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쏟아지는 여름 극장가에서 사극 영화 <방자전>이 300만 관객 동원에 성공해 400만 돌파를 바라보고 있다. 춘향과 이몽룡의 몸종 방자가 위험한 사랑을 한다는 영화 <방자전>은 고전소설 <춘향전> 을 재해석한 작품이다. <춘향전>은 1922년 일제 강점기에 처음 영화로 만들어진 이래 90여 년 동안 수십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재탄생되어왔다. 스크린과 브라운관 속 <춘향전>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1922년 <춘향전>부터 2010년 <방자전>까지 19차례 영화화
<춘향전>은 명실상부 조선후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열녀춘향수절가>, <남원고사> 등 수십 편의 이본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춘향전>은 판소리, 뮤지컬 등 모든 예술 장르의 원작이 되었는데 특히 영화와 관련이 깊다. <춘향전> 최초의 영화는 일제 강점기 1922년에 일본인 하야카와 마스타로가 만든 무성영화였다. 이 영화가 흥행하면서 고전의 영화화 붐이 일었으며, 이듬해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에 의해 <춘향전>은 또다시 영화로 만들어진다. 일본인이 우리 고전소설 <춘향전>에 관심을 둘 정도로 <춘향전>은 국적을 초월한 호소력이 있었다. 이후 <춘향전>은 2010년 <방자전>에 이르기까지 총 19차례나 영화화되어 당대의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1935년 이명우 감독은 발성영화로 <춘향전>을 만들어 대성공을 거둔다. 1936년 이규환 감독은 ‘이몽룡은 성춘향과 혼인 후 어떻게 살았을까’란 점에 착안해 영화 <그 후의 이도령>을 만든다. 암행어사가 되어 변사또로부터 춘향을 구한 이몽룡이 탐관오리를 물리치며 조선 팔도를 누빈다는 이야기다. <춘향전>의 후일담인 셈이다. 이규환 감독은 <춘향전>을 소재로 동명제목의 영화를 한 편 더 만드는데, 1955년에 제작된 <춘향전>은 개봉 당시 서울 인구 150만 명의 10%인 12만 명이 국도극장으로 몰려왔을 정도로 크게 흥행했다.
여세를 몰아 1957년에는 김향 감독의 <대춘향전>이, 1958년에는 안종화 감독의 <춘향전>이 상영되었다. 1999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조승우 주연의 <춘향뎐>을 만들어 2000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영화 <춘향전>은 한국 영화사에 최초라는 기록을 많이 남긴 것으로도 유명한데, 1971년 문희·신성일 주연으로 만들어진 <춘향전>은 이어령이 각색한 최초의 70㎜ 영화였고, 국내 최초의 2D 애니메이션 역시 1999년에 제작된 <성춘향뎐>이었다.
- ▲ 1958년 춘향전 / 1961년 춘향전
춘향은 당대 남성들의 이상형
탤런트 이다해를 배출한 ‘미스춘향선발대회’는 전국에서 열리는 수백 개의 지역축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전북 남원의 대표적 지역축제 중 하나인 미스춘향선발대회는 1931년 시작된 이래 한국전쟁 중에도 거르지 않고 올해까지 80회째 이어져오고 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보다 오래된 이 행사는 당대 한국 미인상과 남성들의 이상형을 알 수 있는 잣대다.
남원 광한루의 춘향 사당에는 이당 김은호 선생의 1939년작 춘향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당은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고고학자·조각가·문화사학자에게 자문을 구했고, 조선기생 김명애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하얀 얼굴, 분홍빛 입술, 초승달 같은 눈썹, 긴 눈초리를 가진 기생 김명애는 1930년대 한국 남성들이 가장 선호하던 이상형이라 할 수 있다.
1961년에 개봉된 두 편의 춘향 영화는 ‘춘향전(戰)’이란 말까지 만들어낸다. 홍성기 감독·김지미 주연의 <춘향전>과 신상옥 감독·최은희 주연의 <성춘향>이 경합을 벌인 것이다. 묘하게도 감독과 주연 배우가 부부 사이인 이들의 대결은 신상옥·최은희 커플의 승리로 막을 내렸으며, 신필름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승자가 된 <성춘향> 속 최은희는 현모양처형의 슬기롭고 적극적인 춘향을 연기했다.
반면 패자가 된 <춘향전> 김지미의 춘향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슬프고 연약한 이미지였다. 해방 후 혼란스러웠던 1960년대 한국 사회는 더 이상 청순가련하고 무기력한 여인상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는 지고지순하고 순종적인 전통 여성보다 산업화,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주부 역할이 강조되던 시기였다. 이 밖에 <성춘향>의 성공 요인으로 방자와 향단을 맡은 허장강과 도금봉의 코믹 연기를 꼽기도 한다. 1960년대 대중문화 속에서 코미디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주는 사례다.
춘향 배역을 둘러싸고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가 벌인 경합도 흥미롭다. 1971년 <춘향전>의 주연을 따내기 위해 문희·남정임·윤정희가 경쟁했는데 최후 승자는 문희였다. 홍세미가 1968년 김수용 감독의 <춘향>으로, 장미희는 1976년 박태원 감독의 <성춘향전>의 춘향 공모를 통해 데뷔했다는 사실에서 춘향이 당대 미인의 판도를 좌우했음을 알 수 있다. 1994년에는 김희선과 이민우 주연의 KBS 추석특집 2부작 <춘향전>이 제작되었다. 춘향 역을 맡은 김희선이 호평을 받으며 신세대 스타 반열에 올랐는데, 계란형 얼굴의 쌍꺼풀 짙은 서구적인 외모를 선호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 ▲ 1970년 춘향전 / 2010년 방자전
<춘향전> 재치 있게 패러디한 작품도 인기
‘요조숙녀 춘향, 백마 탄 왕자 몽룡’이 나오는 신데렐라식 <춘향전> 줄거리를 비틀어 재해석한 작품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경춘 감독의 1960년작 <탈선 춘향전>은 개봉 당시 “신세대에 알맞은 탈선 행각! 춘향은 왜 탈선했을까?”란 카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이몽룡이 갓을 쓴 채 자전거를 쓰며 거리를 활보하고 위급한 상황에서 권총을 뽑는 장면이 흥미롭다.
홀쭉이와 뚱뚱이, 막둥이와 합죽이, 후라이보이와 살살이 등의 별명을 가진 당대 코미디언들이 대거 등장한 작품이다. 이동훈 감독의 1963년작 <한양에 온 성춘향>은 서울에 올라온 춘향·몽룡 커플을 향한 변학도의 복수극이 노론·소론의 당파싸움을 이용해 펼쳐진다. 故 여운계 선생이 향단이로 나오는 1972년 코믹 드라마 <방자와 향단이>는 <춘향전>에 현대적인 반전(反轉)을 준다. 몽룡은 사업차 서울로 갔지만 소식이 없고, 고리대금업자 변학도는 채무불이행 시 춘향을 소실로 삼겠다며 몽룡을 압박한다. 이때 도련님을 찾아 상경한 방자는 향단이를 만나 밀월을 즐기고, 고시에 합격한 몽룡은 춘향을 구출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느 판소리꾼의 꿈이었다는 내용으로 지금 봐도 파격적이다.
고전소설 <춘향전>은 20세기 들어서도 영화와 드라마로 재탄생된다. <쾌걸춘향>은 2005년 KBS 월화 미니시리즈로 연장 방영이 결정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 속 춘향은 밤무대 가수 어머니를 둔 억척스러운 성격의 성공 지향 모범생으로, 몽룡은 경찰서장의 아들로, 집안과 머리는 좋지만 말썽만 부리는 캐릭터로 재해석됐다.
변학도는 춘향이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연예기획사 대표로 나오는데, 고전소설 속 변학도의 이미지와는 달리 매우 신사답고 자상하게 나온다. 변학도 역을 맡은 배우 엄태웅을 스타로 만든 드라마이기도 한 <쾌걸춘향>은 사랑과 성공의 고민 속에서 이몽룡과 변학도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망설이는 춘향의 모습이 나타난다. 고전소설 속 ‘백마 탄 왕자님’으로 그려진 이몽룡은 대책 없는 사고뭉치로, ‘악질 수령’ 변학도를 키다리 아저씨로, ‘열녀’ 춘향이를 이상보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현대인으로 표현한 드라마였다.
<향단전>은 2007년 MBC 가을 2부작 특집극으로 만든 드라마였다. 제목처럼 향단이가 주인공이 되어 극을 이끌어간다. 월매는 춘향과 이몽룡을 맺어주려 하지만, 향단이 이몽룡을 사랑하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정규 편성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끈 작품이다.
올해 개봉된 영화 <방자전>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춘향전은 거짓이다’란 카피를 전면에 내세운다. 남원 지역단체의 항의가 있을 정도로 방자와 춘향, 몽룡과 향단이 벌이는 애정행각은 ‘정숙한 춘향이, 선비다운 이도령’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는다. 춘향만 바라보는 순애보 방자, 방자를 짝사랑하는 향단, 사랑과 신분상승 모두 놓치지 않는 춘향, 딸에게 ‘은꼴편(은근히 꼴리는 편지)’으로 몽룡을 유혹하라 부추기는 월매, 입신양명에 눈이 먼 몽룡, ‘춘향아, 난 니가 이렇게 따디는 게 왜 이렇게 됐냐’는 전라도 토박이 새디스트 변학도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방자전>은 <춘향전>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원작에 기반을 두지만, 전혀 다른 결말을 예고하며 비판과 풍자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요즘 시대의 사고방식을 투영해 비판적 시선으로 패러디를 감행한 셈이다. 인물 재구성이 기발해 19세 미만 관람불가임에도 불구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원작의 영화·드라마화는 요리와 비슷하다. <춘향전>이란 재료를 어떤 ‘조리법’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줄거리가 변하고 재미와 감동이 달라질 수 있다. <춘향전>을 소재로 한 다음 작품은 어떤 것이 있을지, 어떤 맛과 멋을 선사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 여성조선
취재 장윤희ㅣ사진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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