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한 얼굴 가지신 아담한 노신사… 추기경님 존재 자체가 하나의 교회
지난해 가을이었다. 강남성모병원에 입원 중인 이해인 수녀님을 문병 갔다가 같은 병동에 추기경님이 계시다는 걸 듣고 가 뵙고 싶어 가슴이 다 울렁거렸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노환이지만 위중하여 문병객을 사양한다는 건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수녀님 '빽'이면 혹시 뵐 수 있을까 했는데, 먼저 가 뵙고 온 수녀님이 오히려 말리셨다. 편히 주무시는 시간이 많은데 의식이 있으실 때는 간호하는 수녀님들이나 문병 오는 가까운 분들에게 미안해하시고 감사를 표하고 싶어 애쓰신다는 말을 들었다.
병환 중에도 남을 배려하기 얼마나 힘드실까. 이승에서 마지막 안식을 방해하지 않는 것도 추기경님을 위하는 길인 것 같아 뵙기를 단념했다. 선종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그때 뵐걸, 내 적극적이지 못한 성품에 대한 후회였다.
나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 치열했던 1980년대에 가톨릭 교리 공부를 시작해서 몇 번의 재수 끝에 1985년 영세를 받았다. 가톨릭에 대해 확신이 생겨서가 아니라 민주화 운동의 한가운데 그분이 계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분은 정의를 위해 박해받고 쫓기는 이들을 말없이 그분의 날개로 덮고 품으셨을 뿐, 결코 선동하거나 부추기지는 않으셨다. 만약 그분까지 투쟁적이었다면 그분의 그늘, 그분의 날개 밑이 그렇게 편했을 리가 없다. 정의의 투사에게도 그분의 그늘이 필요했겠지만, 자유를 위해 피 한 방울 흘리기 싫었던 나처럼 소심한 비겁자에게도 그분의 그늘은 필요했던 것이다.
이건 들어서 알고 있는 얘긴데, 그분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이나 무기징역 등 중형을 받고 수감된 인사들의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자상하고 따뜻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그런 운동권 남편을 둔 한 여인도 그런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때 명동성당 내의 전진상 교육관에서 자주 추기경님을 뵙고 간소하고 푸근한 식사를 대접받으며 추기경님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할 수 있는 위로의 시간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 어려운 시기를 견딜 수 있었겠느냐고 지금도 털어놓곤 한다. 그 여인은 지금도 그 얘기를 할 때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여인을 품에 안고 다독거리게 된다.
추기경님을 모시고 조촐하게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하시고 비교적 한가해지신 후였는데 그것도 내가 찾아뵙거나 요청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중간에서 마련하거나 초청해준 자리였다. 어느 신문사의 초대로 러시아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보러 간 적이 있는데 나란히 앉아 측근에서 뵌 추기경님은 제의가 아닌 간편한 복장이어서인지 너무도 가볍고 작은 분으로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공연이 끝나자 일어서셔서 어찌나 열렬하게 오랫동안 박수를 치시는지 연예인에 열광하는 요즘 청소년과 다름이 없었다. 누군가 정말인지 추측인지 "저 발레리나 중의 하나를 추기경님이 특별히 아끼셔서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저렇게 열렬하게 박수를 치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누구도 어린이같이 되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지 못할 것'이란 성경 구절이 생각나 '저 어른이야말로 천당은 떼어놓은 당상'이라고, 좀 무엄한 생각을 했었다.
그 후에도 더러 모시고 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번은 엘리베이터 앞에서였다. 우릴 초청해준 측에서 승강기 앞에 양쪽으로 지켜서서 추기경님이 먼저 안으로 드시도록 안내했지만, 추기경님은 옆으로 비켜서시면서 나한테 먼저 타라고 하셨다. 당연히 내가 사양하자 "레이디 퍼스트!" 하셨다. 더 사양하지 않고 냉큼 올라타면서 "영 레이디(young lady)가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했더니 "나보다 영이지요" 하시면서 뒤따라 타셨다. 그럴 때 그분은 추기경 같지도, 소년 같지도 않고 매너 좋고 유머감각 풍부한 노신사처럼 보였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시고 나서 접하게 된 그의 어록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바티칸은 지구 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다. 이 작은 나라가 전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제로에 가깝지만,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무한대다.' 그게 바로 가톨릭 정신이라면 김수환 추기경님이야말로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교회였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틈만 나면 달동네·판잣집 들르자 하셔"
김수환 추기경의 자동차를 30년 동안 운전한 김형태(71·세례명 요한)씨가 '백미러를 통해 본 김 추기경'을 이야기했다. 김 추기경의 선종 후 슬픔에 잠겨 있던 김씨는 본지 기자에게 추기경을 모신 자랑스러운 세월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사진 촬영에는 한사코 응하지 않았다.
나는 김 추기경님의 발이었습니다. 1978년부터 전국 곳곳 안 다닌 곳이 없었죠. 그중 달동네와 '하꼬방'(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판잣집)을 참 많이 갔습니다. 교구 일과 성당 일로 정신없을 때도 틈만 나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러 가셨지요.
처음 그분을 뵀을 때, 굳게 다문 입이 매섭고 차가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정 많은 분이라는 게 들통이 났지요. 어린아이들과 청년들 앞에 서면 아이처럼 웃으시는 통에요. 그럴 때는 말수도 많아지셨습니다.
물론 힘든 때도 있었죠. 시절이 뒤숭숭하던 유신 때는 차를 타셔도 한마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원래 음악은 안 들으셨고. 몇 시간이고 기도만 하셨지요. 나는 앞만 뚫어지게 보고 운전했고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분이 기도하실 수 있도록, 살금살금 무사고 운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딸이 셋입니다. 12년 전 정년(58세) 때 이미 그만뒀어야 했는데 애들 결혼 다 시키고 손주 볼 나이까지 일하도록 배려해주셨습니다. 일흔 노인이 모는 차, 그거 불안해서 어떻게 타느냐고 하실 법도 한데 말이지요. 주례 잘 안 서시는 분이 제 딸자식 결혼 때는 선뜻 주례도 서 주셨습니다. 아, 자랑할 것이 참 많군요.
작년 7월 입원하셨을 때, 김 추기경님은 "잠깐만 있다 나올 것"이라면서 웃으셨습니다. 난 그 말만 믿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멍하니 아무것도 못하다가 밤이 돼 정신을 차리고 성당에 왔습니다. 30년간 요구란 게 없던 분이셨습니다. 시간이 없어도 한 번도 재촉한 적이 없으셨어요. "빨리 가자" "왜 급정거를 했느냐" 불평이나 요청 한 번 없었습니다. 30년 동안 말이죠.
추기경님, 이제는 이 늙은이가 요구해 보렵니다. 하늘나라에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서 또 제가 모는 차 타시라고요. 그때는 사는 얘기도 많이 하자고요.
고마웠습니다, 사랑했습니다…김수환 추기경님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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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고맙다’였다고 한다.
고맙다, 라는 글씨를 이렇게 오래 바라보기는 처음인 것 같다.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존경과 사랑을 흠뻑 받아오신 분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어서인가. 고맙다, 라는 말이 또 이토록 사무치게 제 뜻을 고스란히 지닌 채 가슴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20대 때 나는 명동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다니는 학교가 그 근처였기 때문에 명동성당을 지나야 학교를 갈 수 있었다. 마음이 상하거나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어지면 그냥 불쑥 언덕길을 올라 성당 안으로 들어가 앉아 있곤 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는데도 성당 안의 빛과 어둠 속에 고즈넉하게 놓여 있는 미사를 보는 의자에 홀로 앉아 있다가 나오면 웬만한 것은 평정이 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부터인가 공권력이 가로막아 자유롭게 성당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명동성당은 한국 현대사에서 벌어진 고통의 순간마다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의 상징적인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어제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계셨다.
생명수같았던 그분의 말씀
종교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함께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가는 모든 이를 형제로 받아들였던 김수환 추기경님의 마음과 행보는 사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큰어머니와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그때 들은 그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 속엔 부당한 현실 때문에 핍박 받는 사람들을 향한 강력한 옹호, 힘으로 그들의 인권을 짓밟는 쪽에 대한 권위 있는 저항이 강인하게 실려 있었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살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그만큼 더 애타게 생명수를 찾듯이 그분이 한 말씀을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간이 흘러간 세월 속에 켜켜이 쌓여 있다. 나 역시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종교를 떠나 모든 이의 앞날에 그분의 말씀은 어려움을 뚫고 나갈 지혜와 힘을 주었으니까.
평안할 때보다 분란이 일어날 때 방패막이가 되어 주던 분을 잃으니 어른이나 청년이나 할 것 없이 큰 보루를 상실한 느낌이다. 여간해서는 전화를 안 하시는 시골의 아버지께서도 전화를 하셔서 헛헛하신지 그리 훌륭히 사신 분도 결국은 가시는구나 하시며 자식을 잃으면 참척이요, 부모를 잃으면 천붕이라 했는데 당신 지금 마음이 천붕지괴(天崩地壞)의 마음이라 하신다.
새벽에 후배가 보낸 듯한 문자엔 이렇게 쓰여 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하셨네요, 선배님!’
부모 잃은 天崩地壞의 심정
아버지는 일요일이면 어머니와 함께 읍내 성당에 나가는 재미로 사시는 분이시지만 후배나 나나 가톨릭 신자도 아닌데 그분을 보낸 마음은 다 이렇듯 든든한 무엇을 잃은 어린양이 된 듯하다. 신자들은 추기경을 잃고 슬픔에 잠겨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보려고 선종하신 그분을 찾겠지만, 일반 시민들 또한 어렵고 급박할 때마다 지혜로운 말씀으로, 시련 앞에 설 때마다 앞을 가로막아 주는 든든한 보루로 여기던 큰 어른을 잃은 마음으로 그분의 이곳에서의 마지막 길을 찾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그분은 정신적 지도자이며 큰 어른이셨다는 방증이리라.
선종 소식을 듣고 밤이 지난 아침에 눈을 떠 보니 겨울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눈을 찔러왔다. 속으로 큰 분은 가셨는데 햇살도 좋네… 생각하다 뉴스를 통해 그분의 눈이 장기기증 서약에 따라 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직접 뵌 적이 없어도 나는 생전 그분의 눈을 참 좋아했다. 큰 말씀을 하실 땐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띠지만 웃으실 땐 어린아이같이 천진함이 실리던 그 눈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들이 있을까. 그 눈을 남기고 가신 마음이 크디크지만 또 한편 아프기도 했다. 어디 그분의 눈만 남았겠는가. 생전에 그분이 어렵고 슬픔에 처한 사람들을 향해 보내던 그 따사로운 눈빛은 그보다 더 빛이 되어 돌아와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님!
고맙다, 고 하신 마지막 말씀, 사랑하세요, 라고 남겨놓으신 그 말씀을 고스란히 돌려드리겠습니다. 우리 곁에 계셔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사랑했습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신경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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