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 데려다주네
- ▲ 렌즈 70㎜ㆍ셔터스피드 0.5초ㆍ조리개 f/22ㆍ감도 ISO 50ㆍ삼각대와 ND4 필터 사용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중학교 1학년 때다. 노출을 공부하다 보니 뜻밖에도 그 식초로 쓴 편지가 생각났다. 노출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육안으로 보이지 않던 것이 사진에 찍히기도 하고, 그 반대로 육안으론 보였던 것이 사진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노출은 한마디로 빛을 조절하는 구멍(조리개)과 빛이 상(像)에 맺히는 시간(셔터스피드)을 조절해서 만드는 일종의 마법이다. 구멍을 줄이면 줄일수록 사진은 선명해지고 빛이 상에 맺히는 시간도 길어진다. 이걸 장(長)노출이라고 한다. 반대로 구멍의 크기를 늘리면 빛이 상에 맺히는 시간도 짧아진다. 단(短)노출이다.
이 두 가지를 적절히 활용하면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진을 얻을 수 있다. 흔히들 처음 사진을 배울 때 많이 찍는 게 야경(夜景)이다. 장노출로 야경을 찍으면 불빛이 움직이는 궤적(軌跡)이 모두 사진에 잡힌다. 육안으로 볼 땐 잘 안 보였던 부분이 사진에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는 것이다. 마치 레몬즙으로 감춰놨던 글씨가 다리미 아래에서 보이는 것처럼. 하지만 이 장노출을 필요 이상으로 길게 잡으면 눈에 보였던 것도 아예 사진에선 사라지게 된다. 한 사진가(박홍천)는 이걸 이용해서 놀이공원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엔 희한하게도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움직이는 것(사람)은 찍히질 않고 정지해 있는 것(놀이공원 기구)만 기록에 남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은 '움직이는 모든 것은 언젠간 사라진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재작년 여름 계곡의 흐르는 물을 좀 더 극적(劇的)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나 궁리하던 때에 어린 시절 친구의 레몬즙 편지가 생각났다. 장노출을 활용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물줄기의 흐름까지 모두 표현할 수 있다. 후배를 계곡 끄트머리에 앉히고 셔터를 눌렀다. 넘칠 듯 흐르는 물. 앉아 있는 후배의 모습. 그 대비 덕에 재미있는 사진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