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없는 잔잔한 날물에 비친 풍경 담아라
- ▲ 렌즈 50mm·셔터스피드 1/125 sec·조리개 f/8·감도 ISO 400. 삼각대 사용.
그리스 신화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는 소년 나르키소스의 얘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이 얘기에서 자기애(自己愛)가 지나칠 때 생기는 비극을 읽곤 하지만, 엉뚱하게도 난 이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리게 된다. '그래, 원래 물에 비친 모습이 실제보다 더 멋져 보이는 거야.'
사실이다. 물에 비친 사물은 실제와 똑같아 보이지만 조금은 다르다. 일단 위아래가 바뀐다. 선명도가 또 다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엔 실물이 거의 그대로 보이지만 바람 부는 날엔 모습이 살짝 흐트러진다. 그래서 난 대개는 실물만 찍는 것보단 그 실물과 물에 비친 모습이 함께 있는 장면을 담는 게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더 극적이니까. 특히나 가을 풍경 사진을 찍을 땐 이 사실을 새삼 되새긴다.
가을은 물과 풍경을 섞으면 가장 기막힌 효과를 내는 계절이다. 온 세상이 다채로운 빛깔에 겨워 춤추는 시기. 산도 들도 제 몸 안에 숨겨 놓았던 마지막 채도까지 내뿜으며 환호한다. 이 풍경을 그러나 그냥 카메라에 담으면 좀 뻔한 사진이 된다. 울긋불긋 달력 사진에 그치기 쉽다.
'변주(變奏)'를 꾀하고 싶다면 이럴 때 물에 비친 가을 풍경을 찍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가장 쉬운 건 강·호수에 비친 가을 풍경을 찍어보는 것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가을 풍광, 그 풍광이 다시 물에 비쳐 또 다른 화려함을 만드는 모습을 한꺼번에 찍는 것이다. 자연이 만들어 낸 가장 눈부신 데칼코마니(d�[calcomanie)를 포착하는 과정인 셈이다. 이때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날씨다. 실물과 거의 똑같도록 선명하고 쨍쨍한 반영(反映)을 찍고 싶다면 하늘이 맑고 바람은 잔잔한 날을 고른다. 수면이 얼어붙은 듯 고요할수록 날카롭고 명확한 풍광 사진을 얻을 수 있다.
경북 청송에 있는 주산지는 사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선 반영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작년 가을 이곳에서 또 사진을 찍어야 할 일이 생겼다. 한 뼘이라도 다른 사진을 찍기 위해 주왕산과 주산지를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헤맸다. 촬영은 햇살의 각도상 수면이 풍광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아침나절에 했다. 마침 바람 한 점 없는 잔잔한 날씨가 사진의 극적 효과를 더했다. 이때 초점은 수면 위에 맞췄고, 셔터스피드는 조금 빠르게 조절했다.
반대로 은은한 반영을 찍어 몽환적인 효과를 얻고 싶다면 바람이 살짝 부는 날을 택한다. 이지러진 반영과 실제 풍광이 함께 어우러져 시적(詩的)인 느낌마저 준다. 마지막 팁 하나. 더 재미있고 유쾌하게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면 빗물이 만든 물웅덩이, 손으로 살포시 떠올린 물에 비친 풍경도 찍어보길 권한다. 그렇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르키소스가 물에 빠진 계절은 가을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