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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사이야기

노민상- "태환이가 죽도록 밉다"

惟石정순삼 2011. 2. 13. 00:57

'눈물의 은퇴' 후 침묵하던 노민상 수영감독, 입을 열다

박태환에게 팽?…
해외 코치에게 가버린 애제자
"내 교육방식도 선진국에 안 뒤지는데…세상과의 연을 다 끊고 싶었다"
"그래도 태환이가 부르면 어디든 달려갈 것"
"태환이가 나 죽으면 내가 좋아하던 막걸리 한 통 사와서 무덤에 뿌려줬음 좋겠다
좋은 차 타고 크게 성공해서"
"수영계도 히딩크 필요?… 올림픽 金은 내가 만들었다"

그 '눈물'을 두고 말들이 많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대한 포상식이 열린 지난달 13일, 국가대표 수영 감독 노민상(55)이 은퇴를 전격 선언한 뒤 애제자 박태환을 포옹하며 쏟은 눈물. 사람들은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 싶다'는 노장의 용퇴, 그 회한의 눈물에 박수를 보냈지만,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논평은 달랐다. '박태환 측에 팽 당했다' '15년 인연의 잔인한 종결' 같은 동정론이 있었고, '한국 수영의 글로벌적 도약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현실론도 나왔다. '토종 독종' 박종환의 한국 축구가 히딩크의 손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뛰어올랐듯이, 수영 또한 '토종 독종' 노민상의 훈련방식이 글로벌 단계로 진입해야 할 때가 왔다는 얘기다.

8일 오후, 노민상 감독은 약속시간 30분이 지나서야 잠실학생수영장에 나타났다. 은퇴 선언 후 침묵을 지켜온 그다. 아는 기자들(주로 체육부)의 번호는 받지 않는 식으로 전화를 골라 받다가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돼 있지 않던 기자의 전화를 '실수로' 받았다며 허탈하게 웃던 노 감독은, "세상과의 연을 다 끊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행복했다, 우리 태환이 많이 도와달라'며 파이팅을 외치고 무대를 내려온 그는 뭐가 그리 서운했던 걸까.

어렵사리 말문을 연 노 감독은 거침이 없었다. 해외 코치에게로 간 애제자를 의식한 듯 "내 교육방식이 결코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강조하는가 하면, 제2의 박태환을 키우는 데 무관심한 당국에 대한 원망도 숨기지 않았다. "수영연맹과의 사이에 껄끄러운 점이 있었느냐"는 질문엔 "전혀 없다"면서도, "지도자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반드시 진다"고 덧붙였다. 15년 전 자신이 발굴해 세계적인 수영스타로 키워낸 박태환에 대해서는 아직도 마음의 정리를 하지 못한 듯했다. "죽도록 밉다"며 섭섭한 감정을 토로하다가도 "한번 묶인 매듭이 그리 쉽게 풀리겠나" "태환이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 것"이라며 강한 애정과 미련을 나타냈다. 인터뷰가 성사된 날은 박태환이 2011 상하이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준비를 위해 호주로, 마이클 볼 코치에게로 전지훈련을 떠난 날이기도 했다.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온 노민상 전 국가대표 수영감독. 사진 촬영을 위해 오른쪽 가슴에 태극 마크가 있는 운동복을 입고 나온 노 감독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면이 있었다. 노 감독은 인터뷰에 응하는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이나마 우리 꿈나무들 연습공간을 제공해준 국민체육진흥공단과 올림픽 공원측에 감사하다는 말을 기사에 꼭 써달라"고. "제2의 박태환을 길러내는 게 마지막 사명"이라고 했지만, '재야'에서의 선수양성이 여의치 않은 것을 깨달은 노 감독의 절망적인 심경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태환이 밉지요, 죽도록 밉지요

―후배들 위해 용퇴하셨다면서 전화는 왜 안 받으시나.

"그냥 암자 같은 데 가서 내 시간을 갖고 싶었다. 세상과의 연을 다 끊고 싶었다."

―서운하신가. 감독직 내놓으신 거, 박태환을 더이상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이.

"2009년 로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참패를 태환이가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만회했으니 됐다. 정다래와 함께 동반 메달도 땄으니 국가대표 감독으로서는 더이상 욕심 없다. 그래서 떠나려고 결심한 거다. 후배들 길도 터줘야 하고."

―광저우의 승리가 '과외선생'이라던 마이클 볼 코치의 공로로 돌아가고, 또 태환이 볼 코치와 재계약을 해서 떠나니 서운했던 거 아닐까.

"마이클 볼은 나와 연맹이 함께 선임한 지도자다. 왜 서운하겠나. 다만 딸자식 시집보내는 기분이었던 건 사실이다. 잘 자랐으니 이제 보내야지."

―볼 코치의 훈련방식엔 불만 없나. 박태환 호주 훈련장에도 따라가 수영장 비닐 벗겨주고, 줄 치면서 허드렛일 하셨다던데.

"서로가 장단점이 있겠지. 그러나 인성을 중시하는 건 똑같더라. 선수는 진실하고 성실해야 한다. 다행히 볼은 진짜 부지런하게 가르치는 사람이다. 허드렛일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래도 태환이가 미울 것 같다.

"밉기는 엄청나게 밉지. 죽도록 밉지. 그러나 그건 나 혼자의 욕심이다. 다만 태환이가 나 죽으면 선생님 좋아하던 막걸리 한 통 사들고 와서 무덤에 뿌려줬으면 좋겠다. 좋은 차 타고, 크게 성공해서."

―박태환이 계속해서 성공을 이어갈 수 있을까.

"나는 확신한다. 다만 인성이 갖춰져야 한다. 더 겸손해져야 하고, 더 성실해져야 한다."

―감독이었지만 태환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고 하더라. 전지훈련 갈 때 비행기 안에서 감기 들까 봐 가습기도 가져가고.

"초콜릿·가습기·베지밀까지 다 내가 챙겼다. 내가 담배를 좋아해서 비행기 타는 거 아주 싫어하는데 태환이 때문에 여권에 일수도장 찍듯이 하며 돌아다녔다."

―혼내신 적은 없나.

"사춘기 접어들면서 녀석이 슬슬 입에 쌍소리를 담기 시작하기에 태환이 머리를 변기에 처박은 적 있다. 아이들 잘 혼내지 않는데, 습관 잘못 들면 큰일 나겠다 싶은 것은 철저하다."

―태환이 가만 있었나. 대들지 않던가.

"버티면서 (화장실로) 안 들어가려고는 했지. 저도 그런 선생님 모습 처음 보니 많이 놀랐고, 이후로는 슬기롭게 선수생활 하더라."

―박태환 때문에 우신 적도 있었을 텐데.

"최연소 국가대표로 출전한 아테네올림픽에서 부정출발로 예선에서 실격당했을 때. 당시엔 내가 감독이 아니니 서울에 남아 경기를 봤는데, 실격 소식 듣고 나서 태환이 아버지랑 포장마차에서 소주 마시며 울었다. 다 잊고 새로 시작해보자고 태환이 아버지를 위로했다."

지난달 13일 국가대표 감독직 은퇴를 발표한 노민상 감독이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 OSEN 제공

그래도 태환이 부르면 달려간다

―가장 기뻤을 때는 당연히 태환이가 금메달 땄을 때였겠지?

"물론이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아시아 신기록 2개 세우고 태환이가 1500m에서 15분 벽을 넘었을 때.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이겼을 때.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는데 그 자리에 퍽 주저앉았다. 눈물이 줄줄 흐르더라. 애국가 울려 퍼질 때 또 하염없이 울었다. 머릿속에 태환이 여덟 살 때 모습부터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라."

―2005년 11월 박태환이 마카오 동아시안게임에서 400m 우승을 하면서 이듬해 국가대표 감독으로 전격 영입됐다. 하지만 오산고 중퇴에다 수영연맹에 이렇다 할 인맥이 없어 겉돌았다는 얘기가 있다.

"야인이었고 어떤 연줄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오로지 태환이 때문에 감독 된 거 아닌가. 시기와 질투도 엄청났다. 신문에 인터뷰 한 줄 나는 것까지 미워하더라. 자기가 나를 때려놓고 나의 자작극이라고 모함하는 인사도 있었고."

―태릉선수촌에서의 리더십에는 문제가 없었나.

"전혀. 아이들은 사랑을 베풀면 따라온다. 나는 선수들 생일에 책 한권이라도 사서 선물한다. 감독이지만 아이들 심부름도 안 시켰다. 양말도 다 내가 빨아 신고."

―그러면 지도자의 권위가 무너질 수 있지 않나.

"아이들 체벌하면서 얻는 권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경기력에 필요한 권위만 세우면 되는 것이다."

―태환이 변기 사건은 일종의 체벌 아닌가.

"심한 건 아니었다. 감독 되기 전 일이고. 사춘기 막 접어들 때 생활습관을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이후로는 그런 일 없었다."

―박태환 선수가 감독님 술 마시는 걸 무척 싫어했다더라. 사인할 때 '늘 처음처럼'이라고 쓸 만큼 술 좋아하고, 주량도 엄청난 데다, 취하시면 잔소리를 많이 해서. 베이징올림픽 앞두고 다시 태릉선수촌 감독님 밑으로 돌아오면서 '술 끊어달라' 부탁까지 했다던데.

"태환이는 선생님에게 그렇게 말할 아이가 아니다. 나를 시기하던 사람들이 술을 갖고 트집을 잡을 기세이니 내가 먼저 끊어버린 것이다. 태환이를 위해 뭐는 못하겠나. 맥주 한 방울 입에도 안 댔다."

―왜 그렇게 박태환에게 집착하시나. 전담팀 꾸려 감독님 곁 떠나기를 밥 먹듯 했는데도 돌아오면 언제고 환대하셨더라.

"집착이 아니고, 내 제자니까. 자식 같은 제자가 힘들다고, 어렵다고 부르는데 선생님이 달려가야지. 내가 거둬주지 않으면 누가 거둬주나. 지금은 잘나가니까 날 찾지 않지만, 나를 필요로 하면 언제든 갈 것이다."

―화보 찍느라 2009년 로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전 종목 결선진출에 실패하고 돌아왔을 때에도 받아주셨다.

"내가 태환이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그 나이에 뭐는 안 해보고 싶겠는가. 그 슬럼프를 겪고 아시안게임에서 멋진 모습 보여줬으니 태환이가 대단한 거다."

―여덟 살 박태환을 처음 만났던 날 얘기를 듣고 싶다.

"무궁화스포츠센터라는 곳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내가 국가대표 선수들을 몇 길러내서 명성이 좀 있었다. 어떤 꼬맹이가 포카리스웨트를 두 손에 들고 와서는 꾸벅 인사를 하더라. 네가 누구냐 했더니 '박태환입니다' 하더라. 처음 얼마간 후배 코치들 손에 있다가 연습하는 폼이 심상치 않아 내가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조오련의 수영복을 훔쳐 입다

노민상은 서울 한남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제3 한강교 나루터 부근에 집이 있어서 사계절 한강에서 놀면서 헤엄치는 법을 터득했다. 그의 말대로 '가방끈(학벌)'은 짧다. 수영으로 유명한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오산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가세는 말할 수 없이 기울었다. 한강에 홍수가 나면 집이 떠내려갈 정도였단다. '제2의 조오련'을 꿈꾸던 노민상은 그렇게 선수로서의 길을 포기했다.

―명색이 선수 출신인데 왜 이렇게 몸이 마르셨나.

"난 고기를 먹으면 토한다. 시래기나물만 먹고 자라 그런가 보다. 무슨 고기든 석 점만 먹으면 젓가락 내려놔야 한다."

―선수로서 실패한 것은 순전히 가난 때문이었을까.

"타고난 기량이고 뭐고 제대로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단체우승한 적은 있지만 개인으로는 3등 이상 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학교까지 그만둘 필요는 없지 않았나.

"우리 집이 얼마나 어려웠냐면, 초등학교 4학년 때 기성회비 안 가져왔다고 담임한테 종아리가 부르트도록 맞았다. 어머니가 다리가 왜 그 모양이냐 물으시는데, 기성회비 때문이라고 하면 마음 아프실까 봐 애들이랑 쌈박질했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나도 어린애니까 이불 뒤집어쓰고 진짜 많이 울었다. 우리 형편에 고등학교까지 간 것만도 대단했다. '한강 가서 헤엄치면 되지 수영부는 뭐하러 들어가냐'던 어머니에게 합숙비를 달랄 수 있는가. 당장 학교 공납금 내기도 어려웠다."

―조오련 선수 수영복 훔쳐 입은 일화가 유명하더라.

"당시 톱이었으니까. 수영계 4년 선배인 조오련 한번 이겨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 수영복 입고 헤엄치면 어떤 느낌인가 싶어서 태릉에서 함께 훈련할 때 몰래 훔쳤는데 들통이 나서 뒤지게 얻어맞았다."

―고등학교 그만두고 뭐했나.

"신문배달. 신문 돌려서 어머니 텔레비전 사 드렸다. 지금도 집사람에게 신문배달부에게는 크리스마스랑 설날에 양말이라도 꼭 선물하라고 이른다. 미8군에서 세차도 했다. 거기서 번 돈으로 어머니 전세 보증금 내드렸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군대도 생명수당 나오는 전방으로 지원했는데 떨어지고 원주로 배치됐다."

―군대 행정병 시절 글씨를 잘 써서 장교들이 좋아했다더라.

"한문을 좀 잘 쓰는 편이다. 어느 날 대대장이 이 글씨 누가 쓴 거냐고 물어 노민상 일병이 썼다고 하니 날 부르더라. 당시 대대장이 원주 상지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더러 대신 리포트를 쓰라고 했다. 처음엔 책만 보고 들입다 베꼈는데, 강의도 직접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대대장에게 청을 넣었더니 허락하더라. 일종의 청강생이 되어 상지대 행정학과를 다닌 셈이다. 뭣보다 강의 들으러 간 동안엔 고참들에게 안 맞으니까 좋았다."

―수영강사는 언제부터 하셨나.

"1980년. 군대 제대한 뒤 일반 스포츠센터 강사로 전전하다, 최고의 지도자가 되고 싶어 당시 가장 유명한 코치를 찾아가 노하우를 가르쳐달라고 엎드렸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내 궁금증이 안 풀리더라. 200m를 헤엄칠 때와 400m를 갈 때 신체는 어떤 변화를 겪고, 몸은 무엇을 원하게 되는 것인지 같은 것들. 그래서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다.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해서 해외자료도 찾아보고. 손글씨로 선수들 몸 상태, 그에 맞는 훈련 프로그램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수영선수로 타고난 신체가 아니어도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나.

"15세 이전이라면 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꿈나무들에게 열정을 바치는 거다."

8일 잠실학생수영장에서 노민상 감독이 '꿈나무'들에게 그날의 훈련 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있다. 노 감독은 "빨리 가려고만 하지 말고 리듬을 타라고, 물살을 즐기라"고 조언했다. /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선생은 앉아서 가르치면 안 된다

"일선에서 어린 꿈나무를 가르치는 데 주력하겠다"고 약속했던 대로 요즘 노 감독은 하루 세 번 잠실학생실내수영장과 올림픽공원수영장을 오가며 '꿈나무'들을 훈련시킨다. 수영장에 들어서면 돋보기를 끼고 칠판에 깨알 같은 글씨를 적어내려간다. 훈련거리와 강도, 체중과 맥박수, 젖산 분비량을 뜻한다는 영어 약자들이 암호처럼 빼곡히 등장한다. 그날 아이들이 수행할 훈련의 내용이다. "무턱대고 열심히 하라고만 하면 안 돼요. 자기들이 뭘 배우는지를 알아야지. 수영은 과학이니까. 여기에 생리학이 다 들어 있어요." 훈련 중 노민상 감독은 "빨리 가지 마" "리듬을 타야지" 소리를 입에 달았다. 후배 코치들은 훈련시간 내내 수영장을 뛰어다녔다. 노 감독이 중얼거린다. "선생은 앉아서 가르치면 안 돼. 지도자로는 글렀다고 봐야지." 그는 또 "한 맺힌 놈들만 골라 지도자로 양성한다"고도 했다. "뱃속 편한 것들은 앉아서 가르치거든. 애들이 배울 게 없지."

―아이들 훈련프로그램이 매일매일 바뀐다더라.

"그래야 아이들이 싫증 안 내고 오래간다. 무조건 매일 100m에 몇 초씩 줄이라고 다그치는 건 훈련이 아니다. 구체적인 플랜, 프로그램이 있어야지. 옷을 한 벌만 갖고 사나? 기량과 특성이 다 다른 선수들한테 저마다 맞는 걸 사서 입히려면 이런 프로그램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

―'빨리, 더 빨리'가 아니고 왜 '빨리 가지 마'인가?

"25m는 전력질주하고, 75m는 잠수하면서 몸을 회복시켜야 한다. 무턱대고 기록 단축시킨다고 몸을 무리하게 쓰면 큰일난다. 운동은 몸이 아프지 않게 해야 한다. 오장육부는 병이 나도 빨리 고칠 수 있지만 어깨, 관절, 허리는 한번 나가버리면 끝이다. 무식한 놈들이 사람을 잡는다."

―컴퓨터도 있는데 왜 일일이 손글씨로 기록하나.

"컴퓨터는 인정머리 없어서 싫다. 컴퓨터는 애들이 아픈 걸 모른다. 내가 직접 아이들 체중과 맥박수를 따져서 일일이 기록하다 보면 아이들이 어디가 아픈지, 어디에 고장이 났는지 금방 안다. 어제 몸무게 66㎏에 맥박수 80이었던 아이가 오늘 65㎏ 맥박수 85라면 이건 어디가 아픈 거다. 밤에 잠을 안 잤다든지, 머리가 아프든지. 그러면 훈련강도를 낮춰야 한다. 과거에는 무조건 '이 새끼야 너 어제는 잘했는데 오늘은 왜 이래?' 혼내기만 했지만 나는 그렇게 안 했다."

―박태환도 그렇게 가르치셨나.

"그럼. 태환이도 못할 때 있었다. 한국 아이들한테도 지고. 그런데 기다렸다. 즐기면서 하게 했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

―노민상 감독을 축구의 박종환 감독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토종 수영의 한계를 토종 축구의 한계와 결부시키면서. 기분 나쁜가.

"아니. 나 같은 사람을 박종환 감독처럼 훌륭한 분, 색깔이 분명한 분에게 비유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토종 수영의 한계 인정한다. 우리 테크닉이 선진국 많이 따라잡았지만, 한국에서의 훈련 여건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다."

―한국 축구가 히딩크의 손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했듯이 박태환을 비롯한 한국 수영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노민상의 은퇴는 불가피했다는 말에도 동의하시나.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다만 국민들께 바라는 것은 우리 지도자들에 대한 믿음을 많이 가져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더 힘을 내지 않겠나. 외국만 나간다고 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거 아니다. 한국에서 내가 올림픽 금메달을 만들었다."

―김연아와 오서 코치의 결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가슴 아픈 일이다. 연아가 뛰어난 선수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오서 코치가 '선수 김연아'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야인으로 돌아오셨지만, 박태환 스승이라는 명성 때문에 배우려는 아이들이 줄을 섰겠다.

"아니다. 박태환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만든 사람이니 밖으로 나오면 사람들이, 정부가 엄청나게 도와줄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꿈나무들 훈련시킬 레인도 저렇게 부족하고, 후배 코치들 월급도 쥐꼬리만큼 준다. 박태환이 금메달 따면 좋아하면서도 제2의 박태환 길러내는 데는 투자하지 않는다. 술 먹는 돈은 아껴도 애들한테 투자하는 건 아끼면 안 되는데. 맥주 마실 거 소주 먹고, 닭똥집 먹으면 되는데."

―비교적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 국가대표 감독 하시다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셨으니 집에서 잔소리 좀 들으시겠다.

"오늘 아침에도 싸우고 나왔다. 남자 하는 일에 콩 놔라 팥 놔라 별걸 다 참견한다. 아직도 20평대 아파트에서 다 큰 딸들이랑 사니 짜증나기도 하겠지. 그래도 나는 내가 짊어진 짐을 덜어내지 않을 거다. 제2의 박태환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갈 거다."

―물, 지겹지 않나. 수영장 락스 냄새, 그 냉기.

"지겹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락스 냄새가 좋지는 않지만, 그 물이 없으면 우리들 꿈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물과 인생은 어떻게 닮았나.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떨어진다. 그러나 낮출수록 더 깊고 넓어진다. 폭포물이 연못으로, 호수로,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면서 더 깊어지고 넓어지지 않던가. 자신을 낮추어 흘러가면 더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태환이도 언젠가 그걸 깨달을 날 오겠지."