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수환 추기경은 유년 시절, 꾀를 부려 기숙사 대신 집으로 가고 싶어했던 평범한 소년이었지만 결국엔 성직자 운명을 받아들인 대범함을 보였다. 또 어머니에 대해 애틋한 정을 고백한 효자였으며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은 대한민국의 사내였다. 이와 같은 일화는 김수환 추기경이 2003~2004년 평화신문에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회고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회고록에는 유년 시절부터 가족에 대한 이야기, 추기경 임명 이후의 일화 등이 진솔하게 담겨 있어 '추기경 김수환'에 가린 '인간 김수환'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어머니 권유에 따라 신부가 된 김 추기경은 당시 "신부가 돼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청천벽력' 같았다고 고백했다.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 5~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25세가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 어머니에게는 한 번도 말씀드린 적이 없지만 내 나름대로 골똘히(?) 생각해서 세워 놓은 인생 계획이었다."(회고록 37쪽)
김 추기경은 성직자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직설화법을 취하고 있다. 그는 "그 계획에 미련이 남아 있었던지 신부가 된 후에도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집을 보면 부럽기만 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
대구에 있는 성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초등학교 5ㆍ6학년)에 옮겨서도 어린 나이에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하느라 신앙심보다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했다. 신학교 규정상 개인 돈을 갖고 있을 수 없었는데 당시 추기경은 신학교에서 쫓겨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1전짜리 동전을 눈에 띄는 자리에 놓아뒀다. 그러나 이 방법은 주목받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다. 서울 동성상업학교 시절에는 꾀병을 부려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추기경은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발목을 놓아주지 않으신 걸 보면 성직자의 길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혈육의 정에 연연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다른 성직자와 달리 김 추기경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을 숨기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자기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나에게도 내 어머니는 가장 크고 특별한 존재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하고, 이 막내아들을 위해서라면 열 번, 백 번이라도 목숨을 내놓으셨을 분이다."(50쪽)
추기경은 어릴 때 어머니에게 "돈을 많이 벌면 서른쯤 돼서 삼을 사드리겠다"고 여러 번 약속했다. 서른 살이 돼 쥐꼬리만 한 신부 월급을 톡톡 털어 삼을 사드렸다는 일화도 전하고 있다.
추기경은 일본 유학 시절 학병으로 끌려가기도 했는데 전쟁터에서 무사히 살아온 것도 어머니의 기도 덕택이라고 말한다. "내가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거나 전쟁터에 나가 있을 그 시간에 어머니는 남산동 성모당 앞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기나긴 기도가 없었다면 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지도 못하고, 사제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54쪽)
김수환 추기경과 관련해 가장 재미있는 일화는 그가 교황과 테레사 수녀의 '보디가드' 노릇을 해 유명세를 떨친 것이다.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아시아 순방차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교황을 영접하기 위해 다른 추기경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김 추기경이 교황과 막 포옹한 찰나 한 남자가 교황 쪽으로 돌진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김 추기경은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는데 나중에 보니 옷소매에 누군가의 피가 묻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국내외 언론에서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이 무술로 괴한을 막아내 교황을 구하고 자신은 부상했다"는 보도가 나가면서 김 추기경은 외신들의 인터뷰 세례에 시달리며 전 세계에 이름을 톡톡히 알리기도 했다. 또 1981년 테레사 수녀가 방한했을 때는 몰려드는 인파를 피하기 위해 추기경이 150㎝의 단신 수녀를 감싸안고 이동해 "살아 있는 성녀의 보디가드 김 추기경"이라는 내용의 보도가 퍼지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 천주교 교세 8배로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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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 선종 ◆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사회에서 가톨릭 부흥을 이끈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소수 종교에서 국민 10%가 믿는 한국 4대 종교 중 하나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도 김 추기경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김 추기경은 경북 안동 본당에서 첫 사목 생활을 시작했다. 1956년 독일 뮌스터대학으로 유학, 동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 귀국해 가톨릭 시보사 사장에 취임했다. 여기서 1년8개월 동안 신속ㆍ정확한 보도를 통해 가톨릭 언론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그러던 그가 1968년 4월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면서 가톨릭은 새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다음해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한다.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준비위원장으로 선출됐고 여섯 차례나 세계주교대의원 회의에 참석해 한국 천주교의 위상을 드높였다.
김 추기경의 서울대교구장 교세 확장은 그대로 한국 가톨릭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68년 말 48개 본당, 14만여 명의 신자 수는 97년 말 197개 본당, 121만여 명으로 불어났고 성직자 수는 590명으로 증가했던 것.
김 추기경의 노력은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첫 방한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이후 북한동포 돕기 운동과 남북한 교회의 교류 활동, 1989년 서울 제44차 세계성체대회 등을 통해 한국 천주교 교회는 국내외적 기반을 공고히 하게 된다.
무엇보다 교회 안의 신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 신앙'을 강조했던 그의 새로운 접근 방식은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해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서민,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김 추기경은 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인사말을 통해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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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의 추위에도 식지 않은 추모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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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떠나시는 길 지켜드려야죠 전두환 전대통령.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수빈 삼성생명 회장.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조문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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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의 큰 별'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선종 사흘째인 18일 서울 명동성당. 어둠과 영하의 추위에도 아랑곳않고 새벽부터 정.관.재계 인사들과 시민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빈소가 개방되기 1시간 30분전인 오전 4시30분부터 김 추기경의 시신이 안치된 명동성당 대성전 앞은 조문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자 명동성당과 장례위원회는 8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을 동원하고 안전 펜스를 설치해 질서 유지와 안전에 만전을 기했다.
장례위원회는 "17일 9만2000여명의 조문객이 다녀갔고 18일에는 10만명 이상이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구급차를 대기시켰다"고 밝혔다.
이날 조문객으로는 김 추기경이 강도높게 비판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눈길을 끌었다. 김추기경은 1979년 전 전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부터 6.10항쟁까지 지속적으로 신군부에 저항하며 대립해 왔다. 이날 오전 11시께 수행원 20여명과 함께 나타난 전 전대통령은 "국가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신 김 추기경이 좀 더 오래 사셨어야 했다"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는 자신과 추기경과 '오랜 관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1사단장 시절 김 추기경이 지학순 주교와 함께 찾아와 성당을 지어달라고 하셔서 지어드린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전 전대통령은 추기경을 추모하는 자리에 적절치 않은 과거사를 끄집어내 주위를 당황시키기도 했다. 그는 "지난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왔는데 그 사람이 젊은 시절 축구선수였다. 나도 육사시절 축구 선수였다"라고 말한 것. 김 추기경과는 '인연'보다는 '악연'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황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이날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 재계 주요 인사들도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오전 10시께는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을 비롯한 삼성그룹 사장단 11명이 성당을 방문했다. 이수빈 회장은 "공교롭게도 내 세례명도 스테파노"라며 "16일은 국가의 큰 분을 잃어 슬픈 날이다. 앞으로는 추기경님이 항상 말씀하신 대로 모두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추모사를 전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부부와 손병두 서강대 총장도 이날 오전 빈소를 찾았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을 많이 하셔서 분명히 좋은 곳으로 가실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옆에 있던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 김 회장이 도와줬고 대우 노사분규 때는 추기경님이 격려를 많이 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 부인인 정희자씨는 "(남편이) 도피 생활 중에도 서로 연락했고 추기경님께서 기도를 많이 해주셨다"고 밝혔다.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은 이날 오전 8시 40분께 조문을 마친 뒤 "2년 전 새삼스레 가톨릭에 입문한 뒤부터 추기경님 뵙기를 기다렸는데 결국 못 뵈었다"며 "사랑과 용서, 희망, 용기를 주신 우리 시대 큰 어른이 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노신영 전 국무총리도 조문한 뒤 "온 국민이 존경하는 분이 돌아가셔서 슬픔을 금할 길 없다. 하느님이 계신 곳에서 편히 영생을 누리시길 빈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빈소를 찾은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영적 정신적 지도자이신 김 추기경이 천국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았다"며 "추기경은 하나님을 사랑했고 이웃을 내 몸 바쳐 사랑한 위대한 주님의 사도였는데 이제 떠나서 마음이 허망하다"고 애도했다.전지현.문일호기자
◆ "회사 지각해도 조문" 추위속 장사진
공식 조문 시간이 새벽 6시인데도 새벽 4시께부터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이날 가장 앞줄에 서서 가장 먼저 조문한 박수진(46)씨는 "신림동 삼성산성당에서 매주 화요일 밤 철야 성령기도와 미사를 드리는 모임 회원들과 추기경님을 뵈러 왔다"고 말했다.
회사에 출근하기 전에 조문하려는 직장인들도 눈에 띄었다. 오전 7시께 행렬 뒷부분에 서 있던 김종필(53.경기 성남시)씨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줄이 길 줄 몰랐다. 직장도 성남에 있고 출근시간이 8시인데 지각을 각오하고 오늘 꼭 (추기경님을) 만나 뵙겠다"고 말했다. 두 아이의 고사리손을 잡고 온 주부 김화도(29.서울 강남구 신사동)씨는 "2시간 넘게 기다렸다"며 "아이들이 생전의 추기경을 뵌 적이 없어 유리관에 계신 모습이라도 보여주려고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 "4시간이상 기다릴 각오로 김밥에 카라멜, DVD플레이어까지 들고 왔다며 매고 있던 가방을 열어 보여줬다.
70대의 최필현(인천 간석동)씨도 조문행렬 속에 2시간 이상을 꼿꼿이 서 있었다. 그는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 모두에게 빛과 같았던 존재"라며 "하늘나라에서 그 분을 다시 뵙고 싶다"고 말했다.
긴 행렬 속에서 2시간 넘게 기다리면서 사람들은 조용히 기도하기도 하고 옆사람과 김 추기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추위와 싸웠다.
◆ 정.관.재계 인사들 발길 잇따라
이날도 정.관.재계 인사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은 이날 오전 8시40분께 조문을 마친 뒤 "2년 전 새삼스레 가톨릭에 입문한 뒤부터 추기경님 뵙기를 기다렸는데 결국 못 뵈었다"며 "사랑과 용서, 희망, 용기를 주신 우리 시대 큰 어른이 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노신영 전 국무총리도 조문한 뒤 "온 국민이 존경하는 분이 돌아가셔서 슬픔을 금할 길 없다.하느님이 계신 곳에서 편히 영생을 누리시길 빈다"고 말했다.
이 날 오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부부와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함께 추모하는 자리를 가졌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일을 많이 하셔서 분명히 좋은 곳으로 가실 것 같다"고 소감을 전했다.
손 총장은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 김 회장이 도와줬고 대우 노사분규 때는 추기경님이 격려를 많이 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 부인인 정희자 씨는 "(남편이) 도피 생활 중에도 서로 연락했고 추기경님께서 기도를 많이 해주셨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전 10시께는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등 삼성그룹 사장단 10여 명이 함께 성당을 찾았다. 이수빈 회장은 "공교롭게도 내 세례명도 스테파노다. 큰 분을 잃어 슬픈 날"이라며 "추기경님 말씀대로 다 같이 사랑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애통해했다.
◆ 사랑의 바이러스 확산
한편 김 추기경의 뜻을 이어 사랑을 실천하자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우선 김 추기경이 각막을 기증하고 떠나셨다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사랑의 장기기증 본부' 등에는 장기기증을 신청하는 건수가 평소의 5배 이상 늘었다.
또 김 추기경이 설립하거나 후원해온 '한마음한몸운동본부'나 '성가정입양원' 등의 사회복지단체에도 후원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 추기경 통장잔고 1천만원 .... 선물값 제하면 마이너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당시 통장에는 약 1000만원의 잔고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김수환 추기경 장례위원회 홍보담당 허영엽신부는 18일 "추기경님의 재산은 남은 게 거의 없다"고 밝혔다. 잔고가 1000만원 밖에 안되는데 선물로 산 묵주비용등 빠져나갈 돈이 남아있어 이것을 제하면 오히려 모자랄 수도 있다는 것.
허 신부는 "추기경님은 은퇴 생활 보조금으로 월 250만원씩 받았는데 이는 다른 신부하고 차이가 없는 금액"이라며 "추기경께선 평소 도움을 요청하신 분들을 도와주는데 보조금을 쓰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허 신부는 교황청 사절 문제에 대해 "추기경님이 평소에도 가능하면 간소하게 진행하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고, 교황께도 알렸기때문에 이 점을 감안해 대표사절을 보내실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장례에 사용하는 관도 일반 신부들이 사용하는 관과 같은 걸로 제작됐다. 허신부는 "추기경도 평소 병상에서 여러 차례 관을 소박한 것으로 해달라고 부탁을 하셨다"면서 "그 유지를 받들어 일반 신부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준비했다"고 밝혔다.
관은 삼나무로 제작하는데 다만 일반관보다 30㎝ 정도 길다. 보통 신부들의 관은 2m인데 김 추기경의 관은 230㎝정도다. 이는 모관(Mitra.추기경의 품의를 상징하는 모자)을 쓰기 때문이다. 또 추기경의 문장이 관 뚜껑에 새겨져 있다는 점도 다르다. 현재 삼나무 관은 명동성당에 보관돼 있다.
무덤 축복, 하관, 성수뿌리기 등 매장과정도 일반 신부들의 장례절차와 비슷한 수준으로 할 것으로 알려졌다.
허신부는 또 기념관에 대해 "아직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기념관을 따로 건립하는 것은 추기경님의 유지와는 맞지 않아 기존의 곳을 보완하는 방향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소유를 스스로 실천한 추기경의 삶이 귀감이 되고 있다.
[문일호 기자 / 우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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