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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촬영이야기

'꽃 중의 꽃' 야생화 부부

惟石정순삼 2015. 12. 2. 03:38

입력 : 2016.12.01 03:13

주말엔 꽃 산행, 주중엔 꽃 대화… 부부 금실은 저절로 좋아져
"전 언제나 남편과 함께 갈까요?" 같은 취미 쉽지 않아 부러움 대상
자귀나무 잎처럼 꼭 붙어서 꽃 보러 다니는 부부 늘었으면

김민철 사회정책부장
김민철 사회정책부장


흰구름(동호회 닉네임·56)님이 처음 남편 킹스밸리(59)님을 따라 꽃구경을 간 건 2010년 강원도 정선 덕산기계곡이었다. 남편이 같이 가보자고 해도 "뭐하러 사서 그런 고생을 하나. 정 가고 싶으면 혼자 다녀오라"고 하다가 못이기는 척 한번 따라나선 자리였다.

흰구름님은 거기서 '립스틱 물매화'에 반해 꽃에 빠져버렸다고 했다. 립스틱 물매화는 물매화 중에서 꽃밥 부분이 붉은색이어서 빨간 립스틱을 바른 것 같다고 꽃쟁이들이 붙인 이름이다.

이제 흰구름님은 남편과 함께 주말마다 꽃 탐사를 다닌다. 2월 중순 남쪽으로 내려가 변산바람꽃, 복수초를 시작으로 11월 해국, 털머위에 겨우살이까지 봐야 직성이 풀린다. 흙바닥에 엎드려 꽃 사진을 찍고 다래 덩굴이 얽힌 산길을 헤치며 나아가는 일도 이제 어색하지 않다. 부부 모두 고수 경지에 오른 건 물론이다.

꽃쟁이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함께 꽃을 보러 다니는 부부들이다. 험한 바위길에서 남편이 아내 손을 잡아주고, 남편이 꽃 사진을 찍을 때 아내가 나뭇가지를 젖혀주고, 꽃 사진을 보며 함께 좋아하는 부부 모습은 참 보기 좋다. 흰구름님은 "성격에 날카로운 면이 있었는데, 남편과 함께 꽃을 보러 다니면서 여러 사람과 어울리다 보니 넉살도 좋아지고 웃는 일도 늘어났다"고 말했다.

야생화 마니아들의 모임 '야사모'에만 이런 커플이 열쌍이 넘는다. 꽃 산행에 부부가 나란히 참석하면 "얄미울 정도로 행복해 보여 배 아프다" "전 언제나 남편과 함께 참여할 수 있을까요?" 같이 부러움 섞인 말을 자주 듣는다. 부부는 닮는다는데, 웃는 모습이나 꽃 사진 찍는 자세 등이 비슷한 경우가 많아 놀림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한 회원은 "부부 회원이야말로 꽃 중의 꽃"이라고 했다.

킹스밸리님은 "직장인이라 주중에 아내와 대화할 기회가 많지 않은데 주말에 온종일 대화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질 틈도 없고…"라고 말했다. 주중에도 꽃을 소재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금실이 좋아졌다는 부부가 많다. 킹스밸리님은 "특히 나이 들수록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갖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누구나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갖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야생화에 빠진 한 여성 회원은 '어떻게 하면 남편도 꽃에 관심을 가질까'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주말이면 친구들과 산행을 다니는 남편한테 "산에 가면 야생화가 많을 테니 사진을 좀 찍어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남편은 늘 빈손으로 귀가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꽃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몇 차례 더 꽃 사진을 다그치자 남편은 귀가 직전에 아파트 화단에 있는 꽃을 찍어왔다. 여성 회원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도 10년 넘게 아내를 꽃 산행에 동참시키려고 노력 중이나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그나마 세 번 가면 한 번 정도 인심 쓰듯 동행하는 것에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서민환 국립생물자원관 연구부장은 평생 함께 숲을 연구하는 '숲 부부'다. 서울대 산림자원학과 81학번 동기인 두 사람이 인연을 맺게 해준 것은 아카시아 나무였다. 이 원장은 대학원 시절 아카시아 나무의 꿀 분비량과 개화 과정을 연구했다. 한밤중에도 서울대 연습림, 수원 팔달산 산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 기꺼이 동행해준 사람이 지금 남편이었다. 제주도로 간 신혼여행도 남들처럼 관광지를 돌지 않고 비자림숲, 여미지식물원 등에서 보냈다. 이 원장은 전공이 식물분류학, 남편은 산림생태학이라 같은 듯 좀 다르다. 이 원장은 "남편은 숲을 보고 나는 숲에 사는 식물을 보는 사람"이라며 "똑같으면 갈등이 있을지 모르는데 약간 달라 보완적인 관계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심각하게 소리 지르고 하는 부부싸움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부부는 '어린이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풀백과사전' '숲으로 가는 길' '쉽게 찾는 우리 나무' 등 책을 함께 쓰기도 했다.

자귀나무는 한여름 공작새가 분홍색 날개를 펼친 듯한 꽃을 피운다. 윤후명의 중편소설 '둔황의 사랑'에선 수줍은 소녀의 볼을 '자귀나무 꽃 빛의 홍조'라고 표현했다. 자귀나무의 별칭은 합환수(合歡樹) 또는 합혼수(合婚樹)다. 밤이 오면 잎사귀들이 포개지는 특성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래서 부부 금실을 상징하는 나무로 예부터 신혼집 마당에 심어 화목하게 살기를 기원했다. 자귀나무 잎처럼 꼭 붙어서 꽃을 보러 다니는 부부가 늘어났으면 좋겠다.


<2016.12.01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