충격
삼풍백화점 무너져 깔렸을 때 몸이 몹시 아팠지만 이 사건의 고통엔 비할 바가 아니다

'학력위조범' '에르메스의 여인' '제2의 린다 김' '꽃뱀'으로 불리웠던 여자. 30대에 사립대 미대 교수와 국제미술전 감독에 오르는 영화(榮華)를 누렸다가 순식간에 '사기꾼'으로 전락해 철창 신세를 졌던 여자. 신정아(39)다.

이른바 '신정아 스캔들'은 신정아가 예일대 박사 학위를 위조해
동국대 조교수와 광주비엔날레 감독이 됐고, 이 과정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 변양균(62)씨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 신정아와 변씨는 2007년 10월 11일 영등포구치소에 구속 수감됐다. 대법원은 재작년 신정아에 대해 학력 위조와 미술관 공금 횡령 혐의를 인정했다. 그러나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에 대한 특별사면 청탁 명목으로 2000만원을 받은 혐의, 기업으로부터 협찬금을 받아낸 혐의 등 '권력형 비리' 혐의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했다. 신정아의 '연인'이었던 변씨는 사찰에 특별교부세가 배정되도록 압력을 넣은 혐의만 인정됐고 나머지 부분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변씨는 2008년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신정아는 1년 6개월을 복역하고 재작년 4월 10일 석방됐다.

신정아는 그후 대인기피증이 생겼다고 했다. 타인의 시선이 두려웠고 부끄러웠다는 것. 신정아는 작년 월간조선 9월호에 변호사를 통해 서면(書面) 인터뷰를 했으며, 이번에 출소 이후 처음으로 기자와 만났다. 인터뷰는 두 차례 6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얼굴은 수척하고 지친 모습이었다. 이름과 잔다르크를 합성한 '신다르크'를 이메일 아이디로 사용했던 신정아. 과거의 자신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신정아는 다음달 '속죄'와 '반성', 그리고 '각오'를 담은 책을 낸다고 했다.

2007년 스캔들로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뭇사람의 손가락질과 수감 생활 탓인지 그의 표정은 어둡고 초췌했다. 그는“해선 안 될 사랑을 했고, 돈으로 학위를 사려 했다. 내 인생관은 분명히 잘못됐었다”고 했다. /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변씨는 만났나?

"사건 이후 만나거나 통화한 적도 없다. 당연히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일 겪고 서로 연락한다는 건 도리가 아니다."

―어떻게 알게 됐나.

"2003년 2월 언론계 한 지인이 '어떤 사람이 만나고 싶어한다'고 해서 청와대 근처 파스타집에 갔다. 지인과 변 실장님이 앉아 있었다. 며칠 뒤 실장님이 따로 연락을 해 왔다. 그때 실장님은 아주 높은 공무원은 아니었다(당시 변씨는 기획예산처 기획관리실장). 지인들끼리 서로 좋은 사람 소개해주고 그러지 않느냐. 큐레이터였던 난 각계 인사를 많이 알고 지냈고, 실장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언제부터 연인이 되었나.

"모르겠다. 처음엔 나이 많은 아저씨라 연인이 되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다. 남들이 말하는 불같은 감정으로 시작한 관계가 아니었느니까. 그랬다면 우린 오래 만나지 못했을 거다. '아저씨'였기에 경계 없이 만났다. 그러다 어느새 옆에 남자로 와 있게 됐고 큰 나무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나도 '왈패'에서 조금은 성숙한 여자가 되었고. 그렇더라도 뜨거운 열정을 상상하게 하는 그런 사이 아니었다. 우린 어차피 스물세 살이나 차이 날 뿐 아니라 끝이 뻔한 만남이었다. 결혼 같은 건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관계를 정리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문제로 실장님과 다툰 적도 있고."

―인터넷에 연서(戀書)가 돌아다니던데.

"황당하다. 모두 가짜다. 그 내용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진짜 내 입장에서 쓴 편지처럼 보이더라. 하지만 난 그런 문학적 재주가 없다. 지금까지 변 실장에게 쓴 이메일이나 일기가 인터넷이나 언론에 공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둘의 관계는 외부 충격으로 막을 내렸는데.

"서로 미워하고 싸워서 끝나는 것보단 차라리 나았다. 우린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았고 서로에게 미안한 사랑을 했다. 지금은 서로 잘되길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와의 관계는 소중한 기억으로 덮어두고 싶다."

―같은 날 구속됐다가 변씨가 1년 먼저 석방됐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먼저 출소하게 돼 내 부담이 조금 덜어졌다. 그분 구속됐을 때 정말 마음 아팠다. 나 때문에 한순간 모든 걸 잃으셨다."

―변씨 가족에게 할 말은 없나?

"실장님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싶다."

―수형 생활 어땠나.

"너무 추웠다. 영등포 구치소에서 겨울 두 번 났다. 담요 두 장으로 버텼는데 이가 딱딱 부딪쳐 잠을 못 이룬 날도 많았다. 독방 생활 했다. 이제 어지간한 추위는 견딜 만하다. 여름엔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구치소 직원이나 다른 수감자들이 알아보지 않던가

"왜 모르겠는가. 한동안 모든 언론 톱뉴스가 나였는데. 입감되기 직전 옷을 모두 벗고 신체검사를 받는다. 구치소 직원들이 수근대는 것 같았다. 수치스러웠다. 하루는 한밤 중에 수감자 한 명이 내 방을 향해 욕설을 했다. '가랑이 찢어 죽일 ×' 같은 욕설을 밤새도록 퍼부었다. 구치소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고, 다른 죄수들은 우습다고 낄낄댔다. 교도관들은 내가 잘 있는지 수시로 내 방을 확인하고…."

―욕 먹고 가만히 있었나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난 들어오기 전에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어떤 비난도 참아야 했다."

―그들이 욕만 하던가

"한번은 운동장에 나가는데 담벼락 너머 남자구치소 쪽이 왁자지껄해서 쳐다봤다. '정아 누나 힘내' '실장님은 우리가 잘 모시고 있어요'라고 적힌 종이를 창문 틈으로 흔들어대더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운동장 나가는 시간을 어떻게 알았는지, 교도소엔 별난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다."

신정아가 지난 4년간의 일기를 모아 책을 낸다. 신정아는“권력자와의 만남과 이별, 학력 위조, 영등포구치소 생활, 지인들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며“이젠‘용서’를 구하고 악몽에서 벗어나고싶다”고 했다. /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식사는 잘했나

"구치소 밥이 입에 맞지 않았다. 영치금으로 우유나 과일, 과자를 사 먹었다. 이전에도 군것질 좋아했다."

―먹고 싶은 게 많았겠다

"계란 프라이가 가장 먹고 싶었다. 교도소엔 튀긴 음식이 없다. 탕수육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군만두와 자장면이 생각났다. 진한 우유도 그리웠고."

―진한 우유?

"교도소엔 유효기간이 2개월이나 되는 묽은 우유만 나온다. 요즘 진한우유 실컷 마시고 있다. 아쉬웠던 건 매점에서 살 수 있는 과자가 1년에 한 번쯤 바뀌는데 입에 물렸던 '빠다코코낫'과 '야채크래커'가 출소 직전에 홈런볼과 맛동산으로 교체됐다. 너무 기뻤다. 홈런볼이 얼마나 맛있던지."

―구치소에서 법정 오갈 때 변씨 못 봤나.

"호송버스는 여자가 맨 마지막 타고 가장 먼저 내린다. 변씨와 같은 호송버스 탄 적 있었다. 하지만 이동하면서 거의 고개 들고 다닌 적이 없다. 두손 꽁꽁 묶여 법정으로 걸어갈 땐 죽고 싶도록 창피했다."

―검찰 수사는 어땠나.

"검사가 너무 무서웠다. 두 번째 조사받을 땐 (바지에) 오줌 쌀 정도였으니까. (검찰은) 내 주변을 모두 뒤졌고 나와 통화했던 사람들이 줄줄이 불려 나와 조사받았다. 단지 나를 잘 알거나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던가.

"당시엔 나를 잘 알던 사람들도 '모른다'고 말할 때였다. 내가 어떤 미술관에 간 것으로 진술했다고 하자. 검찰은 그 미술관 관계자를 부른다. 하지만 그는 '나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검찰은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다. 이런 식이다. 답답했다. 하지만 모두 이해한다. 내 잘못으로 그렇게 됐고 모두 피해 본 사람들이니까."

신정아의 수인번호(囚人番號)는 '4001'번. 공교롭게 그의 휴대전화 번호 끝자리도 '4001'번이었다. 신정아는 "1년 6개월간 그 번호는 내 이름으로 불렸다"며 "일부러 그 전화번호를 구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신정아의 범죄는 학력위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동국대 교수와 광주비엔날레 감독 임명 과정에서
미국 캔자스 대학을 3년 중퇴하고도 석사 학위를 받았다고 했고 예일대 박사학위를 받은 것처럼 허위 이력서를 제출한 혐의가 인정됐다. 학력을 물어봤다.

―그동안 어디서 뭘 배웠나.

"
경북 청송군 진보가 고향이다. 아버지가 주유소와 택시회사를 운영했다. 시골치고는 꽤 넉넉한 가정이었다. 진보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를 다니다 서울로 전학했다. 부모님이 서초동에 집을 마련해줘 오빠 둘과 생활했다. 사당역 근처의 동덕여중을 다니다 중경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왜 서초동에서 (한강 이북에 있는) 중경고를 다녔나.

"당시 중경고는 반포대교 북단에 있는 현재의 한강중학교 자리에 있었다. 8학군 학생이 넘쳐서 일부가 중경고에 배정됐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됐다."

―국내에서 대학 갈 수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내가 법대에 가길 희망했지만 난 미술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다닐 때도 미술학원을 다녔다. 미대에 진학하기 위해 대입 시험을 포기하고 재수를 택했다. 그러다 유학 가겠다고 했고 1992년 미국 캔자스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나중에 로스쿨에 진학하길 희망했으나 난 오로지 미술에 꽂혀 있었다. 1994년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운명 직전 미술을 고집하는 나를 이해해 주셨다. 빨리 학위를 마치라고 하셨다. 1995년 여름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죽다 살았다. 뼈가 여러 군데 으스러져 두 달간 입원했다."

―그래서 공부가 제대로 되겠나.

"학위는 받아야 하는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건물에 깔려 죽을 뻔하고 정말 힘들었다. 대학 주변에 과제나 논문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들 덕분에 학교를 졸업한 줄 알았다(최종학력은 캔자스대 3년 중퇴).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은 학위까지 만들어주는 '학위브로커'였다. 당시엔 학사 일정을 대행해주는 '튜터(tutor)'로 생각했다. 예일대 박사학위도 캔자스대에서 알게 된 '튜터'를 통해 만난 사람이 해준 것이었다."

―학력 위조가 맞지 않는가.

"부정하진 않겠다. 불성실한 방법으로 학위를 받으려 했다. 결과적으로 학위는 없지만 내가 직접 위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캔자스대나 예일대를 다녔던 것은 맞다."

―2007년 7월 16일 사건이 불거지자 미국으로 출국해 두 달 머물렀다. 도피 아닌가?

"언론들은 제가 도피했다고 표현했지만 내가 먼저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싶었다. 두 달간
뉴욕에 머물면서 피말리는 시간을 보냈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감 기간보다 그때가 더 힘들었던 것 같다. 한국 상황은 나날이 악화됐고 그래서 학위 확인을 로펌에 맡기고 자진 귀국했다. 추석 직전인가 한국에 들어왔더니 검찰에서 '왜 벌써 왔냐'고 물어봐 당황했다. 도피하려 했다면 미국에 더 머물렀을 것이다."

―일부 언론에 공개된 누드사진은 아직 가짜 여부가 결론나지 않았다.

"해당 언론사와 명예훼손 소송이 진행 중이다. 그 언론사는 성로비 의혹까지 제기했다. 1심에서 언론사가 1억5000만원을 나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명예훼손은 인정했으나 누드사진에 대해선 아직 합성 여부를 가리지 않았다."

―본인 사진이 아니란 말인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누드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 이번 소송 과정에서 내가 옷 벗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옷을 벗어야 했다."

―무슨 뜻인가.

"수감 생활로 체중은 변하지만 신체비례는 변하지 않고 여자들의 특정 신체부위도 각각 특징을 가졌다고 한다. 삼성의료원 성형외과 의사의 진단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내 누드사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비록 병원이긴 하지만 누드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 아닌가."

―성로비는 없었나.

"말도 안 된다. 누구한테 몸을 판다는 말인가. 난 그런 재주 없다. 목소리도 굵어 남자 같다. 어려서 '왈패'라는 말까지 들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몸가짐 조심하고, 특히 첫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고 매번 강조했다."

―'제2의 린다김'이라는 보도도 있었는데.

"린다김은 로비스트이고 난 전시기획자이다. 그가 어떻게 처신했는지 모르지만, 나와 비교하는 건 억지다. 물론 린다김도 나와 비교되는 게 좋지 않겠지만…."

―당시 여권 실력자들과 알고 지낸 건 사실 아닌가.

"아는 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한 관계는 전혀 아니었다."

―청와대 출입도 했다던데.

"여러 번 가봤다. 변 실장님 사무실 코디해주러 간 적도 있고 다른 일도 있고."

―당시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도 만나본 적 있나.

"몇 차례 만났다."

―청와대 식사 자리에서?

"꼭 청와대인 것만은 아니고, 식사 자리일 수도 있고 차 마시는 자리일 수도 있고…. 대통령께선 저에게 세상을 근사하게 살아가는 법과 삶의 지혜 같은 것을 말해주셨다."

―업무로 만났나.

"더 이상 언급하는 게 적절치 않은 것 같다. 나를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그분께 누가 되는 상황 아닌가."

―영부인도 봤나.

"노코멘트로 하겠다."

―다른 인사들은.

"당시 '노의 남자'로 불리는 정치인들 만나봤다. 한 인사는 날카로운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실제 대화해보니 문화적 소양이 대단하더라.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다."

―책 낸다는데 떨고 있는 정치인들 없을까.

"그럴만한 내용은 없다고 본다. 내 처지에 어떻게 남을 비판하겠나."

신정아가 준비한 책의 원고는 이미 마무리됐고 현재 변호사가 내용에 대한 법적 검토를 하고 있다. 신정아는 2007년 사건이 불거졌을 때부터 최근까지 써놓은 일기를 정리해 책으로 만들었다. "날 아껴주고 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속죄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최소한 진실은 이랬다고 먼저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이젠 악몽에서 벗어나 살아야 되겠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책을 통해 지난 4년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다"는 게 신정아의 출간 배경이었다. 책에는 사건 이후 자신이 겪어온 일과 수감생활, 가족과 지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한다. 변씨는 물론 정치인과 기업인 등 자신이 살아오면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다.

―책 나오면 더 욕먹는 거 아닌가.

"그럴 수 있다. 비판 감수하겠다. 독자들이 내 말을 50%라도 믿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거짓말만 하는 사람으로 비쳤다.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아주 극소수라도 거기에 만족한다."

―고생한 분들에게 속죄한다고 했는데 출소 이후 연락하지 않았나.

"안 만난 게 아니라 못 만났다. 뵐 면목이 없었다."

―이제 '나도 살아야겠다'는 의미는.

"지금 나는 사는 게 아니다. 어딜 가도 날 알아본다. 그냥 지나쳤던 행인도 다시 쳐다보고 '어, 신정아'라고 쑥덕댄다. 식당에서도 출입문을 등지고 앉는 게 버릇이 됐다. 공공장소 나가기 겁난다. 학력위조 사건 같은 게 나면 여전히 언론에선 '제2의 신정아'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가. 그걸 읽을 때마다 모멸감을 느낀다."

―무슨 비난이 가장 참기 힘들던가.

"사건 당시 '꽃뱀'으로 묘사됐다. 내 인생에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이다. 그래서 책에다 변 실장과의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있는 그대로 정리했다. 그 과정을 공개하는 게 여자로서 망설여지고 부끄러울 수 있지만, 그래도 '꽃뱀'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언론에서 '에르메스의 여인'이라고 했는데.

"평범한 옷과 가방도 많은데 명품을 지닌 모습만 지나치게 부각됐다. 기업 오너들이 운영하는 미술관에서 일했다. 윗사람보다 좋은 가방과 옷 갖고 다니는 거 쉽지 않다. 난 좋은 제품을 구입해 오래 사용하는 스타일이다."

―변호사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나.

"직장 생활 10년 동안 저축해 놓은 돈이 조금 있고, 집안 어른들도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다. 백수 생활 4년째 아닌가. 돈 떨어지면 김밥장사라도 해야지."

―돈 때문에 책 냈나.

"아니다. 1평 반짜리 구치소 독방에서 배운 게 있다면 그 조그만 공간에서 못하는 게 없다는 거다. 밥 먹고 운동하고 잠자고 TV 보고, 사람 사는 데 큰 집이나 큰돈 필요한 게 아니더라. 마음먹기 나름이다. 삼풍백화점에 깔렸을 때 몸은 아팠지만 이 사건 고통엔 비할 게 못 된다. 그래서 마음 달래고 새 출발 겸해서 책을 낸 것이다."

―미술계 복귀하나.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전시기획자(큐레이터)는 대중 앞에서 아름다움을 전하고 행복감을 주는 직업이다. 그러려면 스스로가 아름답고 행복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피폐하고 삭막한 마음으로 남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앞으로 계획은.

"당장 무슨 일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젠 시간도 많이 흘렀고 나이도 들었으니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고심하고 있다. 우선 몸과 마음부터 추스르려고 한다."

―요즘 뭐하고 지내나.

"수감 생활 습관이 배었는지 새벽 5시면 눈이 떠진다. 밥 먹고 운동하고 글 쓰고 그림 그린다. 디스크 치료받으러 병원에도 간다. 담당 변호사는 가끔 만나지만 외부인과의 약속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결혼은.

"그런 말 하지 마라. 지금 내가 누구와 마음을 나눌 수가 있겠나."

―정리해보자. 신정아의 죄는 뭐였나.

"남들이 열심히 공부할 때 난 돈 주고 남 시켜서 학위 받으려 했다. 땀 흘려 한 걸음씩 가야 하는데 잘못된 지름길을 선택했다. 성실하지 못했고 인생관이 분명 잘못돼 있었다. 미술계 인사들과 내게 배운 학생들, 다른 유학생들에게 죄송하다는 말 밖엔…. 학력 문제로 늘 가슴 졸였는데, 사건이 터져 오히려 홀가분한 측면도 있었다. 다만, 사생활이 다 까발려지고, 그 내용도 부풀려지거나 잘못됐고, 그래도 어디 하소연할 곳 없었던 저를 조금이라도 이해해주시면 고맙겠다. 주제넘은 부탁인지 모르지만."

수감 18개월 만인 재작년 4월 보석으로 석방된 신정아씨가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보내고 있다”고 근황을 밝히며 덕수궁 뒷길에서 상념에 젖어있다. /정경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